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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산림녹화
미국의 한 하원의원이 지난 초여름 특별기로 북한을 방문한 후 바로 공해를 거쳐 한국땅에 진입하면서 "지옥에서 천당으로 들어왔군" 이라는 탄성을 발했다고 한다.
그가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쪽에서 상대적으로 훨씬 풍요로운 한국 영토로 들어왔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측면도 있지만 실은 남북한간의 천양지차인 산림녹화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산하는 온통 붉은 빛을 띤 반면 남한은 녹색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朴正熙)가 5.16을 일으킬 때만 하더라도 남북한 사정은 정반대였다.
한국의 산이 오늘의 북한처럼 벌거벗은 상태에서 푸른 옷을 입게 된 것도 불과 20년 안팎의 일이다.

통계로도 입증된다.

'84년 임업통계요람' 에 따르면 남한 전체 임목면적의 84%가 20년생 이하, 즉 나무 10그루중 8그루 이상이 박정희시대에 심어진 것이다.
그래서 유엔은 한국을 이스라엘과 함께 20세기의 대표적 녹화사업 성공국으로 꼽고 있다.
산림녹화에 대한 박정희의 의지는 64년 12월 서독 방문을 마치고 산림관계자들에게 한 오기어린 말 속에 배어 있다.
"산이 푸르게 변할 때까지 구라파 (유럽)에 안간다.
" 경제개발자금을 얻기 위해 잔뜩 기대를 걸었던 서독 방문에서 기대 이하의 차관을 약속받은 이유가 가장 컸지만 그는 이후 다시는 유럽을 방문하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 경제고문으로 서독 방문때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 (白永勳.67.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씨는 "朴대통령은 서독의 정돈된 농촌과 푸른 산을 보면서 '우리도 언제 저렇게 될 수 있겠느냐' 며 안타까워 했다" 고 회고한다.
그러나 집권초의 박정희는 산림녹화 의욕에 비해 지식과 경험이 못미쳤던 듯하다.
어쩌면 이 시기 그의 머리는 수출과 산업화등으로 가득 차 있어 산림녹화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는지 모른다.
박정희가 산림녹화에 다소 소홀했음을 인정하는 듯한 대목은 73년 1월16일 손수익 (孫守益.65.한국경제사회연구원 회장) 경기지사를 산림청장으로 임명하면서 던진 '당부의 말씀'에서 어렴풋이 확인된다.
"고속도로.공업화.새마을운동은 성과를 거뒀는데 치산녹화가 잘 안되고 있어. 임자가 맡아 치산녹화를 이룩해봐. " 孫청장은 5년8개월간 재임하면서 집무실 입구에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 라고 써붙여 놓고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 (73~82년) 을 진두지휘, 예정보다 4년 앞당겨 목표를 달성했다.
孫씨가 지난해 9월 산림청이 주최한 '치산녹화 현지순례' 에서 밝힌 회고담. "75년 朴대통령의 경기.경북 연두순시때 수원에서 대구까지 대통령 전용차에 동승했습니다.
가시는 동안 경부고속도로 양편을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1백50분동안 무려 50건, 3분마다 한건꼴로 지시했습니다.
받아적느라 손이 저릴 정도였지요. " 임도 (林道.산불진화나 병충해 방지작업등을 위해 만든산길) 를 횡으로 내도록 한 이른바 '추풍령식 조림' 도 "큰비가 올 때 한꺼번에 흘러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에서 볼 때 빽빽이 심어져 있는 것같아 보기에도 좋다" 는 박정희의 아이디어였다.
77년부터 11월 첫째 토요일이 육림일로 지정된 것 역시 그해 식목일 박정희가 "가을에는 자기가 심은 나무가 잘 자라는지 반드시 확인하라" 고 지시한데서 비롯됐다.
박정희의 산림보호 열성은 수천년 이어온 한우 (韓牛) 들의 식성까지 바꿔놓았다.
농림장관과 초대 농수산부장관을 지낸 김보현 (金甫炫.73.백제문화개발연구원장) 씨의 증언. "72년 여름 경제동향 보고회의때 朴대통령께서 '소에게 끓인 여물을 먹이느라 땔감이 많이 들어가니 생풀을 먹이는 방안을 강구해보라' 고 합디다.
실험결과 끓여주는 것 보다 영양가가 높게 나와요. 그때부터 전국적으로 소에게 생풀 먹이기 운동을 벌였지요. " 73년부터 벌어진 농가 아궁이 개량사업, 75년부터 나무와 수자원 보호를 위해 취해진 낙엽채취 금지령도 그의 지시였다.

연탄 사용을 장려한 것도 이즈음이다.
당시 건설부 국토계획국장 김의원 (金儀遠.66.경원대총장) 씨는 "무연탄 수송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朴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탄광에서 인근 철도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우선적으로 닦았다" 고 회고한다.
조림과 함께 진행된 사방사업은 당시 산림녹화의 핵심 사업이었다.
영일지구 사방사업은 박정희시대 가장 특기할 만한 국토 개조사업이다.
71년 9월17일 우수 새마을 시찰차 이곳을 지나던 박정희가 "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다 보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곳이 이곳" 이라며 완전 복구를 지시함에 따라 73년부터 막올린 이사업은 77년까지 총공사비 38억2천8백만원, 연인원 3백60만명이 투입돼 황폐지 4천5백38㏊를 녹지대로 탈바꿈시켰다.
소요 묘목만 2천4백만그루, 돌과 뗏장은 각 2백30만개. 박정희는 일에 대한 초인적 열정으로 주위를 사로잡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당시 경북도청 산림국장을 지낸 박상현 (朴商鉉.80) 옹의 증언. "75년 4월17일 그날은 폭풍우가 엄청나게 몰아쳤어요. 그런데 朴대통령께서 해병대 지프를 가져오게 해 현지로 가자는거예요. 영일군청에서 브리핑 장소까지 헬기로 2~3분이면 되는데 세시간이나 걸렸지요. 폭3m 미만의 비포장도로를 기어가다시피 하는 동안 김수학 (金壽鶴) 경북지사는 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쳐 피멍이 들고 난리인데도 굳이 현장을 보시겠다니…. "

 

朴대통령은 곡강초등학
교 앞을 지나다 주변 플라타너스 10여그루가 2~3m 높이로 잘려나간 것을 발견한다.
전봇대를 세우면서 전깃줄에 닿을 위험이 있다며 잘라버린 것이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金지사에게 "저거 누가 잘랐어? 20~30년 걸려야 저런 나무 하나 키워내는데 그래 3만원짜리 전봇대 때문에 그걸 잘라냈단 말이야. 당장 조치해 보고하시오" 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교장은 곧 직위해제됐다.
朴옹은 "그런 열성이 아니었던들 일제가 1907년부터 50차례나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을 성공시킬 수 있었겠느냐" 고 말한다.
화전 정리사업도 산림녹화에 한몫 했다.
74년부터 78년까지 5개년계획으로 펼쳐진 이 사업은 공비소탕작전 하듯 군용 헬기까지 동원, 강원.경북.충북등 깊은 산간지방에 흩어져 있던 30여만가구를 정리했다.
당시 강원도 철원.화천군 산림과장을 지낸 김금철 (金琴哲.61) 씨는 "화전부락에 들어갔다가 술취한 화전민이 낫을 들고 쫓아오는 바람에 혼비백산해 도망간 적도 있다" 고 회고했다.
전남 승주.경북 상주 등지에서 대형 산불이 잇따르자 78년 4월 '산불예방에 관한 대통령 특별담화문' 을 발표한 것 역시 박정희의 산림녹화 집념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산불담화문의 일부. '…산불을 낸 사람은 규모의 대소를 불문하고 구속토록 하는 동시에 산불이 발생한 지역의 군수등 각급 행정책임자를 엄중 문책할 것이며…. ' 이같은 집념이 빚은 에피소드 하나. 박정희는 78년 3월24일 제주도 순시중 "조랑말을 산림 순산 (巡山)에 활용할 방안을 강구하라" 는 지시를 내린다.
영농기계 보급으로 조랑말의 쓰임새가 줄어들자 산간지방의 묘목.비료등 자재 운반에 활용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산림청 녹화조림계장 김영달 (金永達.60.임업연구원장) 씨의 회고.
"조랑말 24마리를 마리당 약 40만원에 긴급 구입, 원주에 있는 군마 (軍馬)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게 한 뒤 '실전' 에 투입 (세마리는 훈련도중 죽음) 했지요. 그런데 배보다 배꼽이 더 커요. 사육하랴 병치레하랴 관리비가 이만저만 아니에요. 사육사한테는 고분고분하다 산림공무원이 타려고 하면 덤벼들어 제대로 활용도 못하고 결국 82년에 포기했지요. " 산림청 조연환 (曺連煥.49) 임정과장은 지난해 발생한 고성 산불을 예로 들며 "과거에는 진화작업중 인명피해가 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이제는 집단 이재민이 발생하는등 산불도 미국.캐나다처럼 선진국형으로 변했다" 고 말한다.
그러나 일부 육종전문가들은 녹화에 급급, 리기다소나무.아카시아.오리나무등 지질을 산성화하는 수종을 너무 많이 심었다고 비판한다.
오동나무 단지가 판로개척 부진으로 눈요기에 그친 사례등을 들어 녹화사업이 입체적이지 못했다고 토를 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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