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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연인...아내...그리고
청와대 안주인의 역할과 이미지는 대통령의 국정수행능력에 버금가는 국민들의 관심사다.
이번 대선에서도 많은 유권자들, 특히 여성 유권자의 90%가 후보 부인을 보고 누구에게 표를 찍을 것인지 결정하겠다는 여론조사가 있었다.
육영수 (陸英修) 여사는 특유의 한국적인 이미지와 대통령 부인으로서 잡음 없는 내조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바람직한 대통령 부인상 (像) 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에게 시중의 소문을 전해주고 충고를 아끼지 않은 '청와대 내의 야당' 이었으며 朴대통령의 그늘 속에서 소리없이 사회봉사활동을 한 조용한 내조자였다.
대통령 박정희에게 저항하던 인사들조차 陸여사의 인품에 대해서는 고개를 숙였다. 26세의 처녀 육영수는 처음 '멀대같이 키만 큰' 여자로 박정희에게 다가왔다. 결혼생활중에는 '마음의 어머니' 였으며 陸여사 서거 이후에는 '영원한 연인' 이었다.
옥천 처녀 육영수가 선산 출신 박정희를 만난 것은 1950년 8월 피난지 부산에서였다. 중매자는 陸여사의 이종육촌 오빠 송재천 (宋在千.78) 씨. 宋씨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후배이기도하다.

맞선 두달 뒤인 10월 대구에서 약혼식, 다시 두달 뒤인 12월12일 대구 계산성당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반대한 陸여사의 부친은 끝내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아 이날 신부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은사인 김영기 선생이 인도했다.
박정희 34세, 육영수 26세. 陸여사는 1925년 충북 옥천에서 1남3녀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부유한 만석꾼 집안으로 당시로선 드문 승용차에다 농사용 트럭이 따로 있었다. 부친이 취미로 제작한 16㎜ 필름으로 집안에서 영화를 볼 정도였다.

부친 육종관 (陸鍾寬.65년 작고) 씨는 본부인 (李慶齡.76년 작고) 외에 소실 7명, 자식만도 16명이나 됐다. 서울 배화여고 재학시절 陸여사는 한 소실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동창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창시절 陸여사는 늘 쓸쓸한 표정에 말수가 적었다고 한다. 전쟁중이라 신혼부부는 한동안 떨어져 지내야 했다. 박정희는 결혼 3일만에 신부를 남겨두고 전선으로 이동했다.
틈틈이 陸여사가 면회를 가기는 했지만 이같은 생활은 53년 7월 휴전 때까지 계속됐다. 53년 3월 박정희는 꿈에도 그리던 '별' 을 달았고 52년에는 맏딸 근혜가 태어나 집안엔 활기가 돌았다.
그러나 이듬해초 박정희는 6개월간 미국 포병학교로 교육을 떠났다. 귀국 직전 박정희의 일기 한토막. "…인천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을 영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근혜를 안고 '근혜 아빠 오셨네' 하고 웃으면서 나를 반겨 맞아줄 영수의 모습!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대는 내 마음의 어머니다. 셋방살이, 없는 살림, 좁은 울안에 우물 하나 없이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원이요,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다.
" (54년 6월14일) 박정희의 아내 사랑은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 이상이다. 그 사랑은 74년 陸여사 서거후 진면목을 드러냈다. 아내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이 무렵 박정희는 거의 시인이 돼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면/그대와 함께 이 섬을 찾았노니/모든 시름 모든 피로 다 잊어버리고/우리 가족 오붓하게/마음껏 즐기던 행복의 보금자리/추억의 섬 저도 (猪島) /올해도 또 찾아왔건만/아, 어이된 일일까/그대만은 오지를 못하였으니/그대와 같이/맨발로 거닐던 저 백사장/시원한 저 백년 넘은 팽나무 그늘/낚시질하던 저 방파제 바위 위에/그대의 그림자만은 보이지 않으니…. " ( '저도의 추억' .75년 8월) 陸여사를 그리며 쓴 박정희의 시와 일기는 '독재자' 의 인간적 측면을 보여준다.
박정희는 아내 사랑을 글로만 표현한 것이 아니다. 외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아내의 초상화를 쓱쓱 그리기도 했고 지방순시중에도 불쑥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아내를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박정희식 아내 사랑법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대통령 부부에게만 쓰게 된 호칭이 있었다. '각하' 는 그전엔 장성들의 일반적인 호칭이었지만 점차 박정희 1인에게 국한된 것으로 바뀌었다.

영부인이란 호칭도 70년대 중반부터는 陸여사에게만 붙여 부를 수 있었다.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陸여사에 대한 호칭은 흔하디 흔한 '사모님' 이었다. 청와대생활 초기 동창생들은 '영수야' 하고 불렀으며 나중엔 '陸여사' '근혜 엄마' 로 돌려 부르긴 했지만 친한 동창생들과는 호칭은 물론 사생활까지 트고 지냈다. 60년대 후반 '경모 (敬母) 님 소동' 은 이런 과정에서 나온 해프닝이었다.
당시 한글학자 H씨가 청와대에서 陸여사를 '경모님' 이라고 부른 것이 신문에 짤막하게 보도된 적이 있다. 이를 본 모 변호사가 '陸여사는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기저귀 냄새를 풍겨야 제멋' 이라고 쓴 것. 이 글을 읽은 陸여사가 "하필 기저귀 냄새냐" 며 청와대 대변인에게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

나중에 이 얘기를 들은 朴대통령은 '그런 것은 신문에서 세게 때리시오' 하면서 출입기자들 앞에서 오히려 陸여사의 약을 올리기도 했다.
'영부인' 이란 호칭에 얽힌 일화 한 대목. 언젠가 陸여사가 가수 이미자씨의 레코드 판 한장을 산 것이 보도된 후 백화점에 들른 적이 있었다.
한 여직원이 "영부인님, 이것도 하나 사주세요" 하고 물건을 내놓자 대뜸 陸여사가 "싫어요.
근혜 엄마라고 하면 몰라도 영부인이라고 하니까 깎지도 못하잖아요" 라고 말해 주위 사람들을 웃긴 적이 있다.
매사에 너그럽고 인자했던 陸여사. 그러나 남편 때문에 속 썩기는 여염집 부녀자와 마찬가지였다.
56년 7월 박정희 준장이 5사단장을 마치고 진해 육군대학에 입교할 무렵의 얘기다.
陸여사가 남편을 따라 진해로 이사가는 것을 거부하고 나선 것. 떨어져 살아도 남편의 불미스런 얘기가 다 들리는 판에 한집에 같이 살면 그것을 어찌 보겠느냐는 것이었다.

주위의 설득으로 결국 진해로 떠밀려 가다시피 했다. 당시 육대 (陸大) 는 전반기 교육이 끝나면 시험을 봐 60점이 넘어야 후반기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는데 탈락하면 원대복귀는 물론 진급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시험이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술타령을 하다 시험을 망쳤다.
몸이 달아오른 사람은 오히려 陸여사였다. "어느날 퇴근해보니 陸여사가 집으로 수박을 사가지고 오셨더군요. 당시 저는 총장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교육생들의 시험관리와 채점을 맡고 있었는데 어디서 그 얘기를 들으셨던 모양입니다.
" (H씨 증언) 청와대행 이후 陸여사는 대통령부인에 걸맞게 자신을 갈고 다듬었다. 박정희의 군시절 陸여사를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몇년후 달라진 모습에 깜짝 놀라야 했다.


陸여사는 남편의 여자문제로 평생 속을 끓이면서 살아야 했다. 朴대통령과 술자리에서 자주 어울렸던 K.P.L씨등은 그래서 陸여사로부터 더러 야단을 맞았다.
"어떻게 대통령 호주머니에서 립스틱이 묻은 손수건이 나오느냐" 는등의 이야기였다. 술자리에서 흥이 나면 체면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옆사람에게 '형님' 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朴대통령은 종종 와이셔츠나 손수건에 립스틱을 묻혀 들어가기도 했다.
陸여사는 한 나라의 대통령인 남편의 그런 모습이 싫었다. 한번은 陸여사가 '현장' 을 덮친적도 있다. 70년대 초반 인기 절정의 모 여배우를 朴대통령이 청와대 인근 한 기업체 사장집에서 몰래 만난다는 정보를 들은 陸여사가 그 집을 찾아갔다.
방문 앞에서 "나예요, 문 열어요" 하고는 朴대통령과 맞부닥친 적도 있다. 체면 없기는 두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陸여사의 결혼생활 24년은 박정희를 향한 기다림과 인내의 세월이었다.
朴대통령의 말년 여성 편력은 陸여사란 '통제장치' 가 사라지면서 육욕 (肉慾) 의 탐닉으로 줄달음질한다. 중앙정보부와 청와대의 어떤 이는 탤런트와 배우, 모델과 가수중에서 박정희의 하룻밤 '수청' 들 대상을 찾아 대령하는 '채홍사 (採紅使)'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박정희시대의 공과 (功過) 를 따지고 오늘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취지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첫부인과의 불행한 결혼이후 여성을 향해 끊임없이 방황했던 박정희는 陸여사를 만나면서 안정을 되찾았고 그의 삶도 화려하게 꽃피었다. 陸여사가 74년 흉탄에 쓰러지면서 박정희도 절대권력의 부패 속에서 시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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