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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광복군 참여 경력날조자에 대노

한해가 저물던 1967년 12월 어느날 저녁. 서울의 중심가 명동거리에서 한 이방인이 당시 최고권력자 박정희 (朴正熙) 의 이름을 들먹이며 일본어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그가 한 골목길 모퉁이를 지날 무렵 경찰 두명이 나타나 그의 양팔을 낚아챘다.
대통령의 이름을 입에 담는 자체로 곤욕을 치르던 시절이었다.
그가 끌려간 곳은 인근 명동파출소. 이 외국인은 서투른 한국말로 다짜고짜 "나는 박정희의 친구다. 박정희를 불러오기 전에는 할 얘기가 없다" 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난감해진 파출소측은 자신들이 처리할 사안이 아님을 직감하고는 급히 모처로 전화를 걸었다.
두어시간 지난 후 한 인사가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국세청장 이낙선 (李洛善.전상공부장관.작고) 씨였다.
李씨는 5.16 초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비서관을 지내면서 朴의장의 신변자료를 챙긴 인물이었다.
李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니 高선생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
"어찌 되다니요. 당신들이 나를 제멋대로 이용해 먹고 이제와서는 나를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 겁니까. "

"제멋대로 이용해 먹고…"
李청장은 이 이방인을 파출소에서 데리고 나와 반도호텔에 방을 잡아주고는 며칠 뒤 대만행 비행기에 태워 떼밀다시피해 보내 버렸다.
1962년 11월 한 유력 중앙지에 '16년전의 박정희 학우 (學友)' 라는 제목의 글이 11일자부터 5회 연속으로 게재된 적이 있다.
'특별기고' 형식의 이 글은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중국인 동기생 가오칭인 (高慶印) 의 명의로 돼있다.
명동에서 술에 취해 박정희를 마구 욕해대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 글은 전체적으로 박정희의 만주시절을 상당부분 미화 (美化) 하고 있었다.
"애국지사들을 규합하고 반공.항일.광복의 지하공작에 골몰했다" 거나 "조선땅에 돌아가 건국사업에 봉사하지 못함을 한탄했다" 는 부분 등이다.
박정희와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동료들은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고 주장한다.
이 글은 박정희의 주도로 이뤄졌다기보다 이낙선씨등 朴대통령 핵심측근들의 과잉충성의 결과로 봐야 할 것같다.
이 때는 박정희가 민정이양과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기 불과 3개월전이란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당시는 박정희, 나아가 그를 둘러싼 세력들은 정치적으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섰던 사활적 상황이었다.
특히 박정희가 민정이양및 원대복귀를 선언했다가 다시 이를 번복, 민정참여를 결정한 뒤여서 미국은 쿠데타 세력의 원대복귀를 강력히 압박하고 있었다.
혁명세력은 박정희의 경력을 미화할 필요성이 높던 시기였다.
高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올해 75세의 高씨는 미국의 도박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작은 모텔을 운영하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현지 자택에서 취재팀과 만난 高씨는 "옛날얘기 해서 뭣 하겠느냐" 면서도 막상 얘기가 나오자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5.16직후 이낙선씨한테서 편지가 한번 왔더군요. 박정희가 혁명을 일으켜 최고권력자가 됐다구요. 그러면서 동기생으로서 朴의 군관학교 시절 얘기를 좀 써달라고 하더군요. 반갑기도 해 몇자 적어보낸 적이 있습니다.
" 그가 李씨에게 적어 보낸 분량은 종이 한장 정도의 '메모' 에 불과했다.
이 메모 몇자가 원고지 40쪽 분량의 5회짜리 연재물로 둔갑한 셈이다.
계속되는 高씨의 증언. "나는 내 편지내용이 한국신문에 난 줄도 몰랐습니다. 처음부터 그런얘기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갔더니 만주군관학교 동기생 이재기 (李再起.작고)가 '신문에 난 네 글 잘 봤다' 고 그래요. '무슨 글?' 했더니 모 일간지에 내 글이 다섯번이나 실렸다고 하더군요.
그 길로 그를 앞세우고 신문사를 찾아갔지요. 가서 보니 사실이더군요. 순간 이낙선씨 생각이 났습니다. "
흥미있는 것은 5대 대통령 취임식때 정작 신세를 진 高씨는 빠지고 차이충량 (蔡崇樑) 이라는 친 (親) 朴 성향의 동기생이 대만에서 초청됐다는 점이다.
60년대 중반 대만에서 사업하던 高씨는 한국과 합작으로 사업을 해보려고 방한, 박정희측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면회는 거절당했고 청와대 비서진도 하나같이 외면했다.
高씨의 '명동사건' 은 바로 이런 속사정에서 비롯한 해프닝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만주경력 미화작업' 은 한껍질 벗겨졌다.

'독립운동가담' 조작
5.16 당시 육사생도들의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유도하고, 혁명군사정부에서 검찰부장을 지낸 박창암 (朴蒼岩.74. '自由' 발행인) 씨. 그가 '반혁명사건' 에 연루돼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나 의정부에서 개간을 하면서 쉬고 있을 무렵 한 불청객의 방문을 받았다.
자신을 독립운동가라고 소개한 이 인물의 이름은 박영만 (朴英晩.작고) .그는 대뜸 朴씨에게 "같이 朴대통령을 한번 도와보자" 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朴씨에게 "여운형 (呂運亨) 의 건국동맹 지하운동의 리더였던 박승환 (朴承煥.봉천6기.만군 항공장교 출신) 의 공적 (功績) 을 朴대통령의 것으로 만들고 싶으니 좀 도와달라" 고
부탁했다.
해방후 평양에서 사망한 박승환의 공적을 박정희 것으로 조작하는 일에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작업에는 박승환과 함께 활동했던 朴씨의 협조가 불가피했다.
朴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967년 세번째 찾아온 그를 朴씨는 미아리 인근 술집에서 만났다.
똑같은 요청에 참다못한 朴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술상을 뒤엎어 버리고는 그를 두들겨패 돌려 보냈다.
이런 제의를 받은 사람은 한 사람 더 있었다.
朴씨와 같이 건국동맹 군사부에서 참모장으로 활동했던 박준호 (朴俊浩.만군 공군중위 출신.작고) 였다.
박정희 경력미화작업의 전위대 역할을 했던 박영만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를 아는 광복군 출신들은 한마디로 그를 "사람같지 않은 사람" 이라고 말한다.
그는 독립운동 경력이 없는 사람도 돈만 주면 제마음대로 붓을 놀려 독립운동가로 둔갑시켰다고 한다.
김승곤 (金勝坤.82) 전광복회장은 언젠가 명동 넘버원 다방에 앉아 있다가 "선배님도 책 한권 내셔야죠" 라며 접근해온 그에게 "닭다리나 같이 뜯자고 한다면 몰라도 그런 얘기 하려거든 나타나지도 말라" 며 호통을 쳐 쫓아낸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67년 2월 박영만은 '광복군' 이라는 상.하 두권짜리 논픽션 소설을 출간했다.
상권은 광복군 3지대장 출신 백파 (白波) 김학규 (金學奎.작고) 를 주인공으로 한 것이고, 하권은 놀랍게도 박정희가 주인공이다.
하권의 골자는 박정희가 이미 해방전부터 광복군과 비밀리에 내통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 이 책에는 당시 박정희와 같이 만주군 장교로 있었던 신현준 (申鉉俊.82.봉천5기.해병중장 예편) 씨까지 가담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정작 申씨는 "해방전엔 광복군이 있는 줄도 몰랐다" 고 증언했다.

광복군 출신들 격렬 항의
이 책의 출간 경위에 대해 박창암씨는 "박정희 아부세력이 이 책 집필을 부탁했는지 여부는알 수 없지만 박정희와 박영만은 해방후부터 귀국할 때까지 광복군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알만한 사이" 라고 했다.
박정희는 일본패망후 만주에서 베이징 (北京) 으로 나와 귀국할 때까지 한때 광복군에 몸을 담은 적이 있었다.
金전회장은 "당시 박영만이 청와대에서 30만원을 받기로 하고 이 책을 썼다.
그러나 막상 책이 나온 후 朴대통령이 내용을 훑어보고는 '내가 어디 (일제시대의 진짜)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느냐' 며 노발대발했다.
그래서 돈 한푼 못받고 출판기념회도 못했다" 고 증언하고 있다.
金씨의 증언대로라면 박정희는 자신에 대한 근거없는 미화작업에 오히려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듯하다.
이를 미뤄 보면 高씨의 박정희 미화 연재물을 박정희 본인이 시켰다고 하기는 무리라고 볼수 있다.
이 책도 박영만이 돈을 노리고 자작 (自作) 했거나 측근들의 박정희에 대한 과잉충성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인지 이 책은 한동안 자취를 감춰 광복군 사회에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책이 돌연 세간에 화제가 된 것은 1990년 KBS에서 실록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 을 방영하면서부터였다.
작가 김교식 (金敎植.63) 씨는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극중에서 박정희가 해방전부터 광복군과 내통한 것으로 묘사했다. 방송이 나가자 광복군출신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박정희를 아주 '광복군 챔피언' 으로 만들어 놓았다" 는 것이다.
박정희의 만주행적은 아직도 상당수 베일에 가려져 있다.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자도 대부분 역사의 그늘 속에 사라졌고, 그를 깎아 내리려고 애쓰던 당시 정적 (政敵) 들도 미움을 거두고 있다.
민정참여를 노린 경력 '미화' 작업도 밝혀져야 하지만 박정희를 흠집내려는 근거없는 '격하'도 이제 바로잡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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