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16 혁명
박정희 (朴正熙) 는 언제, 어떻게 좌익세력과 연계됐을까.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김종신 (金鐘信.67.전 부산문화방송 사장) 씨는 69년초 군시절 상관이자 朴대통령의 육사 동기인 정강(鄭剛.육군 준장 예편.작고) 장군을 만난 적이 있다.
鄭씨는 평소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 의혹을 품어오던중 5.16이 나자 '빨갱이가 나라를 뒤엎는' 줄 알고 진압에 나섰던 인물이다.
돌아와 박정희에게 鄭씨 얘기를 하던중 金비서관은 당돌한 질문을 했다. "정강장군 말로는 각하께서 한때 빨갱이를 했다고 하던데요. " 박정희는 의외로 담담했다.
잠시후 이어진 그의 설명. "해방후 만주에서 구미 친가로 돌아왔더니 형님 (朴相熙) 이 '그동안 어디서 뭘 했느냐' 고 묻더군. '만주에서 광복군에 있었다' 고 했더니 형님이 '그런 데를 왜 갔느냐' 며 못마땅해 하시는 눈치였어. 나는 그때 형님이 좀 불그스름하다고 생각했지" 박정희의 얘기는 계속된다.
"내가 육사 교관 (대위) 으로 있을 때야. 하루는 대구에서 형님 친구 (李在福.남로당 군사부총책.숙군때 처형됨)가 찾아와 '이번 일요일에 향우회가 있는데 같이 가자' 고 하더군. 육사 교관생활이 따분하기도 한데다 그 분이 '자네를 위한 모임이니 꼭 나오라' 고 해서 참석했지.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날 모였던 형님 친구들이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모임에 참석한 것이 화근이 된 것같아. 그일로 김창룡 (金昌龍.자유당시절 특무대장)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박정희는 억울하다.
남로당에 가입한 적도 없는데 모임에 한번 참석한 이유로 고문당하고 재판을 받았다는 얘기다. 과연 박정희는 억울한가.
숙군작업 실무책임자 김안일 (金安一.80.예비역 육군 준장) 특무과장은 조사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의 자술서를 직접 읽어본 몇 안되는 사람이다.
"朴소령은 김창룡에게 붙들리자마자 '이럴 때가 올줄 알았다' 면서 순순히 자술서를 쫙 써내려 갔다고 합니다.
육사 재학시절 형 박상희가 대구 10.1사건에 연루돼 구미에서 경찰의 총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내려가 보니 형 친구인 이재복이 유족들을 잘 보살펴주고 있더랍니다.
이재복은 박정희에게 '공산당 선언' 등 불온책자를 건네주면서 남로당 가입을 권유했고, 또 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부추기더랍니다.
자술서 내용으로 보면 박정희는 인간관계에다 형님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남로당에 가입한 것같았습니다." 金씨의 증언대로라면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박정희는 사상적인 좌익이라기보다 인간관계에 얽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언제, 어디서 남로당에 가입했는가.
얘기는 그의 춘천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이듬해 5월 만주에서 돌아온 박정희는 그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육사 전신) 2기로 입학, 12월14일 소위로 임관했다. 첫 부임지는 춘천 8연대 예하 경비중대. 중대장은 1기 선배인 김점곤 (金點坤.74.예비역 육군 소장.현 평화연구원장) 중위로, 그는 金중위 밑에서 제4경비초소장을 맡았다.
이듬해 (47년) 봄 박정희는 연대 작전주임 (대리) 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9월26일 육사 중대장으로 전보됐다. 임관후 그는 9개월 정도 춘천 8연대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육군본부에 보관돼 있는 그의 '장교자력표' 엔 이때의 기록이 없다. 이 공백을 8연대에서 박정희와 같이 근무했던 3기생 염정태 (廉貞.73.육군 대령 예편) 씨가 메워준다.
廉씨의 증언. "사관학교 다닐 때부터 朴전대통령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수재에다 인품도 훌륭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죠. 그래서 나는 첫 부임지가 8연대란 얘기를 듣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당시 8연대는 빨갱이 소굴이었습니다. 연대내 좌익총책이자 부연대장인 이상진 (李尙鎭.신경 2기.당시 소령).정보주임 김종국 (당시 소위) 등이 주동자였는데 모두 만군 출신으로 朴전대통령과 친했습니다.
朴전대통령도 이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포섭됐다고 봅니다." 김점곤씨는 박정희의 '춘천시절 가입설' 을 확신하고 있다.
그의 증언. "박정희의 춘천 8연대 근무시절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이 춘천까지 찾아가 그를 만나곤 했습니다. 그때 박정희는 나에게 이재복을 '숙부' 라고 소개했습니다.
나중에 숙군때 박정희의 조서를 봤더니 그를 통해 입당했다고 돼 있더군요. 당시 박정희는 우수한 자질에다 빈농 출신, 그리고 친형에 대한 원한 등으로 좌익의 포섭대상 1호였다고 봅니다." 육사 3기생중에는 좌익 연루자가 많았다.
동해안 일대의 좌익총책이었던 강문영 (康文榮) , 여순사건의 주모자 김지회 (金智會).홍순석 (洪淳錫) 등이 모두 3기생이었다. 이들은 생도시절 생도대장 오일균 (吳一均.당시 소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박정희도 오일균과 친했다. 오일균과 관련한 박정희의 일화 한 토막. 60년대 중반 朴대통령이 지방순시차 충북 청원을 지날 때였다.
동승했던 이 지역 출신 신범식 (申範植.작고)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각하, 저기가 오일균이 살던 동네입니다" 라고 설명하자 갑자기 박정희가 "어디, 어디" 하더니 그 마을을 한참동안 멍하게 쳐다보더라는 것이다.
박정희의 가슴속에 오일균의 그림자가 아직 남아 있는 것같았다고 申씨가 한 후배 언론인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申씨의 부친은 일제때 좌익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의 주변엔 숙군때 좌익활동 혐의로 처형 또는 처벌된 인사들이 많았다.
일본 육사 출신 오일균 (61기).김종석 (金鍾碩.56기).조병건 (趙炳乾.60기).김학림 (金鶴林.60기) , 만군 출신 최남근 (崔楠根.봉천 5기).이상진 (李尙鎭.신경 2기).이병주 (李丙胄.신경 2기) 등이다.
이들은 해방 전부터 박정희 (신경 2기.일본 육사 57기) 와 선.후배로 연결돼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실제 좌익활동을 한 흔적은 없다. 그래서 숙군 태풍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때의 좌익 연루 혐의는 박정희의 군시절은 물론 대통령이 된 후에까지 그를 괴롭혔다. 한국보다 미국쪽에서 더 심했다.
5.16은 박정희가 '좌익콤플렉스' 의 벼랑에서 탈출구로 시도한 일대모험이었다는 주장이 그래서 나온다. 5.16 직전 박정희는 미군측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돼 감시를 받고 있었다.
김점곤씨의 증언. "5.16전에 미 8군 댄스턴 정보국장이 매그루더 사령관의 친필 메모를 들고 나를 찾아왔더군요. 그는 20여명의 한국군 장교 명단을 하나씩 보여주면서 그들의 좌익 관련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 속에 박정희 장군도 들어 있었습니다. '朴장군은 과거에 공산당을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별을 두 개나 단 사람이 기득권을 버리고 공산당으로 가지 않을 것' 이라고 대답했지요."
한무협 (韓武協.74.육군 소장 예편) 씨의 증언도 같은 맥락이다. "민주당 시절 이종찬 (李鍾贊) 장군이 장면 (張勉) 총리에게 박정희장군의 중용을 건의한 적이 있습니다. 張총리가 이 문제를 매그루더와 논의했습니다.
얼마 후 매그루더가 육본으로 朴장군의 신원조회를 요청했는데 당시 육본 고위 당국자가 '朴장군은 좌익' 이라고 답변했지요. 이에 매그루더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 (육본 작전참모부장)에 앉혔느냐' 며 육본측에 항의했고 며칠 후 朴장군은 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 됐습니다."
당시 박정희 밑에서 육본 작전참모부 차장으로 있었던 김안일씨는 "당시 朴장군은 군에서 추방되기 전에 거사해야 한다는 쫓기는 기분에서 거사를 계획한 것같다" 고 증언했다.
5.16 직후에도 미국은 박정희의 사상에 대한 의혹을 버리지 못했다. 군사정권 초기 미국과 일본의 관심사는 이 문제였다.
말년에까지 이어진 박정희와 미국의 갈등은 오랜 연원을 가진 셈이다. 63년 5대 대통령선거 투표일 전날 윤보선 (尹潽善) 후보는 박정희후보의 좌익 연루설을 제기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 문제는 그러나 선거 직후 尹후보가 朴당선자에게 축하전화를 하면서 유야무야됐다. 박정희가 재임기간중 좌익문제에 유별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 저변에는 좌익 콤플렉스가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박정희를 좌익과 연계시키는 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