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중앙정보부
절대기아 (饑餓) 로부터의 해방은 5.16직후부터 박정희 (朴正熙)에게 주어진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먹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무렵 그가 집착했던 대목은 한국땅에서 나는 석유였다.
바람이 간절하면 때론 꿈으로도 나타난다던가.
과묵.신중.침착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박정희가 이 때문에 지나치게 흥분, 결과적으로 우스갯감이 된 적이 있다.
76년 1월 '영일만 석유' 얘기는 대표적으로 알려진 케이스. 이 보다 10년 앞서 그는 석유사 건때 못지않게 흥분한 적이 있다.
쌀 (볍씨) 때문이었다.
보릿고개와 보릿고개 사이에 산다는 자조 속에 65년도 저물어가던 무렵의 대통령 접견실. "우리 이제 보릿고개 넘길 효자 하나 생겼어. " 박정희는 시간이 좀 남는다 싶으면 '손님들'에게 으레 이렇게 볍씨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한쪽에 나란히 세워둔 유리상자 속의 볍씨를 가리키며 "이게 그거야, 희농 (熙農) 1호. 알도 많고 병충해에도 강하고" 라는등 칭찬에 열을 올렸다.
희농1호는 당시 언론에 '기적의 볍씨' 라고 소개됐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64년 이집트에서 훔쳐온 나다 (Nahda) 를 박정희의 '희 (熙)' 자를 따희농1호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65년 실험재배에서 광주등 다른 곳은 실패했으나 서울대농대 이태현 (李台現.작고) 교수 책임하에 이뤄진 수원에서만 일반벼보다 30%이상 다수확 가능 판정을 받았다.
당시 중정3국장 보좌관 김영광 (金永光.66.전국회의원) 씨의 증언. 그는 수원농고 출신이란 이유로 차출돼 실험재배 경과를 1주일에 한번꼴로 박정희에게 보고하느라 수원시험포에 살다시피 했다.
"쌀, 쌀 하던 땐데 얼마나 좋아하셨겠습니까. 일반벼도 함께 가져오라시길래 국광등 다섯가지를 따로 담아 갖다드렸어요. 그걸 비교해 가며 자랑하시는 거예요. "
박정희는 그때 걷힌 30가마를 "한톨도 먹지 말고 종자로 쓰라" 고 지시하는 한편 李교수를 이듬해 2월 농업진흥청장에 임명한다.
김형욱 (金炯旭) 정보부장은 한술 더 떴다.
'제2의 문익점' 이라고 자랑이 늘어졌다.
훔쳐온 사실을 알게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중정에 대한 국회내무위의 국정감사장에서도 희농 견본을 내놓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희농1호는 실패했다.
67년 일반농가에 보급, 재배결과 씨받이마저 어려운 흉작에 그쳤다.
때마침 닥친 극심한 가뭄 탓도 있었지만 한국의 기후나 풍토에 맞지 않는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박정희의 반응에 대한 증언은 드물다.
희농실패에 대한 시비가 잦아들고 새농사가 시작될 즈음인 이듬해 5월 조용히 '희농 청장'이태현의 사표를 받은 것이 고작이다.
박정희의 실망은 컸던 것같다.
70년 연두회견에서 '진짜 기적의 볍씨' 통일벼 (당시 명칭 IR667) 를 소개하면서도 "과거 (희농)에 안됐기 때문에 이것도 되겠느냐고 의심할지 모르지만 틀림없이 될 것" 이라고 사족을 달았다.
희농 이후 박정희는 어떤 '상품' 에도 자신의 이름을 붙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통일벼의 대성공 덕분에 덮여진 희농1호 에피소드는 식량자급에 대한 박정희의 열망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는 식량자급을 가난추방의 첫걸음으로 간주했다.
식량문제 해결없이는 국가안보 또한 없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이른바 '박정희식' 은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좌우 살피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사고 방식.행동양식을 말한다.
통일벼 보급과정에서도 박정희식이 적용됐다.
통일벼는 국내연구진과 국제미작연구소 (IRRI.필리핀 소재)가 5년 연구끝에 개발한 다수확 품종으로 70년 일반농가에 실험적으로 보급,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맛이 없다, 찰기가 부족해 식으면 푸석푸석해진다, 모양이 길쭉해 이상하다는등 시비가 잇따랐다.
71년 2월5일 월례 경제동향보고회의가 끝난 뒤 가진 통일쌀밥 시식회. 대통령으로부터 퇴짜를 맞으면 어쩌나 하는 심정에서 김인환 (金寅煥.작고) 농진청장이 무기명으로 써달라며 'IR667 (통일벼는 그해말 공모를 통해 결정된 이름) 검정조사표' 를 배포했다.
朴대통령은 굳이 날짜와 사인을 적어놓고는 ▶색깔 = 좋음▶차진 정도 = 보통▶밥맛 = 좋음이라고 응답했다 (사진 참조) .박정희의 일갈. "누가 이걸 맛없다고 그래. 비싼 돈주고 외미(外米) 사먹는 처지에 밥맛 따지게 됐어?" 더이상 다른 참석자들의 답변은 들어볼 필요가 없었다.
당시 농림장관 김보현 (金甫炫.73) 씨의 증언. "통일벼는 일반벼보다 키가 작아 지붕이엉을 엮는데 나쁘다는 얘기가 나왔지요. 朴대통령께서 '지붕을 개량하면 되지 무슨 소리냐' 고 일축하데요. 농촌 지붕개량이 신속하게 이뤄진데는 통일벼 영향도 클 겁니다. " 박정희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독설가' 김학렬 (金鶴烈.작고) 전부총리는 열성적인 통일벼 옹호론자였다.
박정희의 시식을 며칠 앞두고 농업진흥청에서 예비시식을 하는 도중 섬뜩한 독설을 퍼붓는다.
'통일벼 박사' 허문회 (許文會.70.서울대농대 명예교수) 씨의 증언. "누군가 밥맛 얘기를 꺼내면서 조기보급 신중론을 폈지요. 그런데 그 양반 '이게 어디가 어때. 배부른 놈들이구만.
맛없다는 놈들 칼로 배를 찔러버려야 돼' 라고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 통일벼가 일반농가에 본격 보급된 72년부터 일반벼를 고집하는 농민들의 저항 때문에 소동이 벌어졌다.
일부 농촌지도원들은 통일벼 보급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일반벼 모판을 밟아버리거나 모내기를 끝낸 일반벼를 뽑아내고 통일벼를 심도록 강요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당시 농진청 식량작물과장 이효근 (李孝近.72) 씨는 "사후관리를 잘못해 피해를 본 경우에도 농민들이 농촌지도소로 몰려가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보상을 요구하곤 했다" 고 회고한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뿌리내린 통일벼는 74년 3천만섬, 77년 4천만섬 돌파등 기록적 쌀증산을 주도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박정희는 그 덕분에 77년 1월 대북 (對北) 쌀지원을 제의할 수 있게 됐다.
그는 그해 12월 농진청을 방문, 그 뿌듯한 마음을 '녹색혁명성취' 라는 휘호로 남겼다.
그러나 통일벼는 박정희 사후 다시 맛 시비에 휘말리고 쌀이 남아돌면서 91년에는 완전히자취를 감췄다.
박정희는 식량증산운동과 더불어 잡곡혼식.분식.무미일 (無米日.1주일에 한번씩 각종 음식에서 쌀을 쓰지 않는 날) 등 절미 (節米.쌀 덜먹기) 운동을 강행했다.
72년 12월22일 김종필 (金鍾泌) 국무총리를 경유, 김보현농림장관에게 보낸 16절지 6장 분량의 친서 일부. '…주2회 쌀 안먹기를 5회정도로 증가하여 절미를 강행하고 벌칙을 강화하여 미곡상.음식점등 위반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도록 하여…. ' 이렇듯 박정희는 절미운동 위반을 중대한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그러다 보니 식당에는 암행단속반이 들이닥쳐 솥단지를 뒤지는가 하면 각급 학교에서는 도시락 검사를 벌이는등 진풍경이 속출했다.
그중 압권은 잡곡을 섞은 생선초밥 (스시) .주요 관광수입원인 일본인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스시에도 잡곡을 섞도록 한 것이다.
관광협회는 73년초 보리로 만든 스시를 들고 김보현농림장관을 찾아가 "먹어보라" 며 항의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순 쌀로 만드는 것을 인정해준 유일한 사례는 경주법주. 청와대 외빈 접대용을 제외하고 전량 수출하는 조건이었다.
당시 서울 P호텔 일식코너에서 근무한 이병환 (李柄丸.50) 씨가 "처음에는 비웃던 일본사람들도 차츰 고개를 숙이더라" 며 들려주는 잡곡 스시 제조담. "보리는 식으면 찰기가 없는데다 조금만 넣어도 검은색이 번져요. 그래서 보리는 조금 넣고 콩.팥.차조로 대신했지요. 국수 삶은 물을 남겨뒀다 생선에다 살살 묻혀가며 말고, 별 꾀를 다 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차조가 골치예요. 이게 초하고는 안 어울리는 거라. 할 수 없이 미리 초를 손에다 묻혀 차조를 피해 비비느라 손이 벌겋게 헤어지고요. 하루 반가마를 그렇게 만드니 배겨납니까. " 우여곡절끝에 달성한 식량자급에 대한 비판도 있다.
농약을 많이 써야 하는 통일벼 때문에 농약중독 피해가 급증하고 메뚜기.미꾸라지등이 들판에서 사라지는등 박정희시대에 농촌의 생태계 파괴가 시작됐다며 "그 피해는 식량자급을 몇 년 앞당긴 이상의 후유증을 남겼다" 는 지적이다.
그러나 농업진흥청 전세창 (田世昌.50) 지도관은 "배부르니까 나오는 소리" 라며 "굶주림 때문에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북한의 참상을 보면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느냐" 고 반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