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좌경을 딛고
1961년 11월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찾은 박정희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공항에서부터 시위대에 시달려야 했다.
수만명이 공항 입구에서 '살인마 박정희를 타도하자' '군대깡패 두목 물러가라' 를 외치고있었다.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趙鏞壽) 씨가 조총련 자금을 지원받은 혐의로 5.16 직후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데 대한 조총련의 항의시위대였다.
설명을 들은 박정희는 "돌아가면 빨갱이를 더 잡아넣어야 되겠구먼" 하고는 말문을 닫았다.
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박정희는 "미친 개에는 몽둥이가 약" 이라며 대북 (對北) 군사보복 방안을 극비리에 세워 정면 대응하려 했으나 미국의 강한 저지로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박정희가 대통령 재임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는 증거는 많다. 국시 (國是) 도 반공이었다. 일부에서는 그를 극우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런 박정희가 한때 좌익에 연루됐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49년 2월초 서울 명동의 구 증권거래소 건물 3층에 위치한 육본 정보국장실. 한 장교가 백선엽 (白善燁.77.예비역 육군대장.현 한국후지쯔 고문) 정보국장 (당시 대령) 과 면담하고있었다. 작업복 차림을 한 그는 당시 육본 정보국 제1과 (전투정보과) 과장 박정희 소령이었다.
朴소령이 입을 열었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 생사의 갈림길에서 지푸라기를 잡으려는 朴소령의 태도는 뜻밖에도 시종 의연했다.
계급은 아래지만 나이로는 세살 위인 朴소령의 인품에 대해 들은 바 있던 白국장은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도와드리지요. " (백선엽씨 증언) 白국장의 이 한마디가 朴소령의 목숨을 건지는 출발점이 됐다.
당시 朴소령은 군부내 남로당 거물 세포 (조직원) 로 지목돼 군 수사당국에서 조사받고 있었다. 해방후 미군정은 '불편부당 (不偏不黨)' 을 내세워 공산당 활동을 인정했다. 군 입대자의 신원조회도 금지되고 있어 공산당 조직의 군 침투가 용이했다.
48년 10월19일 여수 14연대의 반란을 계기로 군내 좌익세력에 대한 숙군 (肅軍)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됐다. 숙군작업의 주체는 육본 정보국 제3과 (특무과).
한편 태릉의 1연대에서는 자체 숙군작업이 진행중이었다. 나중에 '스네이크 (뱀)' 란 별명과 함께 숙군작업의 핵심인물이 된 특무부대장 김창룡 (金昌龍.작고) 은 당시 이 부대의 정보주임이었다.
김창룡은 일제 당시 만주에서 일본군 헌병보를 지내면서 사상범을 다뤘던 경력이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일단 공산주의자로 보고 의심나면 족치기부터 했다. 朴소령이 김창룡팀에 체포된 것은 48년 11월11일. 그가 여순사건 반란군 토벌에 참여했다가 서울로 돌아온지 불과 며칠 뒤였다.
김창룡은 남로당 군사총책 이재복 (李在福.숙군때 사형) 의 비서겸 군사연락책 김영식 (金永植) 을 붙잡아 군내 좌익세포 명단을 통째로 입수했다.
당시 육본 특무과장으로 숙군 실무책임자였던 김안일 (金安一.80.예비역 육군준장.현 목사)씨의 증언. "김영식을 데리고 전국의 군부대를 돌면서 남로당 세포를 찍으라 했더니 이후 수사는 주워담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이 명단 속에 바로 박정희 소령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
박정희가 처음 잡혀간 곳은 신세계백화점 근처 서울헌병대. 이곳 영창에서 1주일을 보낸 그는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여기서 수사관들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이를 두고 박정희는 생전에 "김창룡의 고문에 못이겨…" 라고 언급한 바 있다.
박정희는 명단 속에 군부내 좌익거물로 돼 있었는데 어떻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까. 만군인맥과 육사인맥의 구명운동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김창룡등 수사팀이 구명건의를 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왜 그랬을까.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은 한결같다. 朴소령은 수사과정에서 군부내 남로당 세포명단을 자진해 모두 털어놓는등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리스트' 의 위력은 대단했다. 김창룡팀은 마치 고구마 캐듯 좌익세포들을 줄줄이 잡아들였다. 김안일씨는 "朴소령을 살려주자고 최초로 제의한 사람은 바로 그를 수사한 김창룡대위였다" 고 증언했다. 박정희와 육사 동기생 (2기) 인 김안일씨는 김창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직속상관인 백선엽국장과 朴소령의 면담을 주선했다.
백선엽씨의 증언. "49년초 김안일 특무과장이 찾아와 박정희 소령과 면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金과장은 朴소령이 군내 침투 좌익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朴소령과 면담했는데 죄과를 솔직히 인정할 뿐더러 그 상황에서도 전혀 비굴하지 않더군요."
朴소령을 살리자는 목소리는 여러 군데서 나왔다.
자유당 정권에서 헌병사령관을 지냈던 원용덕 (元容德.만군 대좌출신.작고) 장군도 이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생도시절 이 학교 군의관으로 있었는데 박정희를 몹시 아꼈다고 한다.
정일권 (丁一權.작고) 전국무총리 (당시 육군 참모부장) 도 이 대열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반론도 만만찮다.
김점곤 (金點坤.74.예비역 육군소장.현 평화연구원 원장) 씨는 "당시 丁씨는 김창룡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던 상황이어서 朴소령 구명에 나설 입장이 못됐다" 고 밝혔다. 정보국에서 朴소령과 같이 근무했던 유양수 (柳陽洙.74.예비역 소장.전 동자부장관) 씨도 같은 증언을 했다.
박정희 일행의 군사재판에서 재판장을 맡았던 김완룡 (金完龍.74.초대 육본 법무감) 씨는 "당시 나와 약수동 앞뒷집에 살던 송요찬 (宋堯讚) 장군도 朴소령을 살려달라고 부탁한 적이있다" 고 증언했다.
朴소령은 이 과정에서 좀 무리했던 모양이다. 김재춘 (金在春.70) 씨의 증언. "제가 63년 중앙정보부장 취임 직후 부내 고위직에 민복기 (閔復基.84.전 대법원장) 씨를 임명하기 위해 朴의장의 승낙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朴의장이 '내가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金부장이 그 사람을 좀 돌봐줬으면 좋겠다' 며 오히려 내게 부탁하더군요. 그래서 결국 그 자리에 부탁받은 인물을 앉히고 閔씨는 대신 법무장관으로 돌렸습니다. " 박정희가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인물은 박정희가 자신의 세포라고 불었던 사람이었다.
朴정권 시절 이 인물은 군 참모총장직까지 올랐다. 억울한 고생을 시킨데 대한 보상 차원이 아니었나 짐작될 뿐이다.
군 상층부에서는 朴소령을 살리기로 결정하면서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만드는 '묘책'을 썼다. 전국 각 부대로 끌고다니며 朴소령이 직접 공산당 세포를 찍게 만들었다.
"좌익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되지만 남로당에 가입돼 있다 하더라도 다시는 활동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는 취지였다.
재판은 석방을 위한 요식행위였다. 그는 구속 1개월여만인 48년 12월말께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다. 49년 2월8일 구 통위부 (현 코리아헤럴드사 뒤편) 장교식당을 임시법정으로 군사재판이 열렸다.
정복차림에 이발까지 한 단정한 모습으로 입정한 박정희는 재판관의 신문에 순순히 남로당가입사실을 시인했다.
형량은 파면과 동시에 무기징역.급료몰수. 당시 재판장이었던 김완룡씨는 "朴소령은 잘못을 뉘우치고 전향한데다 그의 명망을 높이 산 군 수뇌부의 선처로 목숨을 건졌다" 고 증언했다.
1961년 11월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찾은 박정희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공항에서부터 시위대에 시달려야 했다.
수만명이 공항 입구에서 '살인마 박정희를 타도하자' '군대깡패 두목 물러가라' 를 외치고있었다.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趙鏞壽) 씨가 조총련 자금을 지원받은 혐의로 5.16 직후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데 대한 조총련의 항의시위대였다.
설명을 들은 박정희는 "돌아가면 빨갱이를 더 잡아넣어야 되겠구먼" 하고는 말문을 닫았다.
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박정희는 "미친 개에는 몽둥이가 약" 이라며 대북 (對北) 군사보복 방안을 극비리에 세워 정면 대응하려 했으나 미국의 강한 저지로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박정희가 대통령 재임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는 증거는 많다. 국시 (國是) 도 반공이었다. 일부에서는 그를 극우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런 박정희가 한때 좌익에 연루됐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49년 2월초 서울 명동의 구 증권거래소 건물 3층에 위치한 육본 정보국장실. 한 장교가 백선엽 (白善燁.77.예비역 육군대장.현 한국후지쯔 고문) 정보국장 (당시 대령) 과 면담하고있었다. 작업복 차림을 한 그는 당시 육본 정보국 제1과 (전투정보과) 과장 박정희 소령이었다.
朴소령이 입을 열었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 생사의 갈림길에서 지푸라기를 잡으려는 朴소령의 태도는 뜻밖에도 시종 의연했다.
계급은 아래지만 나이로는 세살 위인 朴소령의 인품에 대해 들은 바 있던 白국장은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도와드리지요. " (백선엽씨 증언) 白국장의 이 한마디가 朴소령의 목숨을 건지는 출발점이 됐다.
당시 朴소령은 군부내 남로당 거물 세포 (조직원) 로 지목돼 군 수사당국에서 조사받고 있었다. 해방후 미군정은 '불편부당 (不偏不黨)' 을 내세워 공산당 활동을 인정했다. 군 입대자의 신원조회도 금지되고 있어 공산당 조직의 군 침투가 용이했다.
48년 10월19일 여수 14연대의 반란을 계기로 군내 좌익세력에 대한 숙군 (肅軍)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됐다. 숙군작업의 주체는 육본 정보국 제3과 (특무과).
한편 태릉의 1연대에서는 자체 숙군작업이 진행중이었다. 나중에 '스네이크 (뱀)' 란 별명과 함께 숙군작업의 핵심인물이 된 특무부대장 김창룡 (金昌龍.작고) 은 당시 이 부대의 정보주임이었다.
김창룡은 일제 당시 만주에서 일본군 헌병보를 지내면서 사상범을 다뤘던 경력이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일단 공산주의자로 보고 의심나면 족치기부터 했다. 朴소령이 김창룡팀에 체포된 것은 48년 11월11일. 그가 여순사건 반란군 토벌에 참여했다가 서울로 돌아온지 불과 며칠 뒤였다.
김창룡은 남로당 군사총책 이재복 (李在福.숙군때 사형) 의 비서겸 군사연락책 김영식 (金永植) 을 붙잡아 군내 좌익세포 명단을 통째로 입수했다.
당시 육본 특무과장으로 숙군 실무책임자였던 김안일 (金安一.80.예비역 육군준장.현 목사)씨의 증언. "김영식을 데리고 전국의 군부대를 돌면서 남로당 세포를 찍으라 했더니 이후 수사는 주워담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이 명단 속에 바로 박정희 소령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
박정희가 처음 잡혀간 곳은 신세계백화점 근처 서울헌병대. 이곳 영창에서 1주일을 보낸 그는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여기서 수사관들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이를 두고 박정희는 생전에 "김창룡의 고문에 못이겨…" 라고 언급한 바 있다.
박정희는 명단 속에 군부내 좌익거물로 돼 있었는데 어떻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까. 만군인맥과 육사인맥의 구명운동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김창룡등 수사팀이 구명건의를 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왜 그랬을까.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은 한결같다. 朴소령은 수사과정에서 군부내 남로당 세포명단을 자진해 모두 털어놓는등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리스트' 의 위력은 대단했다. 김창룡팀은 마치 고구마 캐듯 좌익세포들을 줄줄이 잡아들였다. 김안일씨는 "朴소령을 살려주자고 최초로 제의한 사람은 바로 그를 수사한 김창룡대위였다" 고 증언했다. 박정희와 육사 동기생 (2기) 인 김안일씨는 김창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직속상관인 백선엽국장과 朴소령의 면담을 주선했다.
백선엽씨의 증언. "49년초 김안일 특무과장이 찾아와 박정희 소령과 면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金과장은 朴소령이 군내 침투 좌익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朴소령과 면담했는데 죄과를 솔직히 인정할 뿐더러 그 상황에서도 전혀 비굴하지 않더군요."
朴소령을 살리자는 목소리는 여러 군데서 나왔다.
자유당 정권에서 헌병사령관을 지냈던 원용덕 (元容德.만군 대좌출신.작고) 장군도 이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생도시절 이 학교 군의관으로 있었는데 박정희를 몹시 아꼈다고 한다.
정일권 (丁一權.작고) 전국무총리 (당시 육군 참모부장) 도 이 대열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반론도 만만찮다.
김점곤 (金點坤.74.예비역 육군소장.현 평화연구원 원장) 씨는 "당시 丁씨는 김창룡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던 상황이어서 朴소령 구명에 나설 입장이 못됐다" 고 밝혔다. 정보국에서 朴소령과 같이 근무했던 유양수 (柳陽洙.74.예비역 소장.전 동자부장관) 씨도 같은 증언을 했다.
박정희 일행의 군사재판에서 재판장을 맡았던 김완룡 (金完龍.74.초대 육본 법무감) 씨는 "당시 나와 약수동 앞뒷집에 살던 송요찬 (宋堯讚) 장군도 朴소령을 살려달라고 부탁한 적이있다" 고 증언했다.
朴소령은 이 과정에서 좀 무리했던 모양이다. 김재춘 (金在春.70) 씨의 증언. "제가 63년 중앙정보부장 취임 직후 부내 고위직에 민복기 (閔復基.84.전 대법원장) 씨를 임명하기 위해 朴의장의 승낙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朴의장이 '내가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金부장이 그 사람을 좀 돌봐줬으면 좋겠다' 며 오히려 내게 부탁하더군요. 그래서 결국 그 자리에 부탁받은 인물을 앉히고 閔씨는 대신 법무장관으로 돌렸습니다. " 박정희가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인물은 박정희가 자신의 세포라고 불었던 사람이었다.
朴정권 시절 이 인물은 군 참모총장직까지 올랐다. 억울한 고생을 시킨데 대한 보상 차원이 아니었나 짐작될 뿐이다.
군 상층부에서는 朴소령을 살리기로 결정하면서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만드는 '묘책'을 썼다. 전국 각 부대로 끌고다니며 朴소령이 직접 공산당 세포를 찍게 만들었다.
"좌익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되지만 남로당에 가입돼 있다 하더라도 다시는 활동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는 취지였다.
재판은 석방을 위한 요식행위였다. 그는 구속 1개월여만인 48년 12월말께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다. 49년 2월8일 구 통위부 (현 코리아헤럴드사 뒤편) 장교식당을 임시법정으로 군사재판이 열렸다.
정복차림에 이발까지 한 단정한 모습으로 입정한 박정희는 재판관의 신문에 순순히 남로당가입사실을 시인했다.
형량은 파면과 동시에 무기징역.급료몰수. 당시 재판장이었던 김완룡씨는 "朴소령은 잘못을 뉘우치고 전향한데다 그의 명망을 높이 산 군 수뇌부의 선처로 목숨을 건졌다" 고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