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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한뼘 땅도 열외 불허 '그린벨트'
외국에선 "20세기 각국의 국토계획중 대표적 성공사례로 환경보전정책의 백미 (白眉)" 라는 극찬을 받고, 국내에선 "대도시 주민들의 숨쉴 공간을 마련했다" 는 얘기와 함께 '박정희 (朴正熙) 의 최대 걸작' 이란 평가를 받은 그린벨트. 이 그린벨트는 71년 7월30일 건설부 고시 제447호로 수도권 일부를 묶는 것을 시작으로 77년 4월18일 전남 여천 일부를 지정하기까지 전국토의 5.4%인 5천3백97.1평방㎞를 휘감은 뒤 단 한뼘도 줄어들지 않은채 오늘에 이르렀다.
대선.총선.개각.차기대선 불출마 선언등 정국이 숨가쁘게 돌아가던 71년 6월12일 오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그리고 金국장. " 노타이에 검정 양복차림의 박정희는 김의원 (金儀遠.66.경원대 총장) 건설부 국토계획종합담당관 (부국장) 을 힐끔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16절지에 그림을 그려가며 양택식 (梁鐸植) 서울시장.김태경 (金泰卿) 경기도지사.김용석(金容奭) 건설부 도로국장에게 도로 재정비 지시를 막 끝낸 참이었다.
"그린벨트란 거 있지, 그린벨트. " 영어로 'Green Belt' 라고 쓴 박정희는 자신이 금방 스케치한 수도권 도로망 외곽에 두줄로 띠를 두른 뒤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한번 빙 둘러쳐봐. 빨리 계획짜서 가져와. " 이것이 박정희의 그린벨트와 관련한 첫지시였다.
박정희의 그린벨트 구상을 누가 건의했는지는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린벨트는 행정.법률용어가 아닌 학술용어에 불과했다.
영국 런던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제도였다.
건설부 국토계획국장.도시국장등을 거치면서 박정희시대 그린벨트 업무를 주도했던 金씨는 "이한빈 (李漢彬) 전부총리.주원 (朱源) 전건설부장관등 알만한 사람들에게 물어봤으나 모른다고 했다" 고 말했다.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金正濂.73) 씨 역시 "주영 (駐英) 대사들로부터 그린벨트 얘기를 들으시고 관심을 보이신 적은 있다" 며 '박정희 아이디어' 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동훈 (董勳.63) 전통일원차관은 "69년말인가 70년초 청와대 정무비서관 시절 朴대통령으로부터 '수도권 인구억제 대책을 연구, 보고하라' 는 지시를 받고 그린벨트 제도 도입을 건의했다" 고 밝혔다.
그의 증언.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런던의 사례등을 참고해 비밀리에 만들었습니다.
미관과 환경등을 고려해 도시 주위에 녹지를 일정한 둘레로 돌리면 좋겠다는 착상이었지요.
그때 성남이 생겨나고 있었는데 서울과 성남 사이에 그린벨트를 설치해 격리함으로써 성남을 위성도시, 베드타운으로 만들자는 식이었습니다.
" 박정희의 반응은 한마디로 OK였다.
"그걸 보고한게 70년 가을입니다.
개발제한구역이란 말은 나중에 붙인 것이고 그냥 그린벨트라고 했지요. 朴대통령께서 '그린벨트, 그거 분명히 영어지' 하시면서 '욕 먹더라도 강력한 조치 한번 해보지' 라고 하데요.
" 급속한 도시화.공업화로 71년 7월 서울 인구가 5백43만명에 달하는등 인구의 대도시 집중화현상은 당시 정부의 골칫거리였다.
변두리에 즐비한 판자촌은 안양.의정부등으로 마구 뻗어나가고 있었다.
일부 기업과 부유층에 의한 부동산 투기 열풍은 백약이 무효였다.
그러나 그린벨트란 기상천외한 조치로 수도권 일대의 부동산 투기는 가라앉았다.
박정희는 김의원 부국장이 며칠 뒤 가져온 초안을 퇴짜놓는다.
구파발 검문소와 삼송리 검문소 사이에 북한산을 끼고 흐르는 창릉천 주변.불광동 기자촌 일대등 몇군데를 빠뜨렸다는 이유였다.
축척 5만분의1 지도 위에 그린 초안을 훑어본 박정희는 책상 서랍을 열어 뭔가 유심히 들여다 보고는 돌아 앉아 "여기는 왜 뺐어" 라며 일일이 지적했다.
金부국장이 "집없는 기자들이 집을 짓겠다고 터를 닦고 있는데 그린벨트에 포함시키면 난리가 날 겁니다" 라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래도 포함시켜" 라고 일축했다.
며칠 뒤 2차 초안에서도 창릉천 주변은 빠져 있었다.
"서울이 북쪽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라며 이유를 설명하려는 金부국장의 말을 가로막은 박정희. "참 답답한 친구들이네" 라며 비로소 속마음을 털어놨다.
金씨가 "탄복하고 물러 나왔다" 며 전해주는 박정희의 그린벨트 안보관. "남북이 다시 맞붙어 불행히도 우리가 서울까지 후퇴했다고 치자. 그러면 (인민군) 2, 3개 사단을 이 계곡에 몰아넣고 북한산에서 공격하면 섬멸시킬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에 시가지를 조성하면안돼. " 그린벨트에는 일절 예외가 없었다.
그린벨트 주무장관인 태완선 (太完善.작고) 당시 건설장관은 취임후 첫 작품인 그린벨트 때문에 재산을 날렸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서울 남태령고개 부근 임야 5천평이 1차 그린벨트 지정고시에 묶여버린 것이다.
실무진이 작성해온 최종안을 보고난 그는 "허허, 난 망했군, 망했어" 라고 쓴웃음을 짓다가"그래도 공정해야지" 라며 결재했다.
국세청 내사를 통해 고위공직자들의 재산상태를 손바닥보듯 알고 있던 박정희는 太장관을 두고 "그사람 참 양심적인 사람이야" 라고 칭찬했다 (당시 대통령 경제2수석 吳源哲씨 증언) .대통령 박정희가 꼬치꼬치 '주사 노릇' 을 한 분야가 그린벨트다.
그는 건설부령 그린벨트 관리규정을 처음 결재할 때부터 겉표지에 "건설부장관이 개정할 수 있으되 개정시에는 반드시 대통령의 결재를 득 (得) 할 것" 이라고 써놓아 주무장관의 재량권을 사실상 봉쇄했다.
'작은 구멍 하나가 큰 둑을 허문다' 는 소신을 가졌던 그의 그린벨트에 대한 의지는 가위 냉혹할 정도였다.

77년 여름문턱으로 접어들던 때의 일이다.
"저, 각하, 참으로 딱한 사연이 있습니다만. " 6척 거구에 화통한 성격의 신형식 (申泂植) 건설장관이 그답지 않게 조심조심 이어나간 얘기. 사람들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경기도화성
군반월면 수리산 기슭에 천주교측이 전국의 수녀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수영장을 마련했다.
그런데 화성군청은 76년 12월4일 그곳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되자 불도저를 동원해 메워버렸다.
"수녀들이 남들처럼 해변에서 수영할 수도 없고…. " 박정희는 단호했다.
"이 사람아, 수녀들에게 그렇게 해주면 스님들은 가만 있나. 종교가 어디 한 두개야?" 박정희는 또 그린벨트내 군부대 초소의 기왓장 몇개 바꾸는 것까지 건설부의 사전허락을 받도록했다.
자존심이 상했던지 한 국방장관이 박정희에게 "부대안 그린벨트는 군이 관리토록 해달라"고 건의했다가 "군인들은 법 잘 지키나? 건설부 통해서 해!" 라고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김의원씨 증언) . 딱 하나의 예외가 64년부터 67년까지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낸 장기영 (張基榮) 의 장지 (葬地) .집권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있다가 77년 4월 사망한 張씨의 장지는 팔당댐 부근인 경기도광주군동부면창우리 선영으로 결정됐다.
그런데 윤세달 (尹世達) 광주군수가 직원들과 함께 장지 입구를 가로막고는 "그린벨트내 불법묘지이니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오라" 고 버텼다.
결국 장기영은 건설부.보사부 공동발의로 국무회의 의결이란 '엄청난' 과정을 거쳐 선영에 묻혔다.
진해 별장에 내려가 있던 박정희는 이 보고에 몹시 언짢아했다고 한다.
72년부터 79년까지 2천5백26명의 공직자가 그린벨트 관리 잘못으로 징계를 받았다.
파면 1백91명, 감봉 1백14명, 견책 2백29명, 직위해제 2명, 경고.주의.훈계 1천9백90명. 그린벨트지역 공직자들 사이에서는 "사표를 내놓고 일한다" " (그린벨트 감사에 비하면) 감사원 감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는 말이 나돌았다.


박정희 생존시 '신성 불가침' 이었던 그린벨트. 그러나 박정희 사후 해당지역 주민들의 반발에 밀려 선거철등 민감한 시기마다 조금씩 느슨해지다가 지난 11일 건설부의 파격적인 규제 완화 예고로 이제는 존립의 근거마저 위협받고 있다.

일본 국토청차관을 지낸 시모고베 아츠시 (下河邊淳) 는 중국의 실권자 덩샤오핑 (鄧小平)의 경제자문관으로 있던 80년대초 "베이징 (北京) 과 상하이 (上海) 같은 대도시 주변에 그린벨트를 두르는 것이 후일을 위해 바람직하다" 며 "상세한 것은 한국에 알아보시라" 고 건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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