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박정희 신드롬 촉발 '핵개발'은 큰발굴
지난 7월10일부터 6개월 동안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 속에 연재돼온 '실록 박정희시대' 가 29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미처 못다한 얘기들을 취재기자 방담으로 엮는다. 편집자 - 박정희시대는 지금까지 숨쉬고 있는, 살아있는 오늘의 얘기입니다. 당사자들이 아직 살아있고 그들의 이해관계도 아직까지 얽혀있어 취재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요.
- 박정희 사후 18년이 흐르는 동안 상당수 증언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사실을 왜곡해 왔고 이것이 '사실 (史實)' 처럼 굳어져 있는 대목도 적지 않았습니다. 어떤 증언자는 당시 경제발전의 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고, 다른 사람들의 업적을 비하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여러 경로로 검증해 보면 사실이 아닌데도 말이죠.
- 당시의 주인공들중 일부는 이미 타계했고 생존자도 거의 70대 이상의 고령이었습니다. 증언을 채취하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끝까지 긴장을 풀 수 없었습니다.
- 철저한 검증을 통해 박정희시대를 오늘의 시점에서 자리매김하자는 것이 기획의도였죠.
취재과정에서 절실히 느낀 것이지만 한국 현대사의 주역들중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박정희만큼 논의가치를 지닌 인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역대 대통령중 '공과 (功過) 를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박정희'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 그의 경제개발에 대한 열정,치밀한 사후관리, 국가발전에 대한 비전과 추진력,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한 끝없는 학습태도 등은 감탄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한 전직 장관은 "박정희를 좋아하는 기자.국민 수가 또 늘어나게 됐다" 고 하더군요. 박정희를 연구하다 보면 모두 그의 매력에 빠진다는 거예요. 하기야 박정희대통령이 기용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지금까지 박정희를 못잊어 하더군요.
- 인간적 향기 때문이겠지요. 인터뷰 도중 눈물을 쏟는 증언자들이 숱했고 김두영 (金斗永)전청와대비서관은 "朴대통령을 모신 것은 가문의 영광" 이라고까지 말하더군요.
- 육사11기 선두주자였던 손영길 (孫永吉) 씨를 보세요. 육참총장감으로 촉망받다 '윤필용 사건' 때 버림받아 강제예편은 물론 옥고까지 치렀는데도 "그전까지 각하께서 잘 보살펴주신 것만 고맙게 간직하고 있다" 는 거예요.
- 한국을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은 정작 한국에서 박정희를 소홀히 다루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연구가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깊이 진행되고 있는 게 현실 아닙니까.
- 말이 나왔으니 얘깁니다만, 대통령에 관한 자료들이 사유물처럼 이사람 저사람에게 흩어져 있는가 하면 그걸 밑천으로 언론사와 흥정하려 드는 사람들까지 있었어요. 최근 대통령 사료관을 만들자는 얘기도 나오는데, 체계적 관리시스템이 절실합니다.
- 그런 악조건 속에서 풍문으로만 전해진 핵무기 개발의 실체 캐낸 건 큰 성과였죠. 핵개발 주역들의 면면, 핵폭탄 규모와 투하방식, 개발목표 연도, 예산규모 등을 증언과 도면.자료까지 발굴해 밝혀냈습니다.
- 당사자들은 증언은커녕 신분노출조차 극도로 꺼렸지요. 미 중앙정보국 (CIA)에 대한 그들의 공포는 납득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거듭 찾아갔다가 퇴짜를 맞고는 비상구로 잠입, 가까스로 면담에 성공한 경우도 있었죠. 천신만고끝에 얼굴을 마주 대했더니 증언 대신 증언거부 이유를 가득 적은 편지를 들이밀 때는 정말 허탈하더군요.
-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모씨 증언을 들을 때는 보안사 요원 등 군관계자 10여명이 입회하는 등 삼엄한 경계를 폈지요. 사안의 무게를 실감케 하더군요.
- 그러면서도 증언자들은 대부분 박정희 사후 핵프로젝트 중단을 못내 아쉬워해요. 미국 눈치 보느라 핵주권을 포기했다
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핵개발 문제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일 수 있다는 점을 실감했습니다.
- 지금까지 설 (說) 로만 전해지던 박정희의 좌익 연루문제를 당시 재판장 증언과 판결문.공문 등을 입수해 보도한 것도 큰 성과였지요.
- 박정희 예찬론자들은 만군시절.좌익연루.정치자금.여성관계 등 어두운 일면들을 들춰낼때는 "두번 죽일 참이냐" 고 야단이었죠. 업적을 평가할 때는 "정말 고맙다" 는 인사도 많이 들었습니다. - 이 시리즈에 대해 시비도 없지 않았습니다.
특히 진보를 내세우는 학계나 언론에서 "박정희를 일방적으로 미화하거나 찬양하지 말라" 고 윽박지를 때는 어이없더군요. 사실 취재진은 거의다 7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반독재투쟁에 가담하는 등 굳이 따지자면 반 (反) 박정희 정서를 갖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 매회 비판적 내용을 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박정희의 업적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었겠지요. 물론 우리의 비판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려는 애정있는 비판' 이었던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 학계에서는 '언론이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선도한다' 며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이 증언과 문건 등 기초자료를 모으고 학계는 역사적 평가를 맡는, 일종의 역할 분담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 못내 아쉬운 것은 이후락 (李厚洛) 씨의 증언 거부입니다. 대통령비서실장.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그가 건강악화.해외여행 등을 핑계로 끝내 면담조차 회피하더군요. 10여년전 그가 때가 되면 모든 걸 밝히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못밝히는 데는'사연' 이 있지 않겠습니까.
- 김형욱 (金炯旭) 전 중앙정보부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文모씨는 "할 얘기를 전부 녹음해 외국에 보관하고 있다. 내가 죽은 뒤 공개될 것" 이라며 손을 내저었는데 기대해 보죠.
- 참, 연재기간중 '박정희신드롬' 은 정말 대단했지요. - 역사속으로 사라진 박정희가 현실무대로 뚜벅뚜벅 걸어나온셈입니다. 책이 언제 나오느냐는 문의전화가 쇄도했습니다. 박정희기념관을 세우자는 단체만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경찰이 일부 단체에 대해서는 내사를 벌이기도 했어요.
- 따지고 보면 박정희 신드롬이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은 최초의 문민정부라고 자부하던 김영삼 (金泳三) 정권이 제공한 것이지요. 현정권의 실정 (失政) 이 죽은 박정희를 되살려놓은 셈입니다.
- 대선후보들 역시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말투.제스처에다 헤어스타일까지 흉내낸 후보도 있었고 아예 "역사는 다시 박정희의 공화당을 부릅니다" 라는 타이틀로 광고를 낸 후보까지 있었습니다.
- 그뿐입니까. 박정희시대 수난의 상징이었던 김대중 (金大中) 후보가 선거운동기간중 박정희 생가를 방문해 고개를 숙일 땐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지요.
- 각 후보진영의 유족모시기 쟁탈전은 어땠고요. 근혜씨는 결국 한나라당 선대위 고문직을 맡으며 정치시장에 뛰어들었지요.
-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총리, 미얀마 민주화의 기수 아웅산 수지 여사 등이 부친의 후광으로 정치판의 여걸로 성장했는데 박정희 추종자중에는 근혜씨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도 있습디다. 과연 그렇게 될지는 미지수지만요.
- 그런데 박정희 신드롬이 가져온 부작용은 분명히 있습니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지금 "박정희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는 주장이 나온다면 시대착오라고 해야겠지요. 그런 발상은 자칫 세계적 대공황의 소용돌이에서 출현한 독일의 히틀러같은 지도자를 만들어낼 소지도 있어요.
- 박정희시대에 경제개발이 이뤄졌다고 해서 국제통화기금 (IMF) 의 구제금융을 받는 이 시절에 박정희식 리더십이나 경제구상을 원용한다는 것도 시대착오지요.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시대에까지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 그런데 현 경제난의 원인 (遠因) 을 박정희식 개발드라이브의 부산물로 보는 견해도 있잖아요. 정경유착.부정부패.물신주의.관 주도형 경제운용 등은 그때부터 싹텄다는 거죠. 이 역시 지나친 비약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래요. 지금 경제난국을 박정희경제의 한계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견강부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부작용은 박정희 이후 시대를 맡은 사람들의 책임이 아닐까요.
- 한 외국학자는 "한국은 박정희에 의해 근대화를, 박정희반대자들에 의해 민주화를 이룰것" 이라고 했는데 김영삼정권에 이어 김대중 국민회의총재가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그 예언이 실현됐다고 할 수 있나요.
- 아무튼 중앙일보의 '실록 박정희 시대' 가 박정희에 대한 객관적 평가작업에 작은 초석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