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동기 불분명한 군인으로의 변신
1942년 3월23일. 만주국 수도 신징 (新京) , 지금의 창춘 (長春) 교외 남강대 (南崗臺)에서는 만주군관학교 제2기 예과졸업식이 성대히 열리고 있었다. 만주국 황제 푸이 (溥儀)가 왜소한 체구에 까무잡잡한 얼굴의 졸업생도 대표에게 금시계를 하사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박정희 (朴正熙) 였다.
교사 박정희가 돌연 만주행 (滿洲行) 열차에 오른 것은 1939년 9월 하순. 10월 초순 있을 군관학교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다. 조선땅을 지나 봉천 (奉天.현 瀋陽)~신징~지린 (吉林) 을 거쳐 수험지인 무단장 (牧丹江) 시에 도착했다. 아직 학교를 사직하지 않았고 합격도
자신할 수 없어 그로서는 다소 불안한 발걸음이었다.
평소 말 앞세우기를 좋아하지 않던 그는 주위사람들에게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다' 고 떠나왔다. 어쨌든 박정희는 1940년부터 해방 이듬해까지 6년간 만주에서 '군인 박정희' 로 성장했다. 아니 '군인 다카키 마사오 (高木正雄.박정희의 창씨개명 이름)' 가 탄생한 것이다.
문경보통학교 '교사 박정희' 는 왜 갑자기 만주로 떠나 군인이 되었는가. 당시 수재들이나 들어가던 명문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그가 얻은 훈도 (訓導.현 초등학교 교사) 자리는 대단한것이었다. 시골에선 군 (郡) 내 몇 안되는 유지 (有志) 급 인사였고 안정된 생활과 지위, 미래가 보장된 '자리' 였다.
그가 이같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만주행을 결행한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그동안 많은 '박정희 연구자' 들은 이 점에 의문을 갖고 '교사 박정희' 의 변신 (變身) 이 장차 한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다. 생전에 박정희 자신은 단 한번 측근에게 "긴 칼 차고 싶어서" 라고 군인이 된 동기를 밝혔다. 그다운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70년 4월 한림출판사 요청으로 직접 집필한 '나의 소년시절' 에선 "소년시절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이라고 적었다. 그렇지만 교사 박정희가 택한 군인의 길은 불우한 식민지시대 조선청년의 가슴에 성냥불을 그어댄 그 무엇이 없었으면 설명이 잘 안된다.
"순옥이라고 불러도"
그는 당시 가장 아낀 여제자 정순옥 (鄭順玉.72) 씨에게 20년뒤 야릇한 연정을 담은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1군참모장으로 있던 1959년 5월1일 당시 3남매의 어머니가 된 정순옥씨에 게 보낸 편지. "20년전의 추억을 더듬으면 천진난만한 순옥이의 소녀시절 모습이 떠오르지만 3남매의 어머니가 된 순옥이를 순옥이라고 불러 어떨는지" 라며 초등학교 6년 시절의 제자를 애틋한 마음으로 그리고 있다.
박정희가 만주로 간 직접적인 계기로 교사시절의 '장발 (長髮) 사건' 이 널리 인용되고 있다. 87년 1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대
구사범 동기생 권상하 (權尙河.81) 씨가 증언했기 때문이다. 權씨의 증언 요지.
"중일전쟁 (中日戰爭) 이 한창이던 1939년 당시 일제는 국민들에게 전의 (戰意) 를 고양하기 위해 교사들도 군인들처럼 머리를 빡빡 깎게 했었다. 복장도 국민복.국민모 (帽)에 각반을 차고 다녔다. 바로 그 시절 그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이 해 가을 마침 연구수업 시찰을 나온 데라도 (寺戶) 시학 (視學.장학사) 은 그의 긴 머리를 보고 "아직도 총력정신이 결여된 교사가 있다. 이것은 황민화 정책이 철저하지 못한 증거" 라며 그를 강하게 비판했다. 냉랭한 공기는 그날 밤까지 계속됐다. 시학을 위해 아리마 (有馬) 교장이 관사 (官舍)에서 마련한 술자리에서 교장과 시학이 그의 긴 머리를 다시 문제삼았다. 술에 취한 그는 두 사람을 상대로 언쟁을 벌이다 술잔을 던지는등 소란을 피웠다. 그날 밤은 그냥 넘어갔다. 문제는 이튿날이었다. 교장이 다시 그를 교장실로 불러 간밤의 행동을 질책하자 울컥한 끝에 그는 교장을 두들겨패고는 그 길로 짐을 챙겨 문경을 떴다. 그는 보따리를 싸 만주로 가기 전 나를 찾아와 이같은 전후사정 얘기를 했다. "
이같은 權씨의 증언은 몇가지 점에서 검증을 요한다. 우선 당시 시국아래서 평교사가 교장이나 시학 앞에서 논쟁을 벌였다거나 술자리에서 이들에게 술잔을 던졌다는 부분, 그리고 교장을 두들겨팼다는 대목등은 이해하기 힘들다. 당시를 산 사람들은 하나같이 '있을 수 없는 일' 이라고 입을 모은다.
식민지 설움 푼 싸움대장
그렇다면 확실한 물증을 보자. 이번 취재과정에서 입수한 교사시절 박정희의 사진은 열장 내외. 그러나 그 어느 사진에서도 그의 장발 모습은 없다.
그렇다면 '장발사건' 은 어딘가 와전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바로 그 '오해' 를 70대를 바라보는 노제자가 증언하고 있다. 朴교사 부임 당시 2학년이었던 이순희 (李順姬.여.69) 씨는 당시 朴교사의 모습을 "자그마한 키에 얼굴이 까무잡잡한 분이 눈만 반짝거렸어요" 라고 기억했다.
얘기가 '장발' 대목에 이르자 李씨는 목소리를 높인다.
"저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우선 朴선생님에게 있어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머리가 긴 것은 朴선생님이 아니라 학생들이었어요. 당시는 학생이나 교사 할 것 없이 모두 머리를 빡빡 깎았습니다. 그런데 동네에 바리캉이 한두개 뿐인데다 그걸 빌리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돈주고 이발소에 가기도 쉽지 않았구요. 그래서 제때에 머리를 못깎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교사들은 이런 사정은 제쳐놓고 무조건 머리가 긴 학생들은 귀를 잡아 질질 끌고가서는 복도에 벌을 세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朴선생님이 지나가다가 벌선 학생들을 보고는 '너 왜 여기서 벌받고 있느냐' 고 물어봅니다. 얘기를 다 듣고 朴선생님은 교무실로 달려가 '돈이 없어서 머리 못깎는 아이들을 왜 벌주느냐' 며 일본인 교사들과 다투곤 했어요. 다투는 소리가 교무실 밖에까지 들린 적도 자주 있었습니다. "
다른 제자들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제자 정순옥씨도 "朴선생님은 항상 단정한 분이었다" 고 증언한다. 당시 朴교사는 자주 일본인 교사들과 싸움을 하는 바람에 '겐카 다이쇼' (싸움대장) 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했다. '겐카 다이쇼' 란 별명은 교사 박정희의 젊음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 소처럼 일하면서도 언제나 배고픔과 억눌림의 삶을 체념하고 있는 조선민중에 대한 한없는 비애, 그도 그런 조선인의 한 사람이 돼 식민통치에 순응하고 일본인보다 한 단계 낮은 국민으로 살면서 조선의 소년소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인가.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그런 울분과 번민이 가슴에 불길이 되어 타올랐던 것은 아닐까.
얼마후 군관학교로 간 박정희가 "왜 여기 왔느냐" 고 묻는 선배의 질문에 "왜놈이 보기 싫어서 왔소" 라고 대답했다는 것도 박정희의 심리 저변에 깔린 민족적 감정의 일단을 설명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