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경제적 극일 집착 '경공업으로 승부수'
박정희 (朴正熙)가 경제발전의 모델로 일본을 선택하고 일본으로부터 배우려 했던 궁극적 목적은 일본을 따라잡고 넘어서겠다는 '극일 (克日)' 의 야망 때문이었다. 그 야망의 첫 단추가 끼워진 것이 허허벌판인 울산 부곡동 일대 1백여만평 대지 위에 조성된 석유화학단지다.
68년 3월22일 합동 기공식장에서 박정희는 처음으로 일본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던졌다.
일본과 한판 승부를 벌여보겠다는 오기가 장내를 압도했다. "일본만 하더라도 12~13년 앞선 1955년에 비로소 석유화학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경제가 급격한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은 석유화학공업에 크게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석유한방울 안나는데…”
석유화학공업을 추진한 목적은 경공업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상공장관을 지냈던 박충훈 (朴忠勳.78.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씨와 김정렴 (金正濂.73.전대통령비서실장) 씨는 모두 석유화학공업 성공의 1등공신으로 오원철 (吳源哲.69.전청와대 경제2수석) 당시 공업1국장을 꼽았다. 석유화학공업의 육성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65년 1월. 상공부 연두순시때 오원철씨가 朴대통령에게 브리핑하는 자리에서였다.
"우리나라는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제품의 수출에 전력하고 있지만 원료는 전적으로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습니다. 고생은 우리가 하고 단물은 일본이 다 빼먹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일본에 예속돼 있는 상태입니다. 석유화학공업이 완성되면 원료에서 제품까지 모두 국산화할 수 있어 경공업 분야는 일본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습니다."
朴대통령은 뚫어지게 브리핑 자료를 보고 있었다. 무슨 중요한 결심을 할 때 나타나던 바로 그 자세였다.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다" 는 말이 그의 귓전에 맴돌았다. 吳국장의 등에서는 땀이 소나기처럼 흘러내렸다. 10여초쯤 지났을까. 朴대통령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상공장관, 석유화학 추진계획을 짜보시오. " 66년 3월 석유화학공업은 포항제철 건설사업과 함께 제2차 5개년계획의 핵심사업으로 선정됐다. 석유화학공업이란 석유나 천연가스를 원료로 합성수지.합성고무.합성섬유원료, 기타 화학제품등을 만들어내는 산업이다. 나일론.비료.농약.페인트.펄프.장난감.의약.합성세제.타이어등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각종 제품들이 여기서 만들어진다.
吳국장은 복잡한 석유화학계통도를 朴대통령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림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석유화학공장이 들어서기까지는 세차례의 고비를 넘어야 했다. 첫번째가 朴대통령 설득부분. 朴대통령은 석유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를 이용해 제품을 만든다는 사실을 찜찜해 했다.
66년 초가을 어느날 朴대통령은 전민제 (全民濟.75.全인터내셔널 사장) 당시 대한석유공사이사를 불러 브리핑을 들었다. 全씨는 62년 울산정유공장을 건설할 당시 실무 책임을 맡았던 인물. 全씨의 증언. "朴대통령께서 일일이 메모해가며 아주 진지하게 듣더군요. 브리핑을 마치자 대통령께서 '全이사, 석유화학공업을 한다고 기름을 마구 써도 되는거요' 하고 물으셨어요. " 全씨는 朴대통령의 걱정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全씨의 계속되는 증언. "2차대전중 일본은 '석유 한방울이 피 한방울' 이라고 떠들어댔거든요. 朴대통령께서도 일제시대 군대에서 이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자신있게 말씀드렸죠. 석유를 원료로 한 제품을 만들어 수출할 경우 생산가격에서 연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3%밖에 되지 않는다고요. 그제서야 朴대통령 얼굴이 밝아지데요. "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해소되자 朴대통령은 석유화학사업에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입지선정과 차관도입이 걸림돌로 등장했다. 이 때문에 사업추진 결정후 1년반동안 구체적인 진척이 없었다. 경제기획원과 상공부는 핵심사업인 나프타 분해공장의 입지선정 문제로 충돌했다.
상공부·기획원 힘겨루기
기획원은 용수 부족을 이유로 울산 대신 인천을 내세웠다. 공장을 가동할 때 자연소모되는 물의 양을 일정 부분 계속 보충해줘야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는데 보충수의 비율이 10%나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반면 상공부는 보충수의 비율이 3%면 충분하다고 반박했다. 기획원의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유니언 오일사의 인도네시아 산 (産) 기름 판매전략이 숨어 있었을 것이란 의혹이 있다.
마침내 朴대통령이 나섰다. 67년 10월1일 두 부처의 책임자들이 청와대로 불려왔다. 김희술(金熙述.62.전 대한도시가스협회 부회장) 당시 상공부
석유화학계장의 증언. "청와대 회의전날 저녁 이택순 (李鐸淳.64.한국제지공업연합회 부회장) 기사 (주사급)가 '일본의 화학경제' 라는 잡지에서 보충수의 비율이 3%면 충분하다는 글을 발견했어요. 기획원이 꼼짝없이 당했지요. " 회의 이틀후 朴대통령은 장기영 (張基榮.작고) 기획원장관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박충훈 상공장관을 임명했다.
상공장관에는 상공차관을 지낸 김정렴씨를 앉혔다. 석유화학공업 추진을 둘러싼 불협화음을 일거에 제거한 것이었다. 석유화학의 특성상 12개 관련 공장을 동시에 지어야 했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총 소요자금은 2억4천2백만달러. 그중 3분의2 정도를 차관으로 해결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당시 상공부 석유화학과장 김광모 (金光模.64.테크노서비스 사장) 씨는 차관도입의 어려움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국내 수요가 2만t인데 10만t짜리 공장을 지으려고 했죠. 계획서를 가지고 세계은행에 갔더니 수요도 없는데 새로 짓지 말고 외국에서 사서 쓰라는 거예요.
그나마 호의적인 외국회사들도 대부분 투자보장을 요구했지요. 그래서 내가 석유화학과장 명의로 투자보장을 해주는 월권 (越權) 행위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朴대통령은 이런 상황속에서도 사업추진 현황을 매월 보고하도록 다그쳤다. 상공부 관계자들은 초조감에 휩싸였다.
오원철씨의 증언.
"朴부총리와 金장관은 나만 보면 어떻게 돼가느냐고 물어요. 두분이 청와대 보고차 올라갈때마다 으레 朴대통령이 석유화학의 추진상황을 물어보니 나를 재촉할 수밖에요. " 吳국장은 석유화학공장 합동기공식 직후인 68년 4월초 가방 하나만 덜렁 들고 혼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합작선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천신만고 끝에 다우 케미컬.스켈리 오일.걸프등 굴지의 회사들을 합작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吳국장은 귀국 즉시 朴부총리와 함께 청와대에 올라갔다. 朴대통령의 기쁨은 대단했다.
"다우 케미컬같은 미국의 큰 회사가 우리나라에 진출하는 것은 미군 1개 사단이 주둔하는것과 맞먹는 효과가 있다. 미국 국회나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
설득끝 美회사와 합작
경제는 안보의 버팀목이고, 안보는 경제의 안전판이라는 朴대통령의 경제관.안보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장애는 그 후에 나타났다. 국산제품에 대한 불신과 일본의 반격이 그것이다. 타이어업계는 도로주행시험에 6개월 이상이 걸린다는 구실로 국산 합성고무 사용을 기피했다. 이 문제는 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국제적인 합성고무 부족 상태가 되자 서로 가져가려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이택순씨의 증언. "모 타이어회사 사장이 국산 합성고무를 달라고 야단이기에 '아직 도로주행시험도 안끝났는데 왜 달라고 그러느냐' 고 핀잔을 줬더니 '그래서 장사꾼이라고 하는 것아니냐' 고 넉살좋게 받기에 껄껄 웃고만 적이 있습니다." 71년 6월 합판접착제의 원료인 메탄올 공장이 준공돼 그 다음달부터 정상 가동되자 주공급선이던 일본은 t당 가격을 60~70달러에서 30달러로 낮춰 덤핑공세를 취했다. 국내업자들은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국산품을 사용하지 않았다.
일본의 역공세에 대한 朴대통령의 분노는 컸다. 이택순 당시 상공부 기사의 증언. "71년 9월께부터 朴대통령은 매달 한번씩 상공부에 지시각서를 내려보냈어요. 내용은 일본제 메탄올을 전면 수입금지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값싼 일본제 메탄올을 못쓰게 하느냐고 국내기업인들이 상공부에 몰려와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대통령의 지시각서만 보여줬지요. "
朴대통령은 반격의 칼날을 곧추 세웠다. 특유의 오기가 발동했다. 그로부터 1년여 뒤인 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선언과 함께 여천에 국제규모의 대단위 석유화학단지 건설에 착수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