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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첫결혼 실패가 '군인의길' 재촉

살을 에는 늦겨울 바람이 문경 (聞慶) 골짜기를 휘몰아치던 1940년 2월 중순 어느 날. 문경 보통학교 바로 옆 버스정류장 자리에선 만주 (滿洲) 로 군인 (軍人)가는 한 젊은이를 위한 환송회가 열렸다.
행사의 주인공은 바로 직전까지 이 학교 교사로 있던 박정희 (朴正熙) 였다.
동료교사와 학생.주민등 10여명은 길 양옆으로 도열해 만주로 떠나는 朴교사를 환송했다.
朴교사는 환송나온 동료교사들에게 "전사 (戰死) 소식을 접하면 향 (香) 한 대나 피워 주게"라며 짧고도 비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이별을 아쉬워하며 훌쩍이는 제자들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섭섭해 하지 말아라. 긴 칼 차고 대장이 돼 돌아오겠다" 고 위로했다.
이로부터 한달뒤 발신지가 '만주 신징 (新京) 육군군관학교' 로 된 편지가 제자들에게 날아왔다.

“大將되어 돌아오겠다”
박정희가 안정된 교사직을 팽개치고 만주로 떠난 원인은 여러가지다.
그중 하나는 집안사정 때문이었다.
대구사범 4년때 (1935년) 교칙을 어기고 비밀결혼을 한 그는 교사 부임당시 이미 결혼 3년째를 맞고 있었다.
부임하던 해 가을엔 첫딸 재옥 (在玉.60.韓丙起 전유엔대사 부인) 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첫째 부인 김호남 (金浩南.작고) 씨와 딸을 구미 본가에 놔둔 채 문경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
신혼생활은 결혼 직후 한달이 전부였다.
문제는 두사람이 떨어져 산데 있었던게 아니라 朴교사의 마음이 멀어졌다는데 있었다.
방학을 맞아서도 朴교사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않고 하숙방에서 뒹굴며 지냈다.
그와 함께 하숙했던 허동식 (許東植) 씨는 "방학해도 집에 가지 않았고 평소 집안얘기를 잘하지도 않아 결혼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 고 증언했다.
동료교사들도 물론 눈치채지 못했다.
이 때문에 '가짜 총각선생님' 朴교사와 동네 처녀들 사이엔 혼담 (婚談) 도 더러 오갔다.
당시 이 학교엔 그와 한자이름까지 같은 여교사가 있었다.
그녀는 朴교사에게 연모의 정을 보였으나 朴교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못이룬 사랑이 병이 됐는지, 여교사 박정희는 마침내 실성해 동네아이들의 놀림감이 됐다.
朴교사가 자신의 결혼사실을 감춘 이유는 아내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불만은 그가 만주로 간 이후에도 해소되지 않았다.
교사시절 그가 묵었던 하숙집 여주인에게 임창발 (林昌發) 이란 아들이 있었다.
그는 朴교사 보다 한살 아래로 그시절 두사람은 친구로 지냈다.
문경에서 취재팀과 만난 林씨 (79) 의 증언. "朴선생은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방학
때면 우리집에 와 머물다가 구미 본가엔 들르지도 않고 만주로 돌아갔다.
朴선생과 부인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했다. "

첫부인 한글 겨우 깨쳐
朴교사가 아내와 정이 없었던 배경을 두고 김재학 (金載學.71.朴대통령 생가보존회장) 씨는 "첫 부인은 키도 크고 미인이었으나 겨우 한글을 깨우친 정도여서 두분 사이에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던 것같다" 고 말했다.
정을 안준 쪽은 박정희였다.
피붙이 형제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바로 위 누님 박재희 (朴在熙.작고) 씨도 생전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동생은 왜 그런지 (재옥이 어머니에게) 정이 들지 않는다고 가까이하려들지 않았어요. 문경에도 혼자 가 있었고, 간혹 고향에 다니러 와도 따로 자곤 했습니다. "
그러나 이 정도 이유론 朴교사의 만주행이 설명되지 않는다.
억지결혼이었지만 그래도 부친의 뜻을 외면하지 못하고 결혼했던 그였다.
이 의문에 대해 그와 지근거리에 있었던 두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Q씨의 증언. "언젠가 朴대통령과 단 둘이 술자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만주얘기를 한동안 하던 그가 갑자기 첫째 부인 얘기를 꺼냈지요. '내가 없는 사이에… (생략)' 하시더니 말문을 닫더군요. 그 얘기를 하는 동안 朴대통령의 표정은 보기에도 안타까울만큼 일그러졌습니다.
그때 朴대통령이 한 얘기는 듣기 민망한 내용이었습니다. "
또다른 증언자 Z씨의 증언도 비슷한 내용이다.
두 증언자는 朴대통령의 측근이자 술친구였다.
이 사건이 朴교사가 만주행을 결심한 직접적 계기였다고 이들은 확신했다.
박정희의 만주행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한몫했다.
1939년 당시 만주는 폭력과 무질서가 난무한 신개척지였다.
반면 일본인과의 차별대우로 야망을 좌절당한 조선청년들에게 이런 무법지대 만주는 오히려 '희망의 땅' 이었다.
출세욕에 불타는 군인과 지식인, 일확천금을 노린 모략가들이 이 기회의 땅을 놓칠리 없었다.
그당시 만주는 '동양의 서부 (西部)' 였다.
일본 조치 (上智) 대 졸업후 만주고등고시에 합격, 안둥성 (安東省) 미산 (密山)에서 관리로 근무했던 원로경제학자 조기준 (趙璣濬.79.고려대 명예교수) 씨는 "조선에선 숨이 막혀 살수 없었다.
당시 만주행은 마치 해방후의 미국행과 마찬가지로 조선청년들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고 회고했다.
마찬가지로 만주고등고시 출신으로 만주국 관리를 지낸 백상건 (白尙健.78.전 중앙선관위상임위원) 씨도 "불경기 탓에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돼 면서기 되기도 어려웠다.
이들에게 만주는 유일한 대안이자 신천지 (新天地) 였다" 고 했다.

軍國주의 최첨병으로
특히 박정희와 같은 교사자격증 소지자들은 너나없이 만주행을 꿈꿨다.
朴대통령의 사범학교 동기생 이득우 (李得雨.82.경남창원시 거주) 씨는 "만주에선 교사들이 민족차별 없이 최고대우를 받는다는 소문이 돌아 만주는 조선인 교사들의 선망의 땅이었다"고 증언한다.
교사시절 일본인과의 마찰, 불행한 결혼생활, 그리고 시대적 분위기와 만주의 유혹. 그러나 이런 주변상황들은 교사 박정희의 만주행을 설명하는 외형적 요인이긴 하지만 군인의 길을 선택한데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박정희의 내면엔 그 자신이 밝힌 대로 '긴 칼 찬 군인' 이 되려는 욕구로 가득 차 있었던 것같다.
그는 태생적으로 군인이었다.
부친이 무반 (武班) 출신인데다 형제들도 모두 무골 (武骨) 이었다.
그 역시 단단하고 다부진 기골의 소유자였다.
그가 교사가 된 것은 순전히 가난 때문이었다.
당시 가난한 집안의 머리좋은 자식이 보통학교를 나와 갈 곳은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사범학교 뿐이었다.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만주군관학교 수석이나 일본육사 3등이란 졸업성적은 그의 두뇌가 비상함을 보여준다.
산수문제를 풀고 풍금치는 법을 배우던 사범학교 교과는 그의 욕구와 갈증을 채우기엔 크게 미흡했다.
사범학교 시절의 그는 유독 교련과 군사훈련 과목을 좋아해 교련시간에 항상 시범 조교 (助敎) 를 했던 것으로 동기생들은 기억하고 있다.
'왜놈 보기 싫다' 며 그가 찾아간 곳은 광복군이 아니라 뜻밖에도 일본 군국주의의 최첨병 역할을 맡던 만주군대였다.
박정희에게 만주행이 없었더라면 대통령 박정희도 없었을지 모른다.
5.16의 주역으로서 근대화와 군사독재의 명암을 우리 현대사에 남겼던 풍운아 박정희의 삶은 만주행으로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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