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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0.26 총성에 떨어진 무궁화꽃
미국은 76년 1월 박정희 (朴正熙) 의 핵개발을 중지시키기 위해 국무부 관리들을 보냈다.
마이런 크러처 해양.국제환경.과학담당 차관보서리를 단장으로 한 교섭단 일행은 1월22~23일 주한 미대사관에서 최형섭 (崔亨燮.77.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 과기처장관을 대표로 한 우리측 관계자들과 협상을 벌였다.
미국측은 크러처.대니얼 오다너휴 국무부 한국담당과장.폴 클리블랜드 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등이, 한국측에서는 최형섭 장관.윤용구 (尹容九.69. 동원공전 학장) 원자력연구소장. 이병휘 (李炳暉.67. 신형爐연구센터 소장) 과기처 원자력국장등이 참석했다. 말이 협상이지 미국측은 우리를 범죄자 다루 듯했다.
"미국측은 재처리의 '재' 자도 꺼내지 못하게 강압적으로 나왔어요. 말을 안들을 경우 고리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핵연료 공급을 중단하고, 심지어 핵우산도 철거하겠다고 거의 협박조로 나왔지요. 尹소장과 李국장이 '너희는 양반 노릇만 하고 우리는 밤낮 너희 밑에서 짐꾼역할만 하라는 거냐' 고 미국측에 따졌어요.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공부한 터라 미국 관리들을 별로 어려워하지 않았습니다. " (최형섭)


그러나 미국측의 태도는 완강했다. 크러처 일행은 회담에 앞서 朴대통령을 만나 '강행시 군사원조 중단' 방침을 통고한 상태였다. 朴대통령은 崔장관을 불렀다.
"崔박사, 이제 고집 꺾고 재처리 그만둡시다. 미국이 다 책임지겠대요. "
미국의 위협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시설 도입을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핵개발을 감시하기 위해 주한 미대사관에 과학관을 파견키로 했다. 캐나다에서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려는 계획도 취소됐다. 그러나 박정희는 핵개발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군사원조 중단 통고
76년 1월말 미국의 엄중한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재처리사업은 '화학처리 대체사업' (일명핵연료 국산화사업)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연구용 원자로는 자체 개발키로 결정됐다. 대체사업 전담기구도 76년12월 핵연료개발공단으로 탈바꿈했다. 공단의 초대 소장엔 특수사업담당부서 책임자 주재양 (朱載陽.64.재미) 박사가 임명됐다. 원자력연구소에서 특수사업담당부서만 따로 떼어내 핵연료개발공단을 만든
셈이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대덕 (대전시)에 개발공단을 세우려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체사업은 우라늄 정련 (精鍊).전환시설, 핵연료가공시설, 조사 (照射) 후 시험시설, 방사성 폐기물 처리시설등을 들여와 재처리의 핵심시설을 갖추려는 것이었다. 일종의 짜깁기식으로 재처리시설을 확보하자는 계획이었다.
당시 핵연료개발공단 개발제2연구부장으로 실무책임을 맡았던 김철 (金哲.59.아주대 대학원장) 박사의 증언.
"무엇을 어떻게 사야 할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요. 각 시설에 필요한 품목들을 겨우 알아내 기기 (器機) 들을 따로 구입, 조립해보니 서로 규격이 맞지 않아 난처했던 경우가많았습니다. 미국은 특히 재처리의 핵심 부분과 비슷한 조사후 시험시설과 방사성 폐기물
처리시설 도입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일일이 간섭했어요. "


 

美관리 수시로 공단방문
미국의 감시는 집요했다. 공단 관계자들이 국내에 매장된 우라늄을 캐내 핵연료로 가공하는 것이 대체사업이라고 둘러댔지만 미국측은 믿지 않았다. 주한 미대사관에 파견된 로버트 스텔러라는 과학관은 대체사업의 내용을 알아내려고 불시에 개발공단을 찾아오곤 했다.


金박사의 계속되는 증언.
"이 친구는 미중앙정보국 (CIA) 요원으로서 원자력 관계 훈련을 받고 한국에 파견됐어요. 사전에 전화도 없이 불시에 달려오곤 했어요. 승용차에 성조기를 펄럭이며 나타날 때는 정말 위세등등했습니다. 소장 방에 들러 인사하는 법도 없었어요. 아무 방이나 '문 열라' 고 하고 시설 측정도 제멋대로 했어요. 화가 나 여자 화장실 문을 열어 조사하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위상인가 싶어 서글픈 생각도 들고, 자존심이 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
각종 시설들을 제공하는 프랑스측에도 핵개발 사실을 숨겨야 했다. 그러자니 핵심 기기들에 대한 설계를 요청할 때마다 프랑스측과 자주 승강이를 벌여야 했다.
대체사업의 핵심시설인 조사후 시험시설의 도입 책임을 맡았던 박원구 (朴元玖.65.인하대 금속공학과 교수) 공단 핵연료개발부장의 증언.
"조사후 시험시설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핫셀 (방사능 차폐시설) 이에요. 강도가 센 콘크리트로 핫셀의 두께를 1m로 하면 고준위 방사능을 차폐시킬 수 있어 재처리시설로 쓸 수 있었어요. 프랑스 회사 상고방이 눈치채고 핫셀의 두께를 80㎝ 이하로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
하더군요. 그래서 보통 콘크리트 1m로 설계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실제로 건설할 때는 강도가 센 콘크리트를 쓸 작정이었지요. "


한편 연구용 원자로 (NRX) 개발사업은 김동훈 (金東勳.66.전 다목적연구로사업단장) 박사가 이끄는 원자력연구소 장치개발부가 맡았다. 이 사업 역시 미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사업명칭을 처음엔 'TFTF (열중성자 시험시설)' 사업으로 위장했다가 나중엔 '기기장치 개발사업' 으로 바꿨다.

 

그의 증언.
"약 30명이 이 사업에 참여했어요. 지원이 필요할 때는 원자력연구소 각 부서에 부문별로 프로젝트를 맡겨 해결하곤 했습니다. 설계.기술자료등은 73년부터 캐나다와 연구용 원자로 도입 교섭을 벌일 때 이미 상당수 확보한 상태였지요. 또 대만 (臺灣)에서 많은 자료들을 얻어오기도 했지요. "
이번에 취재팀이 단독 입수한 '원자력이용개발 제4차 5개년계획' (과기처.78년2월) 과 한국 핵연료개발공단의 '사업계획서 (77~80년)' 등 관련자료들에 따르면 대체사업은 당초 81년까지 완료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방해와 프랑스로부터의 시설 도입이 늦어지면서 83년으로 목표가 수정됐다.


또 윤용구 원자력연구소장이 77년2월 원자력위원회에 제출한 '원자력연구개발 기본방안' 에 따르면 '기기장치 개발사업' 은 78년까지 설계를 끝내고 79~81년엔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하는 것으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 김동훈 박사는 "朴대통령이 사망한 79년 10월엔 설계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 며 "연구로 개발사업은 계획보다 약간 늦어지긴 했지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고 말했다.
78년 10월 핵연료가공시설이 준공됐다. 이날 핵연료개발공단에 이르는 비포장도로에 뽀얀먼지를 일으키며 검은 세단 20여대가 갑자기 나타났다. 朴대통령 일행이었다.

윤석호 (尹錫昊.68.전 충남대 교수) 개발공단 건설본부장은 "朴대통령이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며 "과학자들의 손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격려했다" 고 말했다. 79년 5월에는 우라늄 정련.전환공장 기공식이 거행됐다.


대체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되자 미국측은 긴장했다. 윤용구박사는 "이 무렵 미국측은 우리가 대체사업을 통해 핵개발을 계속해온 것을 알아차린 것같다" 고 말했다. 박정희가 살아 있었다면 85년께엔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었다는게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그해 10월 박정희는 핵심 측근 김재규 (金載圭.사형.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제거됐다.
박정희의 죽음 뒤에 미국이 있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돈 것은 핵개발을 둘러싼 미국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10·26 美 관련說 꼬리물어
79년 12.12 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全斗煥.66) 정권은 핵개발을 포기했다. 신군부는 81년 1월 핵연료개발공단을 원자력연구소와 통합,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핵개발에 관한 연구는 물론 원자력이란 용어조차 사용치 못하게 했다.
과학자들은 폐기물처리시설 부지 선정등 '허드렛일' 로 내몰렸고 핵심 관계자들은 쫓겨났다.


미국으로부터 쿠데타의 정당성을 추인받기 위한 조치였다. 91년 11월 노태우 (盧泰愚.65) 대통령은 "핵연료 재처리시설과 핵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 는 '한반도 비핵화선언' 을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핵주권마저 포기했다.


일본이 67년 핵의 제조.보유.반입 금지라는 '비핵 3원칙' 을 선언하는 대가로 농축과 재처리 시설, 대량의 플루토늄까지 소유할 수 있게 된 반면 아무 대가도 없는 우리의 핵주권 포기는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핵무기 보유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을 수 있다.
박정희는 핵개발 사실을 미국측에 흘림으로써 주한미군의 완전철수를 막는등 유용한 대미 (對美) 협상카드로 활용한 것만은 틀림없다. 아무튼 박정희의 죽음으로 핵무기 보유는 미완의 사업으로 역사 속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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