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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새마을 운동
지금은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평가를 받는 새마을운동. 마을길을 새로 닦고 공장을 지었으며 농가수익 증대사업에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당시엔 반강제로 농가 지붕을 붉고 푸른 슬레이트로 바꾸도록 하는등 외형적인 성과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비판을 받기
도 했다.


이 운동은 "일제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을 모방한 것으로 국민들의 자주적 능력을 약화시켰다" 는 지적이 있는 반면 "반만년동안 잠자던 농심 (農心) 을 깨어나게 한 국민운동"이란 평가까지 다양하다.
박정희 (朴正熙) 시대를 휩쓸었던 새마을운동은 그러나 80년 신군부가 새마을운동중앙본부를 설치하고 전두환 (全斗煥) 대통령의 동생 경환 (敬煥) 씨가 본부장을 맡으면서 관변단체의 하나쯤으로 전락해 갔다.
더구나 88년 3월 터진 '새마을 비리사건' 은 이 운동의 위상을 뿌리째 흔들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농촌의 어려운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박정희가 농촌에 본격적으로 눈돌리기 시작한 것은 집권한지 10년이 다 돼가던 70년초였다.
당시 농림부장관 김보현 (金甫炫. 73. 백제문화 개발연구원장) 씨의 증언. "공업화 추진과정에서 농촌 인구가 대거 도시로 몰리는 바람에 농민이 급격히 줄어들고 식량 자급률도 눈에띄게 떨어졌습니다.
춘궁기 (春窮期)에는 식량이 떨어진 농가가 상당히 많았지요. 朴대통령은 그 무렵 농촌을 어떤 식으로든 손대야겠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어렴풋하게나마 농촌운동의 방향을 찾은 것은 69년 8월 수해지구 시찰중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에 있는 두개 부락을 방문하면서였다.


주민들이 수해 복구뿐만 아니라 마을 안길을 넓히고 지붕 개량. 담장 정돈. 조림등 생활환경을 크게 개선시켜 놓았던 것이다. 박정희의 70년 4월 전국 한해 (旱害) 대책회의에서의 역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5천년 묵은 가난을 몰아내도록 그들의 의욕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먼저 농촌의 생활환경을 바꾸는 '새마을 가꾸기사업' 부터 벌여보도록 합시다." 때마침 그해 여름 쌍용양회가 시멘트 생산과잉으로 재고 처리에 어려움을 겪자 朴대통령은 정부가 구입해 전국 3만5천개 부락에 3백35부대씩 무료로 지급하게 했다.
그 결과 1만6천여 마을이 빨래터를 고치고 다리를 놓는등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렸다. 이듬해 이들 마을에 대해서만 시멘트 5백부대와 철근 1t씩이 추가로 지원됐다. 또 전국의 부락을 주민 참여도에 따라 기초.자조.자립마을로 나눠 참여도가 낮은 기초마을은 각종 정부지원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당시 농협중앙회 지도과장으로 청와대에 차출돼 새마을운동을 담당한 한호선 (韓灝鮮.61.자민련) 국회의원의 증언. "새마을운동은 철저히 경쟁 원리를 도입했어요. 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농촌에 전기가 들어간 마을은 20% 정도밖에 안됐습니다.
경제논리 대로라면 전봇대에 가까운 마을부터 전기가 들어가도록 해야 하는데, 朴대통령은 전봇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이라 하더라도 새마을운동의 성과가 있을 경우 그 마을에만 전기가 들어가도록 지시했어요. 중간에 있는 마을들은 전깃줄 구경만 하라는 식이
었죠. " '새마을 가꾸기' 에서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72년부터 소득증대사업에 초점을 맞췄다. 새마을운동의 방향이 바뀐 것은 경북영일군기계면 문성동마을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다.


마을지도자가 주민을 동원,가뭄으로 말라버린 내를 파 물을 얻은 후 각종 농산물과 특수작물을 생산해 10배의 수익을 올렸다.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새마을운동을 이끈 유태영(柳泰永.61.건국대 교수) 박사는 "朴대통령이 이 마을을 둘러본 직후 소득증대사업을 벌일
결심을 했다" 고 말했다.
새마을지도자 육성 결심도 이때부터다. "새마을운동은 한마디로 '잘살기 운동' 입니다.
소득이 증대돼 농촌이 부유해지고 보다 더 여유있고 품위있는 문화생활을 누리도록 해야합니다." (72년 4월 광주 새마을 소득경진대회 치사) 박정희는 여기서 "환경개선사업보다 소득증대에 직접 기여하는 사업들을 검토하라" 고 정부 관계자에게 지시했다. 내무부는 68년 농어촌 소득증대 특별사업의 실패 이유를 "정부가 지역 특성을 무시한채 일방적으로 사업을지정했기 때문" 이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마을에 사업선택권을 주기로 했다.
내무부 초대 새마을담당관을 거쳐 지방행정담당관.지방국장등을 지내며 새마을운동의 설계자 역할을 한 고건 (高建.59) 총리의 증언. "사업선택권을 각 마을에 준 것은 주민들의 자율적 참여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선택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사업메뉴와 사업별 추진방법을 농민들에게 제시했어요. 각 마을에서는 주민총회를 열어 사업을 선정하고 세부계획을 세웠습니다." 새마을지도자 육성을 위해 발탁된 인물은 농촌운동의 외길을 걸어온 김준 (金準.71.초당산업대 총장) 당시 농협대학
교수였다.
'새마을운동의 교주' 로까지 불린 김준과 박정희의 만남은 새마을운동을 본궤도에 올려 놓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박정희가 일깨우려는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이 새마을지도자들에게 전달됐다.
'빚지기를 두렵게, 저축하기를 기쁘게' '겉치레보다 실속있는 생활을' '수입에 맞게 지출하라' 는등 농심을 일깨우는 정신교육이 실시됐다. 이 교육은 강의형식을 탈피, 사례 발표.분임토의등 농민들의 삶의 체험을 생생히 전달하는 형태로 진행해 큰 효과를 보았다.

농수산부장관을 지낸 정소영 (鄭韶永.65.고려종합연구소 회장) 씨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얘기가 부지기수였다" 고 회고했다. 박정희는 예고없이 불쑥불쑥 새마을연수원을 방문하곤 했다. 강의실에 슬며시 들어와 새마을운동의 성공 사례담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김준 원장이 전하는 일화 한 토막. "불시에 연수원을 찾은 朴대통령이 1백40명이나 되는 수료생들의 교육소감을 나보고 다 읽게 하더니 교육생 평가를 A.B.C로 나눠 A를 받은 지도자에게는 농림부에서 특별지원을 해주라고 지시했어요. 반면 C를 받은 연수생을 추천한 군수
는 문책하도록 했습니다. 이러자 지방에서는 난리가 났지요. 군수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직접 입소자를 물색했지요. " 박정희는 일선에서 농민들과 접촉하는 면장.군수들에게 '밑을 보고 뛰라' 고 거듭 지시했다.
박진환 (朴振煥.70) 당시 대통령 경제담당특보는 "朴대통령은 길을 고쳤는지, 다리를 놓았는지 일일이 확인하며 면장과 군수들을 다그쳤다" 며 "대통령의 성화 때문에 이들이 마을을 직접 돌아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고 말했다. 또 새마을운동이 정부 고위층에까지 스며들도
록 하기위해 박정희는 한달에 한번씩 '새마을 국무회의' 를 직접 주재,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안건만 다뤘다. 매월 열리는 경제동향보고회의에도 새마을지도자를 참석시켜 성공 사례를 발표토록 했다.


전국민이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갖도록 '새마을 노래' 와 '나의 조국' 을 직접 작사.작곡해 보급시켰다.
이 운동은 '애국 헛구호 그만하고 집앞부터 쓸어라' 는 도시.공장.직장새마을운동으로 확산됐다. 67년 도시가구의 60%에 불과했던 농가소득이 74년부터 정부 통계상으로는 적어도 도시가구의 소득을 앞서기 시작했다.
또 주민들이 새마을사업을 비롯, 마을의 여러 문제를 함께 모여 토의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의 폐해도 만만찮았다. 일선 관료의 인사고과에 새마을운동 성과가 중요한 영향을 미치자 허위.과장보고도 종종 발생했다.
한호선 의원의 증언. "전북남원의 한 교장이 새마을운동을 잘해 이상촌을 만들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마을주민들이 공동이용하는 구판장.정미소.종이우산공장등을 세워 부자마을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현장 슬라이드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제가 잘 아는 마을이었어요.
협동조합에서 한 일을 그 교장이 협동조합 간판을 떼내고 자기가 한 것처럼 조작한 것이었지요.
" 또 새마을교육이 기업인.대학교수.언론인, 심지어 장.차관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로 확대실시되자 '유신독재를 지속시키기 위한 세뇌교육' 이란 비판이 일기도 했다.


70년대 우리 사회를 휩쓴 새마을운동의 열기는 79년 박정희의 사망으로 급격히 식어갔다.
현재 경기도성남에 있는 새마을연수원은 70년대 뜨거웠던 새마을운동의 열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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