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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밉지만 배울건 배우자
5.16 직후의 일본은 지금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될 정도로 우리에겐 깊은 심연의 '가깝고도먼 나라' 였다. 짙게 깔린 반일감정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가로막고 있었으나 5.16 주체들로선 권력 유지와 '혁명공약' 인 경제개발을 위해 돈줄인 일본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일본을 돈줄로 생각한 것은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후 세계사의 주역으로 부상한 미국은 동북아를 일본 중심으로 재편하려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식민지시대 배상금 (자기들은 보상금이라 불렀지만) 지불을 통한 국교정상화의 방법을 택했다.
더구나 박정희 (朴正熙) 는 일제시대 가장 일본식 교육에 철저했던 사범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 그런 탓이었던지 그는 일본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일본을 경제발전 모델로 삼았다. 당연히 박정희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일본통답게 효율적으로 일본과 일본인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쿠데타 6개월만인 61년 11월 최초의 외국 방문지로 일본을 찾았다. 11월11일 朴의장 일행이 일본에 도착한 후 첫 행사인 총리관저의 환영 만찬장. 한.일 양국의 정상급들이 마주보고 앉은 긴 테이블 끝에 조용히 앉아 있는 노인이 있었다.
朴의장의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이었던 나구모 (南雲) 씨. '일본측이 스승의 나라라는 인상을 주어 박정희의 기세를 꺾기 위해 데려다 놓았다' 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정반대다.
당시 주일대표부 참사관이었던 최영택 (崔榮澤.69.육사 8기) 씨의 증언. "朴의장의 방일 직전 군관학교 교장을 모시라는 특명이 떨어졌습니다. 일본 외무성에서는 '좋은 생각' 이라며 적극적으로 나와 시골에 칩거중인 나구모 교장을 찾아 모셨습니다. "
만찬은 축배로 시작됐다.
공식 축배가 끝나자마자 朴의장은 갑자기 술병을 들고 일어났다. 박정희의 돌출행동으로 좌중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둥그레진 눈들이 그를 따라갔다.
朴의장은 좌석 끝머리의 노인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가서는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 술을 따랐다. 그리고 유창한 일본어. 이승만정권 아래에서는 외교관이 일본말을 썼다고 대통령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었는데, 한국의 최고 권력자가 공식만찬에서 일본말을 서슴없이 뱉은 것이다.

공식석상서 일본말 사용
"교장선생님, 건강하십니까. 제가 일본정부의 초대를 받아 회담하러 왔는데 옛 은사를 잊을 수 없어 모셨습니다." 순간 엄숙하던 만찬장에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물론 일본측에서 먼저터져나온 박수다.
더 놀라운 것은 교장의 대답.
"朴장군이 그동안 가끔 인삼을 보내주어 보시다시피 이렇게 건강합니다."
朴의장은 일본이 쫓겨간 뒤에도 일본의 은사에게 선물을 보내고 있었다는 얘기다. 감동의 물결속에 이케다 하야토 (池田勇人) 총리가 한마디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사은 (師恩) 의 미덕을 안다는 것은 우리 동양의 미덕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한번 동양 미덕의 체득자이신 박정희선생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일본통 朴의장은 사무라이 나라 일본에서 가장 중시되는 신의 (信義) 를 직접 보여줌으로써 사무라이의 후손들을 감격케 한 것이다. 박정희의 일본 다루기가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朴의장의 감격 행보는 이어진다.
일본 체류중 가장 중요한 일정인 다음날 일본 자민당 간부들과의 오찬. 일본 막후정치의 실세들이 모인 자리이기에 공식적인 만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朴의장은 도쿄 (東京) 중심가 아카사카 (赤坂) 의 요정 가와사키 (川崎)에 도착하자 참석자들에게 일본식으로 큰절을 했다.
다시 일본말. "잘 부탁드립니다. 저에겐 젊다는 것 외에 별다른 자산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저를 잘 지도.편달해주시기 바랍니다." 朴의장은 외교관례화된 서양식 예법 대신 일본식 예법을 통해 일본인들이 의 (義) 와 함께 중시하는 예 (禮) 를 보여준 것이다.
이같은 朴의장의 태도에 일본인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일본인의 입을 빌려 확인해보자.
일본 정계 원로 이시이 미쓰지로 (石井光次郎) 는 몇년 뒤 이동원 (李東元.71.국민회의 의원) 당시 외무장관에게 그때의 느낌을 털어놓았다.
"몇가지에 놀랐습니다. 첫째는 인상인데, 쿠데타의 주인공이라 무섭게 생긴줄 알았는데 선글라스만 썼지 키도 작고 평범하게 생겼더군요. 둘째는 언변인데, 군인답지 않게 차분하고 논리적이더군요. 셋째로 성품인데, 겸손하고 솔직하더군요. 메이지 (明治) 시대 지사들이 그랬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일본인이 내린 결론, '메이지 지사' 는 극찬이다. 일본의 봉건막부를 무너뜨리고 근대일본을 만든 주인공에 비유한 것이다. 박정희의장이 생각한 근대화의 모델이기도 하다. 묘한 상응(相應) 이 아닐 수 없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를 '쿠사레엥 (腐緣)' 이라고 불렀다. 과거 식민지시대의 좋은 인연이 썩어 불편한 관계가 됐다는 얘기다.
"군인답지않게 논리적 그래서 일본은 한국에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가장 먼저 박정희가 어떤 사람인지,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대상으로 좋은 인물인지를 알아보느라 분주했다.
그 결과 朴의장이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데 한숨 돌리면서도 좌익 연루설에 일말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무렵 朴의장이 직접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朴의장의 태도에서 기대 이상의 동질감을 느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좌익 연루설과 관련해선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시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의 좌익바람은 심각했다. 그래서 가와사키 모임에 참석했던 이시이는 朴의장의 인사가 끝나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朴의장께서는 어떤 통치철학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
"…아무 것도 모르고 경험조차 없는 우리는 다만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재건하려는 의욕만 왕성합니다. 마치 일본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젊은 지사들과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가지고 그분들을 본받아 가난에서 벗어나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가려는 것입니다."
朴의장은 아예 '메이지유신의 지사를 본받아' 라고 못박았다. 그 자리에 있던 일본 정계 원로들이 얼마나 흐뭇하게 생각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해프닝은 그로부터 2년 뒤 한 망언 (妄言) 으로 나타난다. 朴의장의 이같은 적극적인 일본관은 이후 여러모로 확인된다.

李전장관의 기억.
"朴대통령은 '서양문물을 갓 도입한 일본이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해군을 쳐부순 얘기를 하면서 아시아중에서 서양을 이긴 것은 일본뿐' 이라는 얘기를 자주 했습니다. 서양의문물을 배워 서양을 이긴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朴대통령은 '일본 배우기' 에 그치지 않았다. 60년대 중반 어느날 대통령 집무실로 올라온 李장관을 경호실장 방으로 인도한 박정희는 경호실장 방에 도착하자 이번엔 "옆방으로 가보자" 며 이끌었다.
브리핑용으로 만든 작은 방의 사방 벽에는 잔뜩 그래프가 그려진 차트가 걸려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을 분야별로 비교한 것들이었다. 李장관이 "각하, 왜 하필 일본과 비교하십니까" 라고 묻자 박정희의 명료한 대답. "일본을 따라잡아야 돼. " 박정희는 그래프를 보면서연방 "됐어, 잘하는구만" 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한마디 덧붙였다.
"한국사람은 일본과 경쟁을 붙여야 해. 그래야 악착같이 달라붙어 본래 능력 이외의 알파(α)가 나오거든. "
박정희의 일본관이나 그 시대의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머리속에는 늘 일본을 배워 이겨야 한다는 극일 (克日) 의 투지가 숨어 있었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마치 일본이 서양을 배워 서양을 이긴 것처럼.

서양이긴 日 따라잡아야
그러나 맨손으로 일본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朴대통령은 쿠데타 직후 자신이 끌고가야 할 조국이 '도둑맞은 초가집' 처럼 가난함을 확인했다.
돈이 필요했다. 당시 정부 재정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그날 그날입에 풀칠할 수준의 생존비가 아니라 개발투자비였다. 그런데 朴대통령은 5.16 직후 각 부처로부터 현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가난만 확인한게 아니라 가난을 떨칠 수 있는 가능성도
포착했다.
그는 61년 5월31일 엄영달 (嚴永達.69.전 신민당의원) 외무부 아주과장을 불러 한.일관계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당시 배석했던 김종필 (金鍾泌.JP) 자민련 총재의 기억.
"브리핑의 결론은 '10년간 협상했지만 제자리' 라는 거였어요. '왜 안되느냐' 고 물었더니 '청구권 문제가 걸려 안된다' 는 겁니다. 아무도 제2의 이완용 (李完用) 이 되고 싶지 않아 하니
일이 풀릴 수가 없죠. 그래서 제가 나서게 된 겁니다."
한.일관계 정상화의 특명이 JP에게 떨어진 셈이다. 당시 JP는 명실상부한 2인자로 중앙정보부를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지금의 한국프레스센터 자리인 국회 별관 2층 사무실에서 정보부 법안 마무리에 바쁘던 그 무렵 일본에서 진객 (珍客) 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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