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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장기집권의 마감
74년 8.15 기념식장에서 문세광 (文世光) 의 흉탄에 육영수 (陸英修) 여사가 숨진 사건을 본 이건개 (李健介.56.현 자민련의원) 당시 치안본부1부장은 "국운에 마 (魔)가 끼었다" 고 한탄했다.
陸여사 죽음은 '박정희 말기' 의 시작이었다. 陸여사 서거는 절대권력자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박정희의 흔들리는 마음은 陸여사 사후 1년이 지난75년 8월19일 대통령의 일기에 남아 있다.
'작년 8월19일, 나의 사랑하는 아내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유택으로 떠나보내고 마지막 작별을 하던 날이다. 벌써 1년이 갔구나. 정든 청와대를 마지막 떠나며 한마디 인사도 없이, 한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 그 며칠 뒤, 6.25 당시 박정희중령 집에 기식한 이래 朴대통령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봐온 김용태 (金龍泰.71) 의원은 달라진 대통령을 보았다.
포항제철로 가는 길에 대통령차에 동승했다. "가을이 다가와서 그런지 자꾸만 옛일들이 머리에 떠오르는구먼. "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대통령은 옛 얘기를 했다.
그러다가 던진 한마디. "자네나 나나 정치 부적격자 (不適格者) 인지 몰라. 자네는 경성사범, 나는 대구사범 (경북사대 전신) 출신이니까. 훈장노릇이나 할 것을…. 80년에는 나도 대구로 내려가 훈장노릇이나 해야겠어. " 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朴대통령은 수시로 '그만둬야겠다' 는 얘기를 했다.
79년에는 신직수 (申稙秀.70) 전법무장관을 법률특보로 임명해 유신헌법 개정을 검토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0.26이 일어나기까지 구체적인 은퇴 움직임은 없었다. 흔들리는 정신에 육체적인 피로도 겹쳤다.
호주호색 (好酒好色) 하는 대통령을 견제했던 유일한 브레이크 陸여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陸여사는 평생 남편의 이런 기질과 싸웠다. 술을 같이 마신 사람을 따로 불러 경고를 주기도 하고, 담배를 줄이게 하려고 매일 일정량을 '배급' 하기도 했으며, 외도 소식에는 부부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월평균 10회 가량 연회
김용태의원이 대통령과 함께 포철에 들렀다가 숙소인 울산 현대중공업 영빈관에 도착했을때 젊은 아가씨들의 영접을 받았다. 서울의 유명 요정에 있던 아가씨들이 단체로 출장온 것이다.
박정희는 이날 많은 술을 마셨다. 10.26 재판과정에서 김재규 (金載圭.사형) 정보부장과 대통령의 밤 행사를 담당했던 박선호 (朴善浩.사형) 의전과장이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궁정동과 같은 대통령전용 비밀연회장은 모두 5곳, 연회는 월평균 10회 정도 열렸다. 쓸쓸한 노구
(老軀) 로 폭음하곤 몸을 못가누는 일이 잦아졌다.
10.26 수사관계자는 "대통령의 그런 모습을 본 김재규나 박선호는 대통령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갔을 것이고, 절대권력자에게 총을 겨누는 심리적 원인이 됐을 것" 이라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흔들리는 몸과 마음이 국정에 직접 미치는 영향이다. 박정희 특유의 탁월한 용인술이 무뎌진 것이다.
무뎌진 인사는 사정 (私情)에 얽매였다. 중앙정보부 출신 K씨는 "나이가 들고 마음이 허해지니까 자꾸만 의심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가까운 사람만 찾게됐다" 고 해석했다.
물리적으로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차지철 (車智澈) 경호실장이다. 74년 박종규 (朴鐘圭) 실장 후임으로 그를 추천한 사람은 많다. 김정렴 (金正濂.73) 비서실장은 '5.16 동지요
경호실차장을 지냈고, 국회의원에 정치학 박사학위까지 받고, 성실한 기독교인' 이었기에 車씨를 추천했다. 74년 당시 車씨는 경호실장으로 적임자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車실장은 월권하기 시작했다. 金실장은 "78년께부터 車실장이 무리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고 말한다.
자유당시절 헌병감을 지낸 이규광 (李圭光.72) 씨를 비밀리에 기용해 사설정보대를 운용하면서 정치에 본격 개입했고, 경호실 연병장에서 탱크까지 동원한 열병식을 하면서 유명인사들을 초대해 세 (勢) 를 과시했다.
통상 대통령이 아침에 집무실에 도착하면 먼저 비서실장이 보고한 뒤 대통령의 지시를 관계 부처에 전해준다. 비서실장 보고와 동시에 정보부의 일일보고가 대통령 책상 위에 올라가있다. 그런데 車실장은 이러한 권력의 위계질서를 파괴했다.

아침에 대통령이 출근하기 기다렸다가 비서실장보다 먼저 들어가 보고했다. 당연히 대통령은 車실장으로부터 첫 보고를 받고 필요한 지시를 내린다. 자연스럽게 '각하의 뜻' 을 전하는 권세는 車실장의 몫이 되고, 비서실장이나 정보부장의 보고는 구문 (舊文) 으로 대통령의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된다. 車실장의 월권은 78년말 김계원 (金桂元.74) 비서실장이 취임하면서 일상화됐다.
金씨를 비서실장으로 중용한 것은 朴대통령의 말기 용인술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金씨가 비서실장직을 고사하자 朴대통령은 "일은 안해도 돼. 나하고 말동무만 하면 돼" 라며 그를 그 자리에 앉혔다.
일하는 참모보다 같이 술마실 말동무가 필요했던 것이다. 車실장의 권력이 커지면서 김재규정보부장도 '각하의 뜻' 을 받들기 위해 경호실장의 방을 찾아야 했다.
공직으로도 엄연히 높은 서열이고, 군경력으로 말하자면 하늘과 땅 차이인 장군 (김계원대장.김재규중장) 들이 공수단 대위 출신에게 밀린 것이다. 심각한 갈등상을 알면서 방치한 것은 박정희답지 않다.
김계원비서실장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車실장과 金부장간의 알력을 얘기했지만 대통령은 "다 나를 위해 충성하려는 것" 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사실 朴대통령은 늘 그렇게 2인자들의 충성경쟁을 유도하고 또 즐겨왔다. 그런데 문제는 박정희 자신이 그런 경쟁과 알력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는 점이다.
사사로운 정에 흔들렸던 박정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최태민 (崔太敏.작고) 이라는 괴목사의 등장이다. 큰딸 근혜 (槿惠.45) 씨에게 접근한 崔목사는 순경 출신으로 한때는 불가에 입문했다가 목사로 변신한 미스터리의 인물. 그는 75년 구국선교단.구국봉사단이란 조직을 만들어 자신은 총재, 근혜씨는 명예총재로 앉혀 놓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등 말썽을 빚었다.
77년 9월 대통령이 崔목사의 비리를 수사해온 金정보부장과 崔목사를 직접 대면시켜 놓고 '친국' (親鞫.임금이 직접 신문하는 일) 까지 했으나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며칠 후 朴대통령은 선우련 (鮮于煉.작고) 비서관에게 '근혜 곁에 崔목사를 얼씬도 못하게 하라' 고 특명을 내렸다.
그러나 근혜씨가 崔목사를 옹호하고 나서자 鮮于비서관은 다시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했다.
그제서야 대통령은 심중을 털어놓았다.
"근혜가 엄마도 없는데 일까지 중단시켜서 가엾기도 하고, 나도 마음이 아프고…. " 결국 그렇게 崔목사건은 흐지부지되고 10.26이후 전두환 (全斗煥.66.전대통령) 합수본부장이 崔씨를 강제로 강원도로 쫓아낼 때까지 그의 활동은 계속됐다.


◇大義보다 私情에 흔들려
이러한 권력말기의 피로증후군이 집중된 곳은 정보부장 자리였다. 마침 김재규부장은 18년간 쌓인 절대권력의 내홍 (內訌) 이 터져나오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다.
金부장의 재임시절 정보부 간부였던 Z씨는 "金부장은 유신하에서 정보부는 국정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공무원을 일하게 채찍질하고, 사회질서를 바로잡고, 심지어 야당이나 언론과 같이 권력을 비판하는 역할까지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고 말했다. 金부장의 이같은 소명의식은 분명 남다른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정권의 방패 金부장 역시 막중한 소명을 다하기에는 정신적.육체적으로 너무나 불안정한 인물이었다. 육체적으로 그는 간경화증이 심각한 상태였다.
정서적으로 그는 79년 김영삼 (金泳三) 신민당총재의 의원직 제명에 항의해 일어난 부마(釜馬) 시위사태 현장을 찾아가 "인명피해 없도록 하라" 고 지시하면서도 YH여공의 신민당사 농성 당시에는 경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경진압을 지시해 여공 1명의 목숨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결국 절대권력의 쌓인 피로는 권력의 가장 핵심이자 가장 약한 고리였던 김재규에 의해 10.26으로 끝을 맺었다. 비록 총을 쏜 것은 김재규지만 총을 쏘게 만든 것은 18년의 장기집권에 지친 박정희 자신이었다. 시대의 흐름이, 국민의 뜻이, 하늘의 의지가 그를 절대권좌에 서 끌어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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