41.권력누수 허용않는 '유아독존'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과 가까웠던 소설가 이병주 (李炳注.작고) 씨는 朴대통령을 '청렴한 유아독존 (唯我獨尊)' 이라고 짧게 설명했다. '청렴' 여부는 다
음회에서 다루고, 유아독존이란 면에서 박정희는 정말 한방울 권력의 누수도 용납지 않는 절대권력자였다.
단호한 권력의지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2인자에 대한 불칼 같은 응징으로 나타났다. 2인자 반열에 올랐다고 할만한 인물도 많지 않다.
영원한 2인자 김종필 (金鍾泌.JP) , JP 없는 공간을 잠시 차지했던 김성곤 (金成坤.작고.쌍용그룹창업자.세칭 SK)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이후 유신과 남북대화를 주도했던 당시의 이후락 (李厚洛.73.세칭 HR) 정보부장 정도. DJP연대로 또다시 2인자의 길을 택한 JP는 유신전까지만 해도 '대권 후계자' 였지 '영원한 2인자' 가 아니었다. 5.16직후에는 1인자나 다름없는 2인자였다.
61년 6월5일 쿠데타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JP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육사 8기생들이 혁명을 구상해 추진했다" "박정희장군이 이번 혁명에 가담한 것은 지난 3월께부터다" "혁명공약과 각종 포고문, 국가재건최고회의 등의 안 (案) 은 모두 내가 기초했다" 고 밝혔다.
국가재건동지회 멤버였던 Z씨는 "1차로 박정희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생각이었지만 내밀하게는 '길어도 8년만 기다리면 JP를 새로운 영도자로 모실 수 있다' 는 기대에서 서약을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고 말했다.
그가 내놓은 서약서는 '생명을 아낌없이 바치겠다' 는 등의 비장한 문구로 가득 차 있다. 5.16직후 박정희장군 스스로도 미 군사고문단원인 하우스먼에게 "8기생 호랑이들이 나를 밀어내려 한다" 고 불평했을 정도다.
그러나 JP는 朴대통령이 권력기반을 다져가면서 점차 후계자자리에서 멀어져 간다. JP가 63, 64년 두차례 외유를 다녀왔을 당시만 해도 朴대통령은 그를 불러 위로한 뒤 곧 공화당 의장이라는 후계의 자리에 앉혔다.
그런데 두번째 외유에서 돌아올 무렵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이후락 (李厚洛.73.세칭 HR) 과 김성곤 (金成坤.작고.쌍용그룹 창업자.세칭 SK) 이 JP의 자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朴대통령의 '2인자 견제' 용인술의 결과다. HR는 63년 5대 대통령선거 직후 비서실을 구성할 때만 해도 JP측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JP계 사람들에 의해 조선호텔에 연금당한 채 사퇴협박을 받아야 했다.
JP와 비교될 수 없는 위상이었다. 민주당정권 당시 중앙정보위원회 (세칭 79부대) 의 책임자였던 HR를 구원, 중용해준 인물이 JP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HR는 JP가 2차 외유에서 돌아온 뒤인 65년말 국회의장선거 당시 대통령의 번의를 요청하러온 JP의 대통령면담을 물리칠 정도로 힘을 발휘했다. 물론 HR의 뒤에는 대통령이 있었다.
SK의 중용 역시 HR의 JP에 대한 견제용이었다. 당시 HR와 가까웠던 박제욱 (朴齊郁.71.전 영진흥산사장.미국 거주) 씨는 HR에게 "당 (黨) 쪽에 뜻을 같이 할 사람이 필요하다" 며 SK를 추천했다.
물론 HR는 "당내에 각하의 직계세력이 필요하다" 는 건의로 SK의 중용을 승인받았고, SK는 65년말 당의장 JP가 장악하고 있던 공화당의 돈줄을 거머쥐는 재정위원장이 됐다.
여기에 김형욱 (金炯旭.실종) 정보부장이 가세해 JP를 에워쌌다. 그물망 둘러싸 JP견제 JP에 대한 견제세력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朴대통령이 '후계자가 필요없다' 는 마음을 굳힌 시점, 즉 3선개헌을 구상하면서 부터다.
JP와 육사8기 동기로 김형욱과도 가까웠던 최영택 (崔榮澤.69) 씨는 67년 가을 김형욱과 만났다. "종필이는 아직도 대통령꿈 꾸나. 지 배때기에는 까만콩 (총알) 이 안들어갈 줄 아는기야, 뭐야. "
崔씨는 "朴대통령이 뭔가 언질을 주지 않고는 그렇게 내놓고 협박할 수 없다" 고 판단했다. 역시 사건은 이어졌다.
金부장은 '국민복지회' 사건을 만들어 냈다. 68년 봄 JP는 대통령의 호출을 받았다. 대통령은 대수롭지 않은 듯 한마디 물었다.
"임자, 거 복지회라는 게 뭐야. " JP는 "그게 뭡니까" 라고 되물었다. "그거 임자가 만들었다면서. YT (金龍泰공화당의원)가 임자 뭐 시킨다고 세력화한다는 얘기던데. " JP는 심상찮다는 느낌을 갖고 청와대에서 나오자마자 알아봤다.
김용태의원이 회장인 '국민복지회' 를 김형욱이 이미 수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JP는 "그때 이미 경상도세력과 이북출신들이 나를 내쫓으려고 안달이었다" 고 기억했다. 경상도세력이란 SK와 HR, 이북출신이란 김형욱을 일컫는 말이다.
이때 JP는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朴대통령에게 반발했다. 지구당에 탈당계를 제출하고 부산 해운대로 내려가 호텔 베란다에 화폭을 펼치고 바다를 그렸다. 탈당은 곧 의원직 상실과 정계은퇴를 의미했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朴대통령은 "이제껏 살아오면서 오늘같이 불쾌한 일은 없었을 거야" 라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부산으로 사람을 보냈지만 JP는 움직이지 않았다. 밤에는 대통령이 직접 JP에게 전화를 했다.
"올라와 나하고 얘기 좀 하지. " "제가 좀 가라앉으면 올라가겠습니다. " 며칠뒤 JP는 부인 박영옥 (朴英玉.68) 여사와 함께 청와대로 들어갔다. 당시 朴대통령은 조카 朴여사에게 술을 따르면서 "옥아, 삼촌이 밉제" 라고 물었다고 한다.
朴여사는 "예, 밉습니다" 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朴대통령은 조카 부부의 심경을 알면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조카의 술잔에 술을 부었다.
당시 심경에 대해 JP는 "쓸데없는 사람들이 시끄럽게 만드는 대상이 되기 싫어 아예 정계를 떠날 생각이었다" 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는 감정의 앙금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JP는 오랜 정치방학에 들어가 서산농장과 제주도 감귤밭을 일구었다. 그러나 그는 1년도 지나지 않은 69년 봄 다시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다.
3선 개헌에 반대해 물러난 JP인데 개헌 반대파를 돌려놓기 위해 끌어들인 것이다. 버린 사람이라도 필요하면 불러쓰고야마는 박정희의 용인술이다.
HR가 몇번이나 JP를 찾아왔다. 결국 JP는 청와대로 불려갔다. "임자가 안도와주면 누가 나를 도와주겠어. 속상하는 일 많다는 거 충분히 알고 있어. 이제 뭔가 돼 가는데 아무리 봐도 앞길이 순탄치 않아. 이 시기를 놓치면 더 어려워져. 임자가 하는 셈 치고 날 좀 도와줘. "
청와대를 물러나온 JP는 개헌에 반대해온 측근의원 16명을 불러놓고 말했다. "끝까지 반대한다고 안하실 분이 아닙니다. " JP는 이 무렵 문인들과의 모임에서 朴대통령 개헌의지를 "자식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집에 '말 안들으면 불지르겠다' 며 횃불을 들고 날뛰는 무서운 아버지" 에 비유했다.
며칠뒤 JP는 청와대를 찾아가 "반대하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대신 제가 죽을 곳이라도 따라가겠습니다" 며 고개를 조아렸다. 30년전 앙금 아직도 남아 이후 JP는 국무리라는 2인자 자리에 올라 장수했다. 총리시절 朴대통령의 종신집권을 예고하는 유신이 선포됐을 당시에도 JP는 "내친김에 하실 때까지 하십시오. 없는 힘이지만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라며 따랐다.
사실상 3선 개헌 이후 JP는 후계자의 시련보다 영원한 2인자로서의 아늑함을 택한 셈이다. 朴대통령의 확고한 권력의지, 칠종칠금 (七縱七擒.마음대로 잡았다 놓았다 함) 의 용인술 앞에서 JP는 영원한 2인자일 수밖에 없었다.
JP처럼 순종하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준 경우가 SK다. SK는 65년 재정위원장으로 돈줄을 거머쥔 뒤 HR와 함께 사실상 2인자의 영향력을 누렸다.
71년 SK로 대표되는 당내 신주류의 영향력이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조직에까지 미치자 朴대통령은 반SK성향인 오치성 (吳致成.작고) 씨를 내무장관에 임명한 뒤 직접 SK의 영향권내에 있던 내무관료와 경찰의 명단을 주면서 '정리' 를 지시했다. 여기에 반발한 SK가 야당에서 제출한 吳장관 해임동의안에 동조해 吳장관을 해임시켜 버린 것이 10.2항명파동이다.
항명한 SK는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정보부에 붙잡혀가 온갖 수모를 겪은 뒤 정계를 은퇴하고 방랑생활을 해야했다. 그는 아무래도 JP보다 선이 더 굵었든지 朴대통령을 잘 몰랐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