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핵개발 보류
73년 3월 주재양 (朱載陽.64.재미) 박사가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에 취임, 새로 생겨난 특수사업 담당 부서의 책임을 맡으면서 핵개발은 본격화된다.
이 부서가 바로 핵개발 전담부서였다. 朱박사는 서울대 화공과 재학중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공대 (MIT)에서 화공학 분야로 석.박사학위를 받은 핵연료 분야의 국제적 권위자였다.
그를 데려온 사람은 최형섭 (崔亨燮.77.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 과학기술처장관이었다.
朱박사는 취임 두달여만인 73년 5월23일에서 7월12일까지 50일동안 해외에 있는 핵과학자유치를 위해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했다.
朱박사는 미 육군 내틱연구소에서 일하던 김철 (金哲.59.아주대 대학원장) 박사등 10여명의 과학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최형섭 (핵개발 진두지휘) - 주재양 (실무총괄) - 김철 (재처리사업 책임) 로 이어지는 핵개발팀의 핵심 진용이 갖춰진 것이다.
최형섭씨는 박정희 (朴正熙)가 핵개발을 염두에 두기 시작한 71년 6월 과기처장관에 임명됐다. 그는 취임 즉시 원자력개발 15년계획을 수립, 본격적인 핵개발에 착수했다. 朴대통령이7년반이나 그를 과기처장관에 머무르게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유치 과학자중 영구 귀국자에게는 가족을 포함한 귀국 항공료와 주택이 제공됐고, 일시 귀국자에게는 왕복 항공료와 체재비가 지원됐다.
급여도 사립대 최고 수준보다 30% 정도 많았다. 특수사업 담당부서에서 일하던 과학자들은 극비로 핵개발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의욕이 넘쳤다. 이 부서 선임연구원이었던 서인석(徐引錫.60.원자력연구소 연수원장) 박사의 증언.
"총인원 2백명중 과학자가 절반 정도 됐죠. 모두 열정에 넘쳤고 보람을 느꼈어요. 기술협력 대상국이 프랑스였기 때문에 뒤늦게 프랑스어를 배운다고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한 기억이생생합니다. "
과학자 100여명 布陣
정부가 프랑스와 손잡으려 한 것은 프랑스가 미국등 다른 원자력 수출국들과 달리 파키스탄.이라크등 핵개발 의지가 있는 제3세계 국가들에 기꺼이 핵개발 기술을 제공하려고 했기때문이다. 최형섭 장관은 72년 5월 프랑스를 방문, 프랑수아 오르톨리 산업기술개발성 장관으로부터 재처리기술등을 제공받기로 확답을 받았다.
72년 10월부터 원자력연구소와 프랑스 원자력위원회 (CEA) 간에 활발한 실무 접촉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재처리시설의 협력선으로는 CEA산하 용역회사인 상고방이, 핵연료가공시설 협력회사로는 서커가 선정됐다. 협상이 진행중이던 74년 2월 주 (駐) 프랑스대사로 발령을 받은 윤석헌 (尹錫憲.75.정민재단 이사장) 씨는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朴대통령으로부터 특별지시를 받았다.
" '尹대사, 지금 프랑스측과 재처리시설 도입에 관한 협상을 벌이고 있어요. 각별히 노력해 주시오' 하고 당부합디다. 朴대통령이 재처리사업에 강한 집념을 갖고 있는 것을 대번에 느낄 수 있었어요. " 그러나 프랑스측과의 협상은 세부적인 기술 이전문제에 들어가자 난항에 부닥쳤다.
재처리시설을 들여오려면 개념설계.기본설계.상세설계를 거쳐야 하는데 핵원료 종류와 각종 제품의 규격등 가장 기초적인 사항들을 결정하는 개념설계 단계에서부터 양측이 커다란 입장 차이를 보였다. 상고방사와 실무협상을 벌인 김철 박사의 증언.
"그때 제 협상창구는 지로라는 인물이었어요.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이 친구와 엄청나게 입씨름을 했어요. 그는 플루토늄의 불순물 함량이 0.01만 되면 쓸만하다고 주장하더라고요.
나는 0.005는 돼야 한다고 고집했습니다. 물론 순도가 높은 플루토늄을 얻으려면 장치비.운전비등 비용이 더 들어가지만 어떻게든 고도의 기술을 뽑아내려고 끝까지 우겼습니다. "
양측 실무자가 끝내 타협을 보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선 윤용구 (尹容九.69.동원공전 학장)원자력연구소장과 상고방사의 포앙세 사장이 직접 나서 타결했다고 한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원자력연구소와 상고방사는 75년 4월 '재처리연구시설 공급및 기술용역시설 도입계약' 을 했다. 75년 1월에는 서커사와 '핵연료 성형가공 시험시설 도입계약' 을 끝마쳤다. 이때 상고방사와는 4천6백만달러, 서커사와는 2백60만달러의 차관 도입계약을 각각 체결했다.
이스라엘 중개업자 주선
한편 재처리에 필요한 '사용후 핵연료' 를 얻기 위해 연구용 원자로 (NRX) 를 도입하려는 협상이 캐나다와 별도로 진행됐다.
73년 4월 존 그레이 캐나다 원자력공사 (AECL) 사장이 방한, 월성 2호기 원전을 캐나다형 중수로 (캔두) 로 할 경우 연구용 원자로를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개발독재시대에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따낸 이스라엘의 중개업자 사울 아이젠버그가 개입됐다. 그는 박정희의 핵개발 야심을 읽고 3만㎾ 연구용 원자로를 미끼로 제시한 것이다.
주재양 박사가 대표로 나서 캐나다측과의 협상은 원활히 진행돼 75년 중반에는 거의 성사단계에 이르렀다. 재처리시설과 연구용 원자로만 있으면 핵폭탄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얻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핵개발은 다시 커다란 암초에 부닥쳤다. 74년 5월 인도 지하핵실험 이후 개발도상국의 핵개발 여부를 알아내려고 촉각을 곤두세운 미국 정보망에 걸려든 것이다. 미국은 박정희의 핵개발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먼저 朴대통령과 최형섭 장관의 발언에서 미국은 핵개발의 단서를 읽었다.
베트남이 패망한 직후인 75년 6월 朴대통령은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와의 회견에서 "한국이 미국의 핵우산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핵무기 개발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겠다" 고 말했다. 그 다음날 코리아 타임스는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 는 崔장관의 발언을 보도했다. 이같은 발언들은 미국의 의혹과 경계심을 충분히 불러일으킬 만했다.
윤용구박사는 "프랑스로부터 재처리시설 도입과 관련, 국제원자력기구 (IAEA).한국.프랑스 3자간에 안전조치 협정문제를 체결하는 교섭이 75년 5월부터 시작됐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에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됐다" 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주장들이 있다.
김철 박사의 증언.
"75년 중반 이후로 기억합니다. 청와대에서 朴대통령과 몇몇 국회의원, 그리고 주한미대사가 참석한 만찬 모임이 있었다고 해요. 이때 우리 국회의원 한 사람이 주한 미대사에게 '우리가 지금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데 알고 있느냐' 며 자랑스럽게 얘기하더라는 거예요. 대사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고 합디다. "
당시 프랑스 주재 경제담당공사로 재처리시설 도입 계약과정에 관여했던 이희일 (李熺逸.66.전 농수산부장관) 씨는 그 무렵 프랑스 외무부의 한 과장에게 들은 얘기라며 새로운사실을 공개했다. 그의 증언.
"75년 가을 유엔총회가 개막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어요. 우리나라 주재 프랑스대사였던 피에르 랑디의 이임 리셉션이 서울의 한 호텔에서 성대히 치러졌다고 해요. 이때 우리 기업인이 랑디 대사에게 '정말 고맙다. 당신네 덕분에 우리도 이제 원자탄을 갖게 됐다' 고 말했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대사가 깜짝 놀라며 '그게 무슨 소리냐' 고 되물었다고 그래요. 그 기업인이 '당신네가 재처리시설을 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
기업인·議員 떠벌려 곤혹
그날 밤 랑디 대사는 본국에 한국에 대한 재처리시설 제공을 재검토하라는 보고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취재에서 미국의 공식적인 압력은 75년 8월 하순께부터 시작됐음이 확인 됐다.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가 핵개발을 포기시키기 위해 최형섭 장관을 처음 방문한 것은 8월23일. 그는 국제정치 불안을 이유로 내세워 핵개발 포기를 요구했다고 한다.
崔장관의 증언.
"이날 스나이더 대사가 나를 찾아와 '재처리시설을 도입하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다시 생각해 줄 수 없느냐' 고 묻더군요. 내가 그 이유를 물었죠. 그랬더니 '재처리를 하면 원폭을 만든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소련이 북한에 원폭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는 거예요. 내가 막무가내로 반대했어요. "
핵폭탄 설계 연구책임자였던 Q씨는 "75년 8월25~28일 제임스 슐레진저 미 국무장관이 방한했을 때 朴대통령을 압박, 핵무기 포기 각서를 받아간 것으로 알고 있다" 고 말했다. 미국은 주한미군 완전철수 압력과 함께 상업.재정차관 제공을 중단했다. 76년 1월 미국은 최후 통고를 하기 위해 국무부 관리를 파견했다. 박정희는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 전략으로미국의 예봉을 교묘히 비켜가는 전략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