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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맨손의 재건 두달만에 청사진 완성

"나는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을 애국자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두가지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첫째, 민주주의라는게 좋긴 한데 미국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도입했어요. 우리 실정에 맞지 않습니다. 둘째, 그 분은 경제개발에 대해 너무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국민을 계속 가난 속에서 허덕이게 내버려뒀어요. "
5.16 직후인 1961년 5월20일을 전후한 어느날. 당시 산업은행 조사부에서 일하고 있던 김성범 (金聖範.73.전효성중공업 상임감사) 씨는 박정희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의 말에 깜짝 놀랐다. 당시만 해도 민주주의와 미국식 민주주의는 동의어로 여겨지던 때였다.
이후 金씨는 朴정권 18년동안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적 민주주의' 와 '10월 유신' 등의 발표가 있을 때마다 朴부의장의 이날 발언을 되씹어보곤 했다.
朴부의장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혁명을 한 것은 5천년 묵은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소. 그러려면 우선 계획이 있어야만 합니다. 8.15 광복절 이전에 작업을 마쳐주세요. "

30代 민간엘리트에 맡겨
朴부의장은 金씨를 포함한 민간인 3명에게 특유의 단호한 어투로 경제개발계획을 만들어 줄것을 당부했다. 이 자리가 건국이후 최초로 시행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만들기 위한 첫 모임이었다. 金씨등 3인은 서울퇴계로로 옮긴 최고회의 건물 (옛 참의원 자리.코리아헤럴드사 건너편) 한 구석방에서 곧바로 밤샘작업에 돌입했다. 물론 자유당과 민주당 시절에 만들어졌다가 4.19와 5.16의 발생으로 햇빛을 보지 못한 경제개발계획안이 참조가 됐다.
이날 朴부의장을 만난 3인은 金씨외에 정소영 (鄭韶永.65.고려종합연구소 회장).백용찬 (白鏞粲.68.전농업경제연구소장) 씨. 워싱턴 주립대 경제학박사 출신인 鄭씨는 5.16 다음날 재무부 사세국 토지조사과장직을 내던지고 미국에 대학교수로 가기 위해 준비하던중 최고회의의 소환전화를 받았다.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 보좌위원 (과장급) 으로 1, 2공화국때 경제개발 7개년계획과 5개년 계획을 직접 짠 경험이 있는 白씨는 경력때문에 발탁된 경우. 김성범씨는 5.16 주체세력들에 거사자금을 지원했던 민간인 남상옥 (南相沃.전타워호텔 회장.작고) 씨의 추천으로 작업팀에 합류했다. 당시 鄭씨는 29세, 白씨는 32세였고 가장 연장자인 金씨가 37세였다.
결국 1차 5개년계획의 밑그림을 그리는 임무가 이들 20, 30대 젊은 인재들의 손에 맡겨진 것이다. 1차산업 분야는 白씨가, 2차산업은 金 씨가, 3차산업은 鄭씨가 각각 맡았다. 이들은
"내 일생에 가장 보람된 일이었다" 며 지금까지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군사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서두른 이유는 무엇일까. 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장이었던 유원식 (柳原植.전협화실업회장.작고) 대령의 증언 (회고록) .
"우리가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도 있고 근대적인 경제개발계획을 세울 수 있는 지적수준을 갖고 있다는 것을 국내외에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경제개발계획을 만든 것은 5.16 주체세력들의 자존심 때문이었다는 얘기다. 자존심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나 거사계획에 처음부터 참여하고 주도한 김종필 (金鍾泌) 자민련총재의 얘기는 다르다.
"혁명할 때부터 경제개발에 치중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시작했습니다. 혁명 직후 나온 '재건'이니 '근대화' 니 하는 용어가 바로 경제를 염두에 둔 것이었지요. 朴대통령도 거사 전부터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고, 논의도 많이 했습니다."
혁명주체들 사이에서도 핵심과 주변의 사고는 이처럼 달랐는지 모른다. 군사정변에 의혹을 품은 미국이 한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도 박정희를 다급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7월 하순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대한 기본안이 마련됐다. 10년내에 소득을 비롯한 경제규모를 두배로 늘린다는 것이 골자였다.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7.1%.폐허나 다름없던 그 당시의 경제상황에서 경제성장률 7.1%는 구름잡는 얘기로 들렸다. 어떤 근거에서 그런 수치를 설정했는지 물어보았다. "10년안에 국민총생산 (GNP) 과 국민소득을 두배로 늘린다는 목표를 먼저 세웠습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률이 그만큼은 돼야 했지요. "

말聯.인도 경험도 참고
목표치를 먼저 세워놓고 경제성장률을 역산 (逆算) 했다는 뜻이다. 다분히 주먹구구식이다.
80일내로 국가의 장래를 끌고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세우라는 박정희. 이 역사적인 작업을 주어진 기한보다 20일 앞당겨 60일만에 해낸 작업팀.
그런데 묘한 것은 60년 19억5천만달러에 불과하던 남한의 GNP가 10년 뒤인 70년엔 79억9천만달러로 4배로 늘어났고, 1인당 GNP도 60년 94달러에서 70년 2백48달러로 2.6배 증가 했다는 사실이다 (통일원 '분단 45년 남북한 경제의 종합적 비교연구' 참조) . 우여곡절 끝에1,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되면서 당초 계획자들조차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 두배 성장을 훨씬 상회하는 결과가 나온 셈이다.
어쨌든 작업팀은 먼저 朴의장 (61년 7월3일부터 최고회의 의장이 됐다)에게 기본안을 브리핑했다. 백용찬씨의 증언. "朴의장은 계획안이 잘 됐다며 굉장히 만족해 하셨어요. 작업팀에 금일봉도 주셨지요. " 이틀후 朴의장은 군사정부내 고위급 인사 1백50여명을 최고회의 1층 회의실에 모았다. 브리핑에 앞서 박희범 (朴喜範.작고) 당시 서울대 교수가 사회간접자본.GNP등 경제용어를 간단히 설명했다. 당시만 해도 이런 용어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정소영씨의 증언.
"朴의장은 맨 앞자리에 앉아 1시간30분동안 자세를 꼿꼿이 하고 경청했어요. 브리핑이 끝나자 朴의장은 '진짜 혁명은 이 계획의 성공여부에 달려 있다' 고 총평을 하셨어요. " 그러나 일부 최고위원들은 5개년계획안에 대해 시큰둥했다.
작업팀의 일원이었던 김성범씨의 증언.
"며칠후 유원식 대령이 분을 삭이지 못한 표정으로 작업팀 방에 들어왔어요. 글쎄, 일부 최고위원들이 '지금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태평스럽게 무슨 5개년계획이냐' 며 빈정댄다는 거예요. "
朴의장은 이런 비아냥을 묵살했다. 군사정부는 61년 7월22일 경제기획원의 신설과 함께 '종합경제재건 5개년계획' 을 발표했다. 1, 2공화국때 두차례의 경제계획안이 마련되긴 했지만
집권자의 의지가 담긴 주요 국가목표로 추진되기는 처음이었다.
朴의장은 이 계획을 토대로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짜라고 경제기획원에 지시했다. 송정범(宋正範.74.경제기획원 초대 부원장) 씨는 "말레이시아와 인도의 5개년계획 등을 참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계획안 수립때 자문교수단의 일원이었던 성창환 (成昌煥.80.고려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씨는 흥미있는 증언을 했다. "당시 경제기획원에서 만든 실행계획안은 세월이 많이 흘러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나치게 계획경제 쪽으로 기울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경제계획과 계획경제는 분명히 다르다' 고 지적했지요. 결국 혼합경제를 주조로 한 수정안이 만들어졌습니다."

財源달려 2년못돼 수정
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발표됐다. 계획경제와 경제계획의 개념조차 불확실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이 계획은 미국으로부터 '쇼핑 리스트' 라는 혹평을 받았다. 제철.정유.조선.시멘트.비료 생산을 위한 공장건설의 재원등은 고려치 않고 의욕만 앞세워 실현불 가능한 계획을 짰다는 얘기였다.
세계은행도 "연평균 7% 성장은 선진국에서도 유례가 없다" 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공장건설 계획안은 오원철 (吳源哲.69) 당시 상공부 화학과장등 상공부 관리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안은 재원부족때문에 건설순위의 조정은 있었지만 결국 朴정권 18년의 경제를 지탱하는 초석이 됐다. 朴의장은 61년 11월 미국을 방문,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원조를 요청했지만 미국측은 "모두 세우려면 약 20억달러가 들텐데 한국같이 가난한 나라에 누가 투자하겠느냐" 며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경제개발은 의욕만으로는 되지 않았다. 63년 사업을 한창 추진하던 참에 돈이 떨어졌다. 그해 9월말 달러 보유고는 고작 9천3백만달러. 사업추진에 커다란 차질이 빚어졌다. 朴의장은 5개년계획 사업 진척상황을 거의 매일 체크해가며 전화로 장관들을 독려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이대로 5개년계획을 계속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침내 사업 축소작업이 시작됐다. 연평균 경제성장률도 당초 7.1%에서 5%로 낮췄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때 대안으로 대두된 것이 바로 수출제일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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