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으로 이동

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7,47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0.광복군 참여 경력날조자에 대노

한해가 저물던 1967년 12월 어느날 저녁. 서울의 중심가 명동거리에서 한 이방인이 당시 최고권력자 박정희 (朴正熙) 의 이름을 들먹이며 일본어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그가 한 골목길 모퉁이를 지날 무렵 경찰 두명이 나타나 그의 양팔을 낚아챘다.
대통령의 이름을 입에 담는 자체로 곤욕을 치르던 시절이었다.
그가 끌려간 곳은 인근 명동파출소. 이 외국인은 서투른 한국말로 다짜고짜 "나는 박정희의 친구다. 박정희를 불러오기 전에는 할 얘기가 없다" 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난감해진 파출소측은 자신들이 처리할 사안이 아님을 직감하고는 급히 모처로 전화를 걸었다.
두어시간 지난 후 한 인사가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국세청장 이낙선 (李洛善.전상공부장관.작고) 씨였다.
李씨는 5.16 초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비서관을 지내면서 朴의장의 신변자료를 챙긴 인물이었다.
李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니 高선생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
"어찌 되다니요. 당신들이 나를 제멋대로 이용해 먹고 이제와서는 나를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 겁니까. "

"제멋대로 이용해 먹고…"
李청장은 이 이방인을 파출소에서 데리고 나와 반도호텔에 방을 잡아주고는 며칠 뒤 대만행 비행기에 태워 떼밀다시피해 보내 버렸다.
1962년 11월 한 유력 중앙지에 '16년전의 박정희 학우 (學友)' 라는 제목의 글이 11일자부터 5회 연속으로 게재된 적이 있다.
'특별기고' 형식의 이 글은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중국인 동기생 가오칭인 (高慶印) 의 명의로 돼있다.
명동에서 술에 취해 박정희를 마구 욕해대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 글은 전체적으로 박정희의 만주시절을 상당부분 미화 (美化) 하고 있었다.
"애국지사들을 규합하고 반공.항일.광복의 지하공작에 골몰했다" 거나 "조선땅에 돌아가 건국사업에 봉사하지 못함을 한탄했다" 는 부분 등이다.
박정희와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동료들은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고 주장한다.
이 글은 박정희의 주도로 이뤄졌다기보다 이낙선씨등 朴대통령 핵심측근들의 과잉충성의 결과로 봐야 할 것같다.
이 때는 박정희가 민정이양과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기 불과 3개월전이란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당시는 박정희, 나아가 그를 둘러싼 세력들은 정치적으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섰던 사활적 상황이었다.
특히 박정희가 민정이양및 원대복귀를 선언했다가 다시 이를 번복, 민정참여를 결정한 뒤여서 미국은 쿠데타 세력의 원대복귀를 강력히 압박하고 있었다.
혁명세력은 박정희의 경력을 미화할 필요성이 높던 시기였다.
高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올해 75세의 高씨는 미국의 도박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작은 모텔을 운영하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현지 자택에서 취재팀과 만난 高씨는 "옛날얘기 해서 뭣 하겠느냐" 면서도 막상 얘기가 나오자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5.16직후 이낙선씨한테서 편지가 한번 왔더군요. 박정희가 혁명을 일으켜 최고권력자가 됐다구요. 그러면서 동기생으로서 朴의 군관학교 시절 얘기를 좀 써달라고 하더군요. 반갑기도 해 몇자 적어보낸 적이 있습니다.
" 그가 李씨에게 적어 보낸 분량은 종이 한장 정도의 '메모' 에 불과했다.
이 메모 몇자가 원고지 40쪽 분량의 5회짜리 연재물로 둔갑한 셈이다.
계속되는 高씨의 증언. "나는 내 편지내용이 한국신문에 난 줄도 몰랐습니다. 처음부터 그런얘기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갔더니 만주군관학교 동기생 이재기 (李再起.작고)가 '신문에 난 네 글 잘 봤다' 고 그래요. '무슨 글?' 했더니 모 일간지에 내 글이 다섯번이나 실렸다고 하더군요.
그 길로 그를 앞세우고 신문사를 찾아갔지요. 가서 보니 사실이더군요. 순간 이낙선씨 생각이 났습니다. "
흥미있는 것은 5대 대통령 취임식때 정작 신세를 진 高씨는 빠지고 차이충량 (蔡崇樑) 이라는 친 (親) 朴 성향의 동기생이 대만에서 초청됐다는 점이다.
60년대 중반 대만에서 사업하던 高씨는 한국과 합작으로 사업을 해보려고 방한, 박정희측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면회는 거절당했고 청와대 비서진도 하나같이 외면했다.
高씨의 '명동사건' 은 바로 이런 속사정에서 비롯한 해프닝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만주경력 미화작업' 은 한껍질 벗겨졌다.

'독립운동가담' 조작
5.16 당시 육사생도들의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유도하고, 혁명군사정부에서 검찰부장을 지낸 박창암 (朴蒼岩.74. '自由' 발행인) 씨. 그가 '반혁명사건' 에 연루돼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나 의정부에서 개간을 하면서 쉬고 있을 무렵 한 불청객의 방문을 받았다.
자신을 독립운동가라고 소개한 이 인물의 이름은 박영만 (朴英晩.작고) .그는 대뜸 朴씨에게 "같이 朴대통령을 한번 도와보자" 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朴씨에게 "여운형 (呂運亨) 의 건국동맹 지하운동의 리더였던 박승환 (朴承煥.봉천6기.만군 항공장교 출신) 의 공적 (功績) 을 朴대통령의 것으로 만들고 싶으니 좀 도와달라" 고
부탁했다.
해방후 평양에서 사망한 박승환의 공적을 박정희 것으로 조작하는 일에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작업에는 박승환과 함께 활동했던 朴씨의 협조가 불가피했다.
朴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967년 세번째 찾아온 그를 朴씨는 미아리 인근 술집에서 만났다.
똑같은 요청에 참다못한 朴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술상을 뒤엎어 버리고는 그를 두들겨패 돌려 보냈다.
이런 제의를 받은 사람은 한 사람 더 있었다.
朴씨와 같이 건국동맹 군사부에서 참모장으로 활동했던 박준호 (朴俊浩.만군 공군중위 출신.작고) 였다.
박정희 경력미화작업의 전위대 역할을 했던 박영만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를 아는 광복군 출신들은 한마디로 그를 "사람같지 않은 사람" 이라고 말한다.
그는 독립운동 경력이 없는 사람도 돈만 주면 제마음대로 붓을 놀려 독립운동가로 둔갑시켰다고 한다.
김승곤 (金勝坤.82) 전광복회장은 언젠가 명동 넘버원 다방에 앉아 있다가 "선배님도 책 한권 내셔야죠" 라며 접근해온 그에게 "닭다리나 같이 뜯자고 한다면 몰라도 그런 얘기 하려거든 나타나지도 말라" 며 호통을 쳐 쫓아낸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67년 2월 박영만은 '광복군' 이라는 상.하 두권짜리 논픽션 소설을 출간했다.
상권은 광복군 3지대장 출신 백파 (白波) 김학규 (金學奎.작고) 를 주인공으로 한 것이고, 하권은 놀랍게도 박정희가 주인공이다.
하권의 골자는 박정희가 이미 해방전부터 광복군과 비밀리에 내통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 이 책에는 당시 박정희와 같이 만주군 장교로 있었던 신현준 (申鉉俊.82.봉천5기.해병중장 예편) 씨까지 가담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정작 申씨는 "해방전엔 광복군이 있는 줄도 몰랐다" 고 증언했다.

광복군 출신들 격렬 항의
이 책의 출간 경위에 대해 박창암씨는 "박정희 아부세력이 이 책 집필을 부탁했는지 여부는알 수 없지만 박정희와 박영만은 해방후부터 귀국할 때까지 광복군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알만한 사이" 라고 했다.
박정희는 일본패망후 만주에서 베이징 (北京) 으로 나와 귀국할 때까지 한때 광복군에 몸을 담은 적이 있었다.
金전회장은 "당시 박영만이 청와대에서 30만원을 받기로 하고 이 책을 썼다.
그러나 막상 책이 나온 후 朴대통령이 내용을 훑어보고는 '내가 어디 (일제시대의 진짜)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느냐' 며 노발대발했다.
그래서 돈 한푼 못받고 출판기념회도 못했다" 고 증언하고 있다.
金씨의 증언대로라면 박정희는 자신에 대한 근거없는 미화작업에 오히려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듯하다.
이를 미뤄 보면 高씨의 박정희 미화 연재물을 박정희 본인이 시켰다고 하기는 무리라고 볼수 있다.
이 책도 박영만이 돈을 노리고 자작 (自作) 했거나 측근들의 박정희에 대한 과잉충성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인지 이 책은 한동안 자취를 감춰 광복군 사회에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책이 돌연 세간에 화제가 된 것은 1990년 KBS에서 실록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 을 방영하면서부터였다.
작가 김교식 (金敎植.63) 씨는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극중에서 박정희가 해방전부터 광복군과 내통한 것으로 묘사했다. 방송이 나가자 광복군출신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박정희를 아주 '광복군 챔피언' 으로 만들어 놓았다" 는 것이다.
박정희의 만주행적은 아직도 상당수 베일에 가려져 있다.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자도 대부분 역사의 그늘 속에 사라졌고, 그를 깎아 내리려고 애쓰던 당시 정적 (政敵) 들도 미움을 거두고 있다.
민정참여를 노린 경력 '미화' 작업도 밝혀져야 하지만 박정희를 흠집내려는 근거없는 '격하'도 이제 바로잡아져야 한다.

  1. No Image notice

    회원 삭제 대상자

    회원정보 정리작업(삭제) 안내 공지에 따라 아래 ID회원은 2012.12.31 삭제됩니다. 1차 회원 삭제 대상자 ID (333명) a0708 ella2009 krosa77 sewook2100 a0de39052407 elninotw ksjhp17 sgc2001 a0qqpdxadd5422 fever372 kth719 shee1225 a1953apo2702 ffchc1...
    Date2012.12.26 Bymahru Views16,800
    read more
  2. No Image notice

    회원정보 정리작업(삭제) 안내 공지

    회원 가입후 지속적으로 사용을 안하고 있는 회원정보의 정리작업이 있습니다. 1차적으로 1년 이상 로그인 기록이 없는 회원의 정보를 불가피하게 임의로 2012.12.01부터 2012.12.31까지 삭제할 예정입니다. 불필요한 데이터보관을 방지 및 운영, 유지 관리를 ...
    Date2012.11.02 Bymahru Views13,095
    read more
  3.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17.수출업자 특별대우...밀수에 걸려도

    17.수출업자 특별대우...밀수에 걸려도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1969년 1월20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제1차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했다. 한번 더 수출전선에 박차를 가할 필요성이 있던 시기였다. 정부기록보존소에 있는 회의록 내용. "68년도 지역별 수...
    Date2008.07.30 Bymahru Views7,448
    Read More
  4.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16.좌초한 경재개발 수출로 돌파구

    16.좌초한 경재개발 수출로 돌파구 늦여름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64년 8월 어느날 오후 부산시범일동의 신발 생산업체 국제고무 사장실. 공장 한 구석에 칸막이를 세워 만든 공간은 요란한 기계소리와 한증막을 방불케 하는 무더위로 가득찼다. 허름한 ...
    Date2008.07.30 Bymahru Views7,346
    Read More
  5.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15.맨손의 재건 두달만에 청사진 완성

    15.맨손의 재건 두달만에 청사진 완성 "나는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을 애국자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두가지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첫째, 민주주의라는게 좋긴 한데 미국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도입했어요. 우리 실정에 맞지 않습니다. 둘째, 그 ...
    Date2008.07.12 Bymahru Views7,639
    Read More
  6.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14.발전 모델은 일본 추진은 군대식

    14.발전 모델은 일본 추진은 군대식 대통령 박정희 (朴正熙)에게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의 경제치적에 매료돼 있다. 박정희의 대통령 재임시 보인 경제개발에 대한 열정과 목표달성을 위한 숨돌릴 틈 없는 밀어붙이기,치밀한 사후 점검등의 독특...
    Date2008.07.12 Bymahru Views7,644
    Read More
  7.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13.가난 추방은 천명 필생의 업 간주

    13.가난 추방은 천명 필생의 업 간주 민간인이면서 '5.16 혁명주체세력' 으로 통하는 김용태 (金龍泰.72.전의원) 씨는 박정희 (朴正熙) 전대통령의 오랜 술친구였다. 그는 김종필 (金鍾泌.JP) 자민련총재의 서울대 사대 동창이자 같은 충남 출신이며 6.25 당시...
    Date2008.07.12 Bymahru Views7,583
    Read More
  8.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12.5.16 도왔지만 끝내 토사구팽

    12.5.16 도왔지만 끝내 토사구팽 여순 (麗順) 사건 발생 직전인 1948년 여름 서울 안국동의 요릿집 아향 (雅香) .30대 전후 청년장교들이 모여 단합대회를 갖고 있었다. 방 가운데 길게 놓인 술상을 마주보고 앉은 이들은 모두 만주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술잔...
    Date2008.07.12 Bymahru Views7,461
    Read More
  9.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11.독립군 토벌 기회조차 없었다

    11.독립군 토벌 기회조차 없었다 박정희를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것은 친일및 좌익연루 시비다. 친일성 논쟁의 발단이 된 때가 바로 1940년 2월부터 46년 5월까지의 6년3개월이다. 이 시절 그는 광복군과 관련된 비밀 광복군이었는가, 아니면 ...
    Date2008.07.12 Bymahru Views7,442
    Read More
  10.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10.광복군 참여 경력날조자에 대노

    10.광복군 참여 경력날조자에 대노 한해가 저물던 1967년 12월 어느날 저녁. 서울의 중심가 명동거리에서 한 이방인이 당시 최고권력자 박정희 (朴正熙) 의 이름을 들먹이며 일본어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그가 한 골목길 모퉁이를 지...
    Date2008.07.12 Bymahru Views7,477
    Read More
  11.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9.첫결혼 실패가 '군인의길' 재촉

    9.첫결혼 실패가 '군인의길' 재촉 살을 에는 늦겨울 바람이 문경 (聞慶) 골짜기를 휘몰아치던 1940년 2월 중순 어느 날. 문경 보통학교 바로 옆 버스정류장 자리에선 만주 (滿洲) 로 군인 (軍人)가는 한 젊은이를 위한 환송회가 열렸다. 행사의 주인공은 바로 ...
    Date2008.07.12 Bymahru Views7,225
    Read More
  12.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8.동기 불분명한 군인으로의 변신

    8.동기 불분명한 군인으로의 변신 1942년 3월23일. 만주국 수도 신징 (新京) , 지금의 창춘 (長春) 교외 남강대 (南崗臺)에서는 만주군관학교 제2기 예과졸업식이 성대히 열리고 있었다. 만주국 황제 푸이 (溥儀)가 왜소한 체구에 까무잡잡한 얼굴의 졸업생도 ...
    Date2008.07.12 Bymahru Views7,350
    Read More
  13.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7.박정희 황태성 제물삼아 색깔시비 탈출

    7.박정희 황태성 제물삼아 색깔시비 탈출 황태성 (黃泰成) 사건은 한때 간첩사건으로 발표됐던 북 (北) 의 밀사 (密使)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박정희 (朴正熙) 의 좌익경력에 연유한 특이한 사건으로 민정이양 (民政移讓) 을 앞두고 군부와 민간정치세력 사이에...
    Date2008.07.12 Bymahru Views7,251
    Read More
  14.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6.북 5.16나자 "박정희 연구" 긴급회의

    6.북 5.16나자 "박정희 연구" 긴급회의 박정희 (朴正熙) 는 누구인가. 1961년 5월16일 새벽 서울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에서 던진 의문이다. 쿠데타 세력은 좌우 어느쪽인가, 친미 (親美) 적인가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갖...
    Date2008.07.12 Bymahru Views7,345
    Read More
  15.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5.이후락 북에서 놀림당하고 온것 같아

    5.이후락 북에서 놀림당하고 온것 같아 이후락 (李厚洛.중앙정보부장) 은 김일성 (金日成.북한 수상) 의 '겁주기 전략' 에 당한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에게 기어이 한 건 올리겠다는 개인적 정치야망이 표출된것인가. 72년 5월4일 0시15분 한...
    Date2008.07.12 Bymahru Views7,369
    Read More
  16.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4.김일성 이후락 불러 박정희 의중 타진

    4.김일성 이후락 불러 박정희 의중 타진 72년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마침내 냉각된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여는 결단을 내렸다. 4월26일 그동안 극비리에 진행된 북한과의 접촉 결과를 보고받고 이후락 (李厚洛) 정보부장에게 특수지역 출장에 관한 친필훈령...
    Date2008.07.12 Bymahru Views9,086
    Read More
  17.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3.김일성 박정희 속셈 읽고 선수

    3.김일성 박정희 속셈 읽고 선수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권좌에서 밀려나 주일 (駐日) 대사로 나가있던 이후락 (李厚洛) 을 70년 12월21일 중앙정보부장으로 불러들여 두가지 과제를 맡겼다. 첫째는 국내 정치체제의 대변혁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과 대화를 ...
    Date2008.07.12 Bymahru Views8,171
    Read More
  18.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2.경제개발 시간벌기 위한 북 발목잡기

    2.경제개발 시간벌기 위한 북 발목잡기 1970년 8월15일 광복 제25주년 경축행사가 열리고 있는 중앙청 앞 광장. 3만여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평화통일의 기반조성을 위한 접근방법에 관한 구상을 밝히겠다" 고 운을 뗀 뒤 이렇게 역...
    Date2008.07.12 Bymahru Views8,940
    Read More
  19.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1.북 중화학 우위 선전영화에 자존심 손상

    1.북 중화학 우위 선전영화에 자존심 손상 '10월 유신(維新)'이라는 대 정변을 몇 달 앞둔 72년 2월 하순 어느 날 오후 중앙정보부 회의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을 비롯한 내각, 청와대비서관, 공화당 간부 등 정부, 여당 관계자 30여명이 북한 선전용 산업영...
    Date2008.07.12 Bymahru Views7,716
    Read More
  20. No Image

    건축의 르네상스 제11장 전체 작품과 건물의 모형을 만들 때 하나에 그쳐서는 안된다.

    제11장 전체 작품과 건물의 모형을 만들 때 하나에 그쳐서는 안된다. 반대로 건물의 모든 주요한 부분을 보여 주어 실제 작업에 편의를 줄 수 있는 여러 모형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좋다. 나는 당신이 만들려 하는 전체 건물의 일반모형을 만드는 것이 좋다고...
    Date2008.01.09 Bymahru Views7,803
    Read More
  21. No Image

    건축의 르네상스 제10장 건축가는 자신의 의도를 평면도나 입면도 및 모형을 통해 건물 전체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10장 건축가는 자신의 의도를 평면도나 입면도 및 모형을 통해 건물 전체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나는 왕이나 왕자, 그리고 대제후의 건물뿐 아니라 평민이나 하층민의 건물에서 여러 오류와 과오를 발견했다. 꼼꼼히 계획을 세우지 않고 소홀...
    Date2008.01.09 Bymahru Views8,178
    Read More
  22. No Image

    건축의 르네상스 제9장 중앙집중식 건축양식과 원형의 가치

    제9장 중앙집중식 건축양식과 원형의 가치 사원은 일반적으로 원형이거나 사각형이며 여섯 개에서 여덟 개, 경우에 따라서는 더 많은 각을 가지게 된다. 각은 동심원의 테두리에 자리잡게 된다. 여기에 십자형을 비롯하여 건축가들이 자신의 도면에 적용하고...
    Date2008.01.09 Bymahru Views7,927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