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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박정희 황태성 제물삼아 색깔시비 탈출

황태성 (黃泰成) 사건은 한때 간첩사건으로 발표됐던 북 (北) 의 밀사 (密使)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박정희 (朴正熙) 의 좌익경력에 연유한 특이한 사건으로 민정이양 (民政移讓) 을 앞두고 군부와 민간정치세력 사이에 사상논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북은 黃을 밀파해 박정희의 북에 대한 친향성을 떠보려 했고, 朴은 그의 인생을 걸고 단호하게 북과의 절연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이 사건은 냉전의 첨단지대 한반도에서 일어난 60년대의 각박한 정치환경을 설명해준다.
黃을 박정희장군과 만나게 내려 보내면서 북한노동당은 둘의 지난 인연에 비춰 黃이 설사 잘못돼더라도 무사히 돌아오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黃은 朴을 면담도 못한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먼저 사건의 대강을 간추려보자. 61년 9월1일 휴전선을 넘어 서울에 잠입한 黃은 중앙대강사로 있던 김민하 (金玟河.63.현 교총회장) 를 찾았다.
고향 후배 (경북 상주) 라는 인연뿐 첫 대면이었지만 그를 통해 6.25때 헤어진 조카딸도 만났으며 박정희나 김종필 (金鍾泌)에게 다리를 놓아줄 것을 부탁했다.
黃은 金에게 "나하고 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남북 양쪽에서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을 때 통일문제를 협의케 해보자고 해서 내려온 것" 이라고 털어놓았다 黃의 조카사위로 사형 후 시신을 직접 확인.인수했던 권상릉 (權相凌.63.조선화랑사장) 의 증언은 색다르다.
"黃은 朴의장을 만나 상호비방 중지, 남북 양체제 인정, 남북 무역대표부 설치등을 협의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어요. " 金은 朴의장의 대구사범 동기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을 맡고 있던 왕학수 (王學洙.작고.당시 고려대 교수) 를 만나 黃의 얘기를 전했다.
王교수는 金에겐 대구사범 선배이자 후견인이기도 했다.
王교수도 면담을 주선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黃은 두번째 통로로 고인이 된 옛친구 박상희 (朴相熙) 의 미망인 趙여사를 택했다.
박정희의 형수이자 김종필의 장모인 趙여사에게 그는 간곡한 편지를 써 보냈다.
반응은 며칠만에 엉뚱하게 왔다.
"中情에 잡혀 JP 만나" 10월20일 黃은 들이닥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연행돼 반도호텔 (현롯데호텔 자리)에서 조사받았다.
그는 밀사임을 밝히면서 朴의장이나 김종필 아니고는 말할 수 없다고 버텼다.
黃이 金을 만났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러나 중정은 金과 닮은 요원을 내세워 진술을 받아냈다고 한다.
어쨌든 黃은 金을 만나 朴의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녹음했다고 술회했다.
서대문구치소에서 같은 수감자로 黃을 만났던 김중종 (金中鍾.71) 의 후일담. "黃은 반도호텔 8층 객실에서 김종필과 단 둘이 대좌했다고 말했어요. 金이 녹음기를 내밀며 '朴의장이 직접 오시기가 곤란해 제가 대신 왔습니다.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하시면 朴의장에게 전달하겠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黃은 '요즘 북의 방송에서 朴의장 비난을 안하고 있잖느냐. 민족의 번영을 위해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대치상태를 거두고 평화통일 하자' 는 요지의 얘기를 했다고 합디다. "
녹음은 마지막 대화였다.
黃은 62년 11월 간첩죄로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黃은 상고했다.
대법원은 간첩죄란 법적용이 잘못됐다해서 파기환송했다.
검찰은 불법 월경죄 (越境罪) 로 바꿨고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사형을 확정했다.
黃은 46년 대구 10월폭동의 배후로 지목돼 수배되자 월북한 후 북한 정권에서 무역성 부상(차관에 해당) 도 지낸 인물이다.
그가 朴은 결코 그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근거는 두사람간의 오랜 인연에 연유했다.
黃은 김천에서, 朴의 친형 박상희는 구미에서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엔 남로당 (南勞黨) 을 함께 했다.
둘은 친구고 동지였다.
黃은 김민하에게 朴의 소년시절부터 지켜보며 지도도 했다고 했다.
다음은 김민하의 증언. "朴은 여간 똑똑한 아이가 아니었지. 가난한 집안형편이었지만 그의 향학열은 대단했다네. 대구사범 시절 고민에 싸이기만 하면 나를 찾아왔었지. '선생님 내가 뭘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거야.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무엇을 하든 우리한테도 언제고 때가 올거다' 라고 조언했지. 그가 만주군관학교를 지원하게 됐던것도 내 조언의 힘이 컸던 걸세. " 이런 인연에 의지했던 黃의 계산은 빗나갔다.
朴은 왜 면담도 거부하고 사건을 서둘러 묻으려했을까. 군정의 색깔에 대해 의심하는 국내외의 눈길이 그 배경이었던 것같다.
미국은 쿠데타 주역들의 좌경화에 대한 우려를 재빨리 거둔듯 했다.
미국 CIA는 쿠데타 3일 후인 18일 "朴은 48년 이후는 북한공산주의자들과 연루됐거나 한국의 좌익세력과 연계됐다는 사실이 전혀 알려진 바 없다" 는 보고서를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올렸다.
그러나 의혹은 계속 제기됐다.
6월 중순 허정 (許政) 과도내각 때 육참총장을 지낸 예비역중장 최경록 (崔慶祿) 은 미 대사관을 찾아가 "朴소장은 확실치 않으나 쿠데타군 핵심에 적어도 7~8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 고 제보했다.
22일 미국 국가안보회의 한국팀회의가 이 문제를 논의한 뒤 '가능성 희박' 이라는 판정을 했다.
그러나 버거 주한 (駐韓) 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낸 7월15일자 전문은 여전한 경보 (警報) 였다.
그 일부. 美선 여전히 軍政 의심 "朴소장과 김종필중령을 비롯한 몇몇 혐의자에 대한 공산주의자 여부는 평가가 끝났지만 쿠데타의 신속함과 치밀한 계획성, 소련.북한등의 반응에 비춰보면 쿠데타군 내부에 공산주의자가 잠복해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
이렇듯 미국과 국내 일부의 의심의 눈길은 군사정권을 내내 압박했다.
이런 압박이 黃의 극비처리를 재촉했으리라는 건 짐작이 간다.
그러나 사건은 묻히지 않고 朴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63년 9월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선거 유세가 시작되자 민주당정권 시절의 대통령이던 윤보선 (尹潽善) 후보는 박정희후보의 좌익경력을 들추는 사상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잇따라 9월15일 민간 정당은 공명선거 투쟁위원회 집회를 열면서 집회장인 서울 교동초등학교 교정에 "간첩 황태성이 공화당 사전조직 요원의 밀봉교육을 담당했다" 며 공화당을 좌경집단으로 모는 삐라를 뿌렸다.
黃사건이 대통령선거의 쟁점으로 등장한 것이다.
군정당국은 이 사건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9월28일 김형욱 (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은 "黃은 반미 (反美) 운동을 지령받고 남하해 고위층과 접촉하려다 실패한 자" 라며 "간첩 黃이 朴의장과 만났다거나 친면 (親面) 이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 라고 해명했다.
朴후보도 10월10일 유세를 위해 안동으로 가던 열차안에서 계속되는 민간후보의 공세에 대해 해명했다.
"일제 때부터 황태성은 형과 친구였다.
해방 후에 보니 黃은 빨갱이였고 그가 이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5.16이 나던 해 9월께 김종필이 黃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간첩으로 남하해온 것을 체포했다
고 보고해 왔다. " 직접 해명도 쟁점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다행스런 것은 여론의 무반응이었다.
곤란한 것은 국민여론이 아니라 黃을 넘겨달라는 미국의 강력한 요구였다.
결국 당국은 黃을 2주간 미측수사관에게 인계했다.
63년 12월 김형욱정보부장은 사형이 확정된 黃의 사형집행 승인서류를 내밀었다.
당시 黃은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 심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朴의장은 "이 사람은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인해야 하나" 라며 망설였다.
金은 강한 어조로 "각하, 우리가 미국과 야당에 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사형을 집행해야 합니다" 라며 결단을 재촉했다.
잠시 침묵하던 朴의장은 체념한듯 그 서류에 사인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12월14일 토요일 오전11시20분. 黃은 인천 근교의 한 육군부대안에서 총살형이 집행됐고 이례적으로 정부는 형집행을 발표했다.
그런데도 야당은 황태성의 오키나와 (沖繩) 생존설을 제기해 이듬해인 64년 정치쟁점으로 되살리고 끝내 국정감사로까지 몰아갔다.
감사에선 문서.사진외에 입회한 군목 (軍牧) 과 기자의 증언까지 듣고도 미심쩍은 점이 있다는 소수의견을 남겼다.
황태성사건은 본질에서 벗어난 야당의 정치공세를 포함해 가장 한국적으로 처리된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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