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으로 이동

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7,27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34.좌경을 딛고
1961년 11월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찾은 박정희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공항에서부터 시위대에 시달려야 했다.
수만명이 공항 입구에서 '살인마 박정희를 타도하자' '군대깡패 두목 물러가라' 를 외치고있었다.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趙鏞壽) 씨가 조총련 자금을 지원받은 혐의로 5.16 직후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데 대한 조총련의 항의시위대였다.
설명을 들은 박정희는 "돌아가면 빨갱이를 더 잡아넣어야 되겠구먼" 하고는 말문을 닫았다.
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박정희는 "미친 개에는 몽둥이가 약" 이라며 대북 (對北) 군사보복 방안을 극비리에 세워 정면 대응하려 했으나 미국의 강한 저지로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박정희가 대통령 재임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는 증거는 많다. 국시 (國是) 도 반공이었다. 일부에서는 그를 극우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런 박정희가 한때 좌익에 연루됐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49년 2월초 서울 명동의 구 증권거래소 건물 3층에 위치한 육본 정보국장실. 한 장교가 백선엽 (白善燁.77.예비역 육군대장.현 한국후지쯔 고문) 정보국장 (당시 대령) 과 면담하고있었다. 작업복 차림을 한 그는 당시 육본 정보국 제1과 (전투정보과) 과장 박정희 소령이었다.
朴소령이 입을 열었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 생사의 갈림길에서 지푸라기를 잡으려는 朴소령의 태도는 뜻밖에도 시종 의연했다.
계급은 아래지만 나이로는 세살 위인 朴소령의 인품에 대해 들은 바 있던 白국장은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도와드리지요. " (백선엽씨 증언) 白국장의 이 한마디가 朴소령의 목숨을 건지는 출발점이 됐다.
당시 朴소령은 군부내 남로당 거물 세포 (조직원) 로 지목돼 군 수사당국에서 조사받고 있었다. 해방후 미군정은 '불편부당 (不偏不黨)' 을 내세워 공산당 활동을 인정했다. 군 입대자의 신원조회도 금지되고 있어 공산당 조직의 군 침투가 용이했다.
48년 10월19일 여수 14연대의 반란을 계기로 군내 좌익세력에 대한 숙군 (肅軍)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됐다. 숙군작업의 주체는 육본 정보국 제3과 (특무과).
한편 태릉의 1연대에서는 자체 숙군작업이 진행중이었다. 나중에 '스네이크 (뱀)' 란 별명과 함께 숙군작업의 핵심인물이 된 특무부대장 김창룡 (金昌龍.작고) 은 당시 이 부대의 정보주임이었다.
김창룡은 일제 당시 만주에서 일본군 헌병보를 지내면서 사상범을 다뤘던 경력이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일단 공산주의자로 보고 의심나면 족치기부터 했다. 朴소령이 김창룡팀에 체포된 것은 48년 11월11일. 그가 여순사건 반란군 토벌에 참여했다가 서울로 돌아온지 불과 며칠 뒤였다.
김창룡은 남로당 군사총책 이재복 (李在福.숙군때 사형) 의 비서겸 군사연락책 김영식 (金永植) 을 붙잡아 군내 좌익세포 명단을 통째로 입수했다.
당시 육본 특무과장으로 숙군 실무책임자였던 김안일 (金安一.80.예비역 육군준장.현 목사)씨의 증언. "김영식을 데리고 전국의 군부대를 돌면서 남로당 세포를 찍으라 했더니 이후 수사는 주워담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이 명단 속에 바로 박정희 소령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
박정희가 처음 잡혀간 곳은 신세계백화점 근처 서울헌병대. 이곳 영창에서 1주일을 보낸 그는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여기서 수사관들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이를 두고 박정희는 생전에 "김창룡의 고문에 못이겨…" 라고 언급한 바 있다.
박정희는 명단 속에 군부내 좌익거물로 돼 있었는데 어떻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까. 만군인맥과 육사인맥의 구명운동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김창룡등 수사팀이 구명건의를 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왜 그랬을까.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은 한결같다. 朴소령은 수사과정에서 군부내 남로당 세포명단을 자진해 모두 털어놓는등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리스트' 의 위력은 대단했다. 김창룡팀은 마치 고구마 캐듯 좌익세포들을 줄줄이 잡아들였다. 김안일씨는 "朴소령을 살려주자고 최초로 제의한 사람은 바로 그를 수사한 김창룡대위였다" 고 증언했다. 박정희와 육사 동기생 (2기) 인 김안일씨는 김창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직속상관인 백선엽국장과 朴소령의 면담을 주선했다.
백선엽씨의 증언. "49년초 김안일 특무과장이 찾아와 박정희 소령과 면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金과장은 朴소령이 군내 침투 좌익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朴소령과 면담했는데 죄과를 솔직히 인정할 뿐더러 그 상황에서도 전혀 비굴하지 않더군요."
朴소령을 살리자는 목소리는 여러 군데서 나왔다.
자유당 정권에서 헌병사령관을 지냈던 원용덕 (元容德.만군 대좌출신.작고) 장군도 이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생도시절 이 학교 군의관으로 있었는데 박정희를 몹시 아꼈다고 한다.
정일권 (丁一權.작고) 전국무총리 (당시 육군 참모부장) 도 이 대열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반론도 만만찮다.
김점곤 (金點坤.74.예비역 육군소장.현 평화연구원 원장) 씨는 "당시 丁씨는 김창룡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던 상황이어서 朴소령 구명에 나설 입장이 못됐다" 고 밝혔다. 정보국에서 朴소령과 같이 근무했던 유양수 (柳陽洙.74.예비역 소장.전 동자부장관) 씨도 같은 증언을 했다.
박정희 일행의 군사재판에서 재판장을 맡았던 김완룡 (金完龍.74.초대 육본 법무감) 씨는 "당시 나와 약수동 앞뒷집에 살던 송요찬 (宋堯讚) 장군도 朴소령을 살려달라고 부탁한 적이있다" 고 증언했다.
朴소령은 이 과정에서 좀 무리했던 모양이다. 김재춘 (金在春.70) 씨의 증언. "제가 63년 중앙정보부장 취임 직후 부내 고위직에 민복기 (閔復基.84.전 대법원장) 씨를 임명하기 위해 朴의장의 승낙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朴의장이 '내가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金부장이 그 사람을 좀 돌봐줬으면 좋겠다' 며 오히려 내게 부탁하더군요. 그래서 결국 그 자리에 부탁받은 인물을 앉히고 閔씨는 대신 법무장관으로 돌렸습니다. " 박정희가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인물은 박정희가 자신의 세포라고 불었던 사람이었다.
朴정권 시절 이 인물은 군 참모총장직까지 올랐다. 억울한 고생을 시킨데 대한 보상 차원이 아니었나 짐작될 뿐이다.
군 상층부에서는 朴소령을 살리기로 결정하면서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만드는 '묘책'을 썼다. 전국 각 부대로 끌고다니며 朴소령이 직접 공산당 세포를 찍게 만들었다.
"좌익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되지만 남로당에 가입돼 있다 하더라도 다시는 활동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는 취지였다.
재판은 석방을 위한 요식행위였다. 그는 구속 1개월여만인 48년 12월말께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다. 49년 2월8일 구 통위부 (현 코리아헤럴드사 뒤편) 장교식당을 임시법정으로 군사재판이 열렸다.
정복차림에 이발까지 한 단정한 모습으로 입정한 박정희는 재판관의 신문에 순순히 남로당가입사실을 시인했다.
형량은 파면과 동시에 무기징역.급료몰수. 당시 재판장이었던 김완룡씨는 "朴소령은 잘못을 뉘우치고 전향한데다 그의 명망을 높이 산 군 수뇌부의 선처로 목숨을 건졌다" 고 증언했다.

  1. No Image notice

    회원 삭제 대상자

    회원정보 정리작업(삭제) 안내 공지에 따라 아래 ID회원은 2012.12.31 삭제됩니다. 1차 회원 삭제 대상자 ID (333명) a0708 ella2009 krosa77 sewook2100 a0de39052407 elninotw ksjhp17 sgc2001 a0qqpdxadd5422 fever372 kth719 shee1225 a1953apo2702 ffchc1...
    Date2012.12.26 Bymahru Views16,800
    read more
  2. No Image notice

    회원정보 정리작업(삭제) 안내 공지

    회원 가입후 지속적으로 사용을 안하고 있는 회원정보의 정리작업이 있습니다. 1차적으로 1년 이상 로그인 기록이 없는 회원의 정보를 불가피하게 임의로 2012.12.01부터 2012.12.31까지 삭제할 예정입니다. 불필요한 데이터보관을 방지 및 운영, 유지 관리를 ...
    Date2012.11.02 Bymahru Views13,095
    read more
  3.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8.집념과

    38.집념과 박정희 (朴正熙) 전대통령 추종자들은 그를 세종대왕이나 충무공 이순신 (李舜臣.1545~98) 장군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기도 한다. 그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뚜렷한 공과 (功過) 를 남긴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를 영웅화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역...
    Date2008.07.30 Bymahru Views8,135
    Read More
  4.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7.연인...아내...그리고

    37.연인...아내...그리고 청와대 안주인의 역할과 이미지는 대통령의 국정수행능력에 버금가는 국민들의 관심사다. 이번 대선에서도 많은 유권자들, 특히 여성 유권자의 90%가 후보 부인을 보고 누구에게 표를 찍을 것인지 결정하겠다는 여론조사가 있었다. 육...
    Date2008.07.30 Bymahru Views7,596
    Read More
  5.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5.5.16 혁명

    35.5.16 혁명 박정희 (朴正熙) 는 언제, 어떻게 좌익세력과 연계됐을까.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김종신 (金鐘信.67.전 부산문화방송 사장) 씨는 69년초 군시절 상관이자 朴대통령의 육사 동기인 정강(鄭剛.육군 준장 예편.작고) 장군을 만난 적이 있다. 鄭씨는 ...
    Date2008.07.30 Bymahru Views7,761
    Read More
  6.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4.좌경을 딛고

    34.좌경을 딛고 1961년 11월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찾은 박정희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공항에서부터 시위대에 시달려야 했다. 수만명이 공항 입구에서 '살인마 박정희를 타도하자' '군대깡패 두목 물러가라' 를 외치고있었다. 혁신계 신문 민족일...
    Date2008.07.30 Bymahru Views7,270
    Read More
  7.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3.착수 6년만에 쏘아올린 유도탄

    33.착수 6년만에 쏘아올린 유도탄 미사일 (유도탄) 은 비행하는 종합과학이다. 총기나 대포류와 달리 유도조정.구조해석.풍동(風洞) 시험.추진제등 각 분야의 고도기술이 농축된 무기체계의 정화다. 첨단기술 불모의 시대였던 70년대말 미사일 국산화 성공은 ...
    Date2008.07.30 Bymahru Views7,546
    Read More
  8.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2.10.26 총성에 떨어진 무궁화꽃

    32.10.26 총성에 떨어진 무궁화꽃 미국은 76년 1월 박정희 (朴正熙) 의 핵개발을 중지시키기 위해 국무부 관리들을 보냈다. 마이런 크러처 해양.국제환경.과학담당 차관보서리를 단장으로 한 교섭단 일행은 1월22~23일 주한 미대사관에서 최형섭 (崔亨燮.77.포...
    Date2008.07.30 Bymahru Views7,472
    Read More
  9.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1.핵개발 보류

    31.핵개발 보류 73년 3월 주재양 (朱載陽.64.재미) 박사가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에 취임, 새로 생겨난 특수사업 담당 부서의 책임을 맡으면서 핵개발은 본격화된다. 이 부서가 바로 핵개발 전담부서였다. 朱박사는 서울대 화공과 재학중 미국으로 건너가 텍...
    Date2008.07.30 Bymahru Views7,242
    Read More
  10.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0.미국의 일방적인 철수에 '핵보유' 결심

    30.미국의 일방적인 철수에 '핵보유' 결심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이 핵개발을 시작한 동기는 예기치 않은 미국의 주한미군 철군 통보였다. 북한에 비해 군사력에서 절대 열세였던 시절이었기에 국민들은 위기감에 사로잡혔고 박정희는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
    Date2008.07.30 Bymahru Views7,371
    Read More
  11.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9.핵개발2

    29.핵개발2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가 아닌 실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가 있었다. 작가 김진명 (金辰明.39) 씨가 국제적인 핵물리학자 이휘소 (李輝昭.77년 작고) 박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을 소재로 쓴 이 소설은 93년 8월 출간, 1년도 안돼 3...
    Date2008.07.30 Bymahru Views7,584
    Read More
  12.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8.핵개발

    28.핵개발 풍운아 박정희 (朴正熙) 는 어느날 홀연히 국민앞에 나타났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의 극적인 삶과 죽음을 두고 일본의 한 정치인은 '하늘은 영웅을 냈다가 시대의 소임을 다하면 갑자기 거둬간다' 고 애도했다. 물론 그의 업적에 대해...
    Date2008.07.30 Bymahru Views7,366
    Read More
  13.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7.한일의 관계

    27.한일의 관계 한.일회담은 밀실회담이었기에 권력 변화에 민감했다. 일본은 박정희 (朴正熙) 라는 새 권력자를 협상의 최고 파트너로 판단, 군정(軍政) 기간중 회담을 타결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케다 하야토 (池田勇人) 총리가 '金 (JP) - 오히라 메모' 를 ...
    Date2008.07.30 Bymahru Views7,140
    Read More
  14.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6.자민당 실력자 오노의 망언

    26.자민당 실력자 오노의 망언 63년 12월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의 취임사절로 참석했던 일본 정계의 거물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자민당부총재는 희대의 망언 (妄言) 을 했다. 귀국 기자회견에서 그는 朴대통령의 취임 연설을 '세기의 연설' 이라고 높이 평...
    Date2008.07.30 Bymahru Views7,382
    Read More
  15.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5.지한파

    25.지한파 한.일관계는 61년 6월초 박정희 (朴正熙) 의 문경보통학교 제자 전세호 (錢世鎬.당시 재일 한국학생동맹위원장) 란 인물의 등장으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그는 "혁명과업을 돕기 위해 일본서 왔으니 朴장군을 만나게 해달라" 고 요구하다 경찰...
    Date2008.07.30 Bymahru Views7,114
    Read More
  16.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4.밉지만 배울건 배우자

    24.밉지만 배울건 배우자 5.16 직후의 일본은 지금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될 정도로 우리에겐 깊은 심연의 '가깝고도먼 나라' 였다. 짙게 깔린 반일감정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가로막고 있었으나 5.16 주체들로선 권력 유지와 '혁명공약' 인 경제개발을 위해...
    Date2008.07.30 Bymahru Views7,538
    Read More
  17.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3.나 고속도로에 미쳤어 정치적 반대 묵살

    23.나 고속도로에 미쳤어 정치적 반대 묵살 고속도로는 이제 우리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레 자리잡고 있다. 지금 와서는 정부 최고결정권자의 식견이 국가발전에 미치는 영향력의 지대함을 거론할 때 대표적인 사례로 등장하는 박정희 (朴正熙) 의 고속도...
    Date2008.07.30 Bymahru Views7,363
    Read More
  18.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2.경제적 극일 집착 '경공업으로 승부수'

    22.경제적 극일 집착 '경공업으로 승부수' 박정희 (朴正熙)가 경제발전의 모델로 일본을 선택하고 일본으로부터 배우려 했던 궁극적 목적은 일본을 따라잡고 넘어서겠다는 '극일 (克日)' 의 야망 때문이었다. 그 야망의 첫 단추가 끼워진 것이 허허벌판인 울산...
    Date2008.07.30 Bymahru Views7,774
    Read More
  19.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1.산림녹화

    21.산림녹화 미국의 한 하원의원이 지난 초여름 특별기로 북한을 방문한 후 바로 공해를 거쳐 한국땅에 진입하면서 "지옥에서 천당으로 들어왔군" 이라는 탄성을 발했다고 한다. 그가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쪽에서 상대적으로 훨씬 풍요로운 한국 영토로 들어왔...
    Date2008.07.30 Bymahru Views7,034
    Read More
  20.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0.한뼘 땅도 열외 불허 '그린벨트'

    20.한뼘 땅도 열외 불허 '그린벨트' 외국에선 "20세기 각국의 국토계획중 대표적 성공사례로 환경보전정책의 백미 (白眉)" 라는 극찬을 받고, 국내에선 "대도시 주민들의 숨쉴 공간을 마련했다" 는 얘기와 함께 '박정희 (朴正熙) 의 최대 걸작' 이란 평가를 받...
    Date2008.07.30 Bymahru Views7,303
    Read More
  21.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19.가전제품

    19.가전제품 '가난은 나라도 못구한다' 는 말 대신 '가난은 나라만이 구할 수 있다' 는 것을 신념으로 안고 살아간 박정희 (朴正熙) .그런 그가 끝내 미심쩍어 한 분야가 전자산업이다. 60년대 후반부터 전자산업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어 가기는 했지만 '...
    Date2008.07.30 Bymahru Views7,389
    Read More
  22.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18.중앙정보부

    18.중앙정보부 절대기아 (饑餓) 로부터의 해방은 5.16직후부터 박정희 (朴正熙)에게 주어진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먹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무렵 그가 집착했던 대목은 한국땅에서 나는 석유였다. 바람이 간절하면 때론 꿈으로도 나타난다던가. 과묵.신...
    Date2008.07.30 Bymahru Views7,390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