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지한파
한.일관계는 61년 6월초 박정희 (朴正熙) 의 문경보통학교 제자 전세호 (錢世鎬.당시 재일 한국학생동맹위원장) 란 인물의 등장으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그는 "혁명과업을 돕기 위해 일본서 왔으니 朴장군을 만나게 해달라" 고 요구하다 경찰에 붙잡혀 김종필 (金鍾泌.JP) 의 중앙정보부에 넘겨졌다.
JP로부터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제자중에 그런 녀석이 있었던 것같다' 고 떠올린 뒤 錢씨가 제안한 '유태하 (柳泰夏) 귀국작전' 을 즉각 착수하라고 지시했다.
柳씨는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 시절 주일대표부 대사를 역임한 인물. 그는 임진왜란 때의 재상 서애 (西厓) 유성룡 (柳成龍) 의 후손으로 李대통령의 신임아래 한.일간 무역에 끼어들어 치부한 것으로 소문나 있었다.
박정희는 錢씨의 제안에 여러모로 구미가 당겼다. 첫째, 이승만정권 아래에서 부패의 상징이었고 민주당 정권에서도 속수무책이었던 인물을 귀국시켜 '뭔가 다르다' 는 것을 보여줄수 있다는 점.
둘째, 달러 부족으로 외교관들도 가족없이 단신 부임해야 했던 시절에 유태하가 가지고 있다는 적지않은 외화를 압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여기에 유태하가 확보하고 있는 인맥을 한.일 국교정상화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등이었다.
JP의 측근인 최영택 (崔榮澤.69.육사 8기) 중앙정보부 5국장이 錢씨와 함께 5.16 한달 뒤인61년 6월 중순 일본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국가재건최고회의 소속 공무원으로 위장한 錢씨가 공항에서 불법 입국자로 붙잡혔다. 崔국장은 당시 권일 (權逸) 재일 거류민단장에게 부탁, 일본 출입국 관리에게 로비해 錢씨를 빼내야 했다.
權단장을 통해 재일교포 야쿠자의 대부격으로 '긴자 (銀座) 의 호랑이' 로 불리던 마치이 히사유키 (町井久之.한국명 鄭建永) 를 소개받았다. 도쿄 (東京) 중심가 긴자의 한 음식점에서 마치이와 만난 崔국장은 "혁명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며 단도직입적으로 협력을 요청했다.
"물론 협력해야죠. 저도 이곳에서 반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
반공·우익세력이 타깃
당시 마치이는 도쿄의 중심가 긴자에서 양복점과 한국음식점.나이트클럽등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실 마치이 정도의 야쿠자는 사업가나 마찬가지다. 그는 나중에 한국의 박종규 (朴鐘圭) 대통령 경호실장을 업고 각종 이권에 끼어들어 거부 (巨富)가 되는 동시에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 (山口) 조의 동생뻘 조직인 도세이카이 (東顚會) 의 보스가 된다.
야쿠자는 보수우익이다. 마치이는 5.16 지지발언과 함께 역도산 (力道山) 의 예를 들며 자신의 우익활동을 자랑했다. 역도산은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프로 레슬링계의 스타로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역도산은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북한에 딸이 있어요. 그 딸이 역도산에게 북한을 방문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와 역도산이 북한에 가려고 했죠. 그래서 제가 '북한에 가면 죽이겠다' 며못가게 막았습니다."
그러나 반공.우익 이전에 마치이는 야쿠자다. 쿠데타에 성공하자마자 폭력배 소탕에 나섰던 혁명 주체세력이 만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崔국장에게 마치이의 도움은 불가피했다. 4.19후 민주당정부의 소환명령에 불응한 柳씨의 망명생활은 마치이가 뒤를 봐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崔국장의 부탁을 받은 마치이는 직접 柳씨를 설득, 며칠 뒤 柳씨가 崔국장 일행을 초대토록만들었다. 柳씨는 "결심이 섰다" 며 신분보장만 문서로 해달라고 요구했다. 당장 최고회의에서 '귀국을 환영한다' 는 전문이 날아왔다.
그런데 서울에서 柳씨를 마중나온 사람은 이병희 (李秉禧.육사 8기.작고) 중정 서울지부장이었고, 그가 도착한 곳은 중정 조사실이었다. 조사결과 돈은 로비활동에 소진된 것으로 처리됐고, 柳씨가 구축한 일본인맥 리스트만 혁명주체들에게 넘겨졌다. 이 인연으로 崔국장은 JP의 일본창구가 된다.
JP로부터 "참사관으로 부임해 한.일회담을 준비하라" 는 지시를 받은 것이 6월말. 한달간의 부임준비를 마치고 출국하는 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불렀다.
"혁명과업의 제1목표는 경제발전이야. 미국 원조만으로는 요원해. 일본 돈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해야 하니까 한.일회담 타결에 최선을 다해주시오. "
당시 崔씨가 비장해 간 지한파 (知韓派) 리스트는 50년대말 총리를 지낸 거물 정치인 기시노부스케 (岸信介) 로 시작된다. 기시라는 동전의 뒷면엔 야쓰기 가즈오 (矢次一夫) 라는 불가사의한 인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을 알기 위해서는 일본사회의 2중 구조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흔히 일본인들은 앞에 내세우는 겉모습 (建前.다테마에) 과 감추는 속마음 (本音.혼네) 이 따로 있다고 한다.
일본정계 역시 이런 막전막후의 2중 구조로 이뤄져 있다. 공직에는 나선 적이 없는 야인(野人) 야쓰기는 초등학교 학력이면서도 일본 우익의 싱크탱크인 국책연구회를 만들어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막후 인물. 야쓰기 같은 인물은 기시 같은 양지의 정치인들이 나서기 껄끄러운 음지의 역할을 대신하기에 검은 막후, 흑막 (黑幕) 으로 불린다.
또 이같은 막후의 인물 밑에는 행동대원격인 야쿠자 세력이 제3의 층 (層) 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정계 특유의 3중 구조. 이들을 연결하는 이데올로기는 보수.우익.민족주의며, 현실적 고리는 물론 돈이다. 이런 구조 아래서 기시에게 접근하는 지름길은 야쓰기였다.
당연히 다시 일본을 찾은 崔참사관은 먼저 야쓰기를 만났다. 야쓰기는 유태하를 기시에게 소개한 장본인이었다. 야쓰기의 발언.
"공산주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서도 일본과 한국은 손잡아야 합니다. 국교를 정상화하고 일본은 한국을 지원해 튼튼한 나라를 만드는 데 일조해야 합니다."
일본 우익들이 주장하는 '부산 (釜山) 적기론 (赤旗論)' 이었다. 한국이 공산화돼 부산까지 붉은 공산당기가 나부끼면 일본도 적화위협을 받게 된다는 논리다. 일본 우익들이 당시 한.일경협 반대론자들을 설득하던 논리이기도 하다. 그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주십시오"
라며 협력을 자원했다.
崔참사관은 야쓰기에게 "기시를 만나게 해달라" 고 요청했고, 얼마 뒤 약속시간과 장소가 통보돼 왔다.
아카사카 (赤坂) 뉴재팬호텔, 호텔방을 개조해 만든 기시의 개인사무실에 崔참사관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60대의 노인 기시가 30대 崔참사관에게 일본식 큰절을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순조로운 대화의 길은 이미 트여 있었던 것이다. 유태하씨가 닦아놓은 인맥을 되짚어가며 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심복 崔참사관으로부터 순탄한 진행상황을 보고받고 있던 JP는 61년 10월초 朴의장이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외유일정이 잡히자 朴의장을 찾아갔다. "각하, 미국 가시는 길에 일본에 들렀다 가시지요. "
"아니, 이웃집 마실가는 거야? 저쪽에서 아무 반응도 없는데. "
"만들어야지요. "
JP, 日총리와 90분 담판
61년 10월24일 JP는 비밀리에 일본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崔참사관과 함께 이케다하야토 (池田勇人) 총리를 찾았다. 앞서 崔참사관이 방문의사를 통보했을 때 총리실에서는 '30분밖에 시간이 없다' 고 했다.
그러나 이날 회담은 1시간30분이나 계속됐다. JP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한.일회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혈기로 덤비는 혁명주체와 달리 일본의 노정객은 흔히 엉뚱한 얘기로 템포를 조절하곤 한다.
JP는 독서량이 많은 문학청년이었으며 지금도 일본책을 많이 읽는다. 심각하던 대화는 엉뚱하게도 일본의 대하역사소설 '대망 (大望)' 의 세 주인공 얘기가 나오면서 부드럽게 풀려나갔다.
전쟁의 달인으로 전국을 제패한 용장 (勇將)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 그를 이어 일본을 통일하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지장 (智將)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 다시 그 뒤를 이어 바쿠후 (幕府) 시대를 연 덕장 (德將)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한참 영웅과 역사를 얘기하다 이케다와 JP는 "그중에서도 도쿠가와가 최고" 라는데 뜻을 같이 했다.
그러자 이케다가 결론을 내렸다.
"이런 식으로 의견이 일치되면 한.일회담도 잘 될 것입니다."
그로부터 19일 뒤 朴의장은 일본을 방문했고, 메이지 (明治) 유신의 지사 같은 태도로 일본 정계 거물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일 국교정상화의 길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파벌로 나눠진 일본정계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반한파 (反韓派) 도 움직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