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으로 이동

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7,34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6.북 5.16나자 "박정희 연구" 긴급회의

박정희 (朴正熙) 는 누구인가.
1961년 5월16일 새벽 서울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에서 던진 의문이다. 쿠데타 세력은 좌우 어느쪽인가, 친미 (親美) 적인가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 것은 쿠데타군의 지휘자 박정희의 좌익경력 때문이었다. 서울과 워싱턴은 물론 도쿄 (東京) 의 정가 (政街) 까지도 긴장했다. 쿠데타군은 공약에서 반공 (反共) 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한국군 일부 장성과 주한 (駐韓) 미군은 쿠데타의 성격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더구나 16일 오후7시 "한국장교 스스로 일으킨 의거에 대해 왜 미군이 간섭하는가" 라는 평양방송 보도는 박정희를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평양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이 무렵 평양은 한국 정세에 고무돼 있었다. 5.16 1년전인 60년 6월13일 김일성 (金日成.북한수상) 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평양주재 소련대사 푸자노프에게 '남조선혁명' 에 대해 희망적인 견해를 피력했었다. 본
사 (本社)가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에서 단독 입수한 푸자노프 대사의 '비망록' (6월13일자)에 기록돼 있는 金의 발언내용.
"남조선에는 노동당 지하당원이 1천~2천명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대남 (對南) 노선은 새로운 진보정당과 단체들의 창설을 고무하는 것이다. 현재 그런 당으로는 한국사회당과 사회 대중당등이 있다. 우리는 이 당들의 지도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남조선 정부의 일부 주요 지위에는 우리 사람들이 박혀 있다. "
김일성의 이런 견해는 소련에 대한 허장성세 (虛張聲勢)가 섞인 다소 과장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혁신계 정당과 사회단체, 그리고 학생들의 급진적 통일운동등 61년의 한국정세는 金의 견해를 받쳐주는 일면이 있다. 그 무렵 평양은 남쪽 진보세력의 통일논의를 지원하는 평화공세를 더 한층 강화하고 있었다. 서울의 쿠데타는 그들의 평화공세를 일거에 차단한 사태였다. 그런데 평양당국은 朴의 경력에 주목했고 급기야 무역성차관을 지낸 황태성(黃泰成) 을 밀파 (密派) , 朴의 의중을 타진하고 평화통일을 논의하려 했다. 이것은 북한이 朴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었음을 말해준다.
朴이 권력의 자리에 다가서기까지 어떤 길을 걸어온 것인가. 그의 생애중 어떤 대목들이 북한의 환상을 불러온 것인가. 도대체 박정희는 누구인가. 그런 질문을 되짚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좌익경력을 포함한 그의 과거로 다가가기 전에 먼저 5.16인식에 대한 평양의 혼란상을 살펴볼 만하다. 5.16 소식에 평양도 발칵 뒤집혔다.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날 김일성은 함흥지역에 현지지도를 나가 있다가 뒤늦게 한국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金은 즉시 대남 공작총본부인 3호청사의 정보망을 총 동원해 쿠데타의 진상과 사태추이를 알아보고, 정치위원회를 긴급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오후4시쯤 金이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노동당 중앙당사에서는 긴급 정치위원회가 열렸다. 3호청사 문화부장 김중린 (金仲麟.현 노동당 근로단체담당비서) 이 "박정희소장과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의 소장장교들이 움직였다는 정보가 있다" 며 사태발생에 대한 윤곽을 보고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는 질문에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김일성은 즉시 그동안 3호청사에 수집돼 있는 朴의 신상자료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날의 증언.
朴 관련정보 모두 수집
"金의 지시로 朴을 포함해 쿠데타 주요간부 8명에 대한 신상자료가 회의에 제출됐어요. 당시 한국군 장성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개개인에 대한 세세한 신상자료가 마련돼 있었어요. 박정희 자료는 주로 경북출신의 남로당원, 한국군 장교였다가 월북한 사람들이 쓴것이었지요. 그중 70%정도가 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어요. "
당시 3호청사의 간부로 있으면서 회의자료를 준비했던 전 북한고위관리 (차관급) 황일호(黃日鎬.75.해외거주) 의 증언이다.
그러나 박정희 자료는 과거경력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정작 필요한 최신 자료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4.19이후 북한은 대대적인 평화통일 공세에 주력하느라 한국군의 동향에 소홀했기 때문이었다. 金은 빠른 시일안에 정책토론회를 열어 4.19후 정세와 쿠데타 발발의 배경을 총괄.정리하고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5월20일과 21일 양일간 노동당 본청사회의실에서 정책토론회가 벌어졌다. 이 정책토론회에는 책임지도원급 이상 3호청사 사람과 당 국제부.내각 외무성의 중요간부, 주요 연구소의 책임연구원등 3백50여명이 참가했다.


이 토론회에 참석했던 황일호씨의 증언.
"토론과정에서 군사쿠데타가 미국의 조종에 따른 것이냐, 아니면 민족지향적인 청년장교들의 자발적인 행동이냐를 놓고 상당히 옥신각신했어요. 쿠데타에 미국이 개입됐다고 결론이 났지만 주체세력의 면면을 볼 때 진상을 보다 신중히 조사해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많았어요. 그래서 朴과 김종필 (金鍾泌) 이 어떤 인물인지를 파악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쪽으로 가닥이 잡혔어요. "
3호청사는 즉각 박정희.김종필.유원식 (柳原植) 등 '혁명주체' 세력의 핵심들에 대한 성향조사에 착수했다.
대남연락부는 5월26일 평양여관 특호실에 朴을 어려서부터 지켜봤던 황태성과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으로 49년 대대장으로 있다가 월북한 강태무 (姜泰武) 등 14명을 소환했다. 이들은 주량.버릇등 사소한 것에서부터 주변인물.정치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朴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사항을 기록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모인 보고서와 토론자료를 쌓아보니 1에 달했다.
북한의 박정희연구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朴이 해방 직후 박헌영 (朴憲永) 이 이끈 남로당 (南勞黨)에 관계했고, 그의 친형인 박상희 (朴相熙) 역시 '대구 10월폭동' 에 참여했다가 희생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때 제출된 보고서들은 대부분 朴을 민족성향이 강한 인물로 평가했다.
민족성향 강한 인물 평가
북한 수뇌부는 박정희.김종필등의 인물파악 과정에서 "뭔가 대화가 될 수 있다" 는 희망적인분위기에 빠져들었다. 물론 반론도 없지 않았다.

전 북한 최고검찰소 검사였던 김중종 (金中鍾.71.서울거주) 씨의 증언.
"북한은 쿠데타 주도세력 내부에 좌익경력을 가진 인물이 많다는 점에 고무됐어요. 그러나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혁신계인사등이 대거 체포되자 노동당 내부에서도 과거경력만 가지고 朴을 호의적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회의론이 제기됐어요. "
그러나 황태성.강태무등이 계속 협상론을 제기하고 어윤갑 부장을 비롯해 대남연락부의 간부들도 이에 동조했다. 북한은 61년7월 중순 정치위원회를 다시 열고 "朴이 반공을 표방하고 있고 혁신계를 탄압하고 있지만 우리와 통일문제를 협의할 수도 있다. 평화통일을 제안하는 비밀협상대표를 파견키로 하자" 는 결론을 내렸다.
朴에 대해 가장 우호적으로 평가했던 黃이 자진해 나섰다.
"북한은 박정희 접촉의 성공여부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보내더라도 절대 다치지 않을 인물을 보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이때 黃이 '내가 한번 가 보겠다' 고 자원했답니다. "
이 증언은 김중종이 61년 남파됐다가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그곳에 수감돼 있던 黃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후일담이다. 최소한의 안전보장을 믿었다는 황태성. 그러나 그의 서울 잠입은 가뜩이나 사상문제로 곤란에 처해있던 박정희장군을 궁지로 몰아넣고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 로 등장하게 된다.


  1. No Image notice

    회원 삭제 대상자

    회원정보 정리작업(삭제) 안내 공지에 따라 아래 ID회원은 2012.12.31 삭제됩니다. 1차 회원 삭제 대상자 ID (333명) a0708 ella2009 krosa77 sewook2100 a0de39052407 elninotw ksjhp17 sgc2001 a0qqpdxadd5422 fever372 kth719 shee1225 a1953apo2702 ffchc1...
    Date2012.12.26 Bymahru Views16,800
    read more
  2. No Image notice

    회원정보 정리작업(삭제) 안내 공지

    회원 가입후 지속적으로 사용을 안하고 있는 회원정보의 정리작업이 있습니다. 1차적으로 1년 이상 로그인 기록이 없는 회원의 정보를 불가피하게 임의로 2012.12.01부터 2012.12.31까지 삭제할 예정입니다. 불필요한 데이터보관을 방지 및 운영, 유지 관리를 ...
    Date2012.11.02 Bymahru Views13,095
    read more
  3.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17.수출업자 특별대우...밀수에 걸려도

    17.수출업자 특별대우...밀수에 걸려도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1969년 1월20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제1차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했다. 한번 더 수출전선에 박차를 가할 필요성이 있던 시기였다. 정부기록보존소에 있는 회의록 내용. "68년도 지역별 수...
    Date2008.07.30 Bymahru Views7,448
    Read More
  4.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16.좌초한 경재개발 수출로 돌파구

    16.좌초한 경재개발 수출로 돌파구 늦여름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64년 8월 어느날 오후 부산시범일동의 신발 생산업체 국제고무 사장실. 공장 한 구석에 칸막이를 세워 만든 공간은 요란한 기계소리와 한증막을 방불케 하는 무더위로 가득찼다. 허름한 ...
    Date2008.07.30 Bymahru Views7,346
    Read More
  5.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15.맨손의 재건 두달만에 청사진 완성

    15.맨손의 재건 두달만에 청사진 완성 "나는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을 애국자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두가지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첫째, 민주주의라는게 좋긴 한데 미국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도입했어요. 우리 실정에 맞지 않습니다. 둘째, 그 ...
    Date2008.07.12 Bymahru Views7,639
    Read More
  6.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14.발전 모델은 일본 추진은 군대식

    14.발전 모델은 일본 추진은 군대식 대통령 박정희 (朴正熙)에게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의 경제치적에 매료돼 있다. 박정희의 대통령 재임시 보인 경제개발에 대한 열정과 목표달성을 위한 숨돌릴 틈 없는 밀어붙이기,치밀한 사후 점검등의 독특...
    Date2008.07.12 Bymahru Views7,644
    Read More
  7.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13.가난 추방은 천명 필생의 업 간주

    13.가난 추방은 천명 필생의 업 간주 민간인이면서 '5.16 혁명주체세력' 으로 통하는 김용태 (金龍泰.72.전의원) 씨는 박정희 (朴正熙) 전대통령의 오랜 술친구였다. 그는 김종필 (金鍾泌.JP) 자민련총재의 서울대 사대 동창이자 같은 충남 출신이며 6.25 당시...
    Date2008.07.12 Bymahru Views7,583
    Read More
  8.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12.5.16 도왔지만 끝내 토사구팽

    12.5.16 도왔지만 끝내 토사구팽 여순 (麗順) 사건 발생 직전인 1948년 여름 서울 안국동의 요릿집 아향 (雅香) .30대 전후 청년장교들이 모여 단합대회를 갖고 있었다. 방 가운데 길게 놓인 술상을 마주보고 앉은 이들은 모두 만주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술잔...
    Date2008.07.12 Bymahru Views7,461
    Read More
  9.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11.독립군 토벌 기회조차 없었다

    11.독립군 토벌 기회조차 없었다 박정희를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것은 친일및 좌익연루 시비다. 친일성 논쟁의 발단이 된 때가 바로 1940년 2월부터 46년 5월까지의 6년3개월이다. 이 시절 그는 광복군과 관련된 비밀 광복군이었는가, 아니면 ...
    Date2008.07.12 Bymahru Views7,442
    Read More
  10.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10.광복군 참여 경력날조자에 대노

    10.광복군 참여 경력날조자에 대노 한해가 저물던 1967년 12월 어느날 저녁. 서울의 중심가 명동거리에서 한 이방인이 당시 최고권력자 박정희 (朴正熙) 의 이름을 들먹이며 일본어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그가 한 골목길 모퉁이를 지...
    Date2008.07.12 Bymahru Views7,477
    Read More
  11.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9.첫결혼 실패가 '군인의길' 재촉

    9.첫결혼 실패가 '군인의길' 재촉 살을 에는 늦겨울 바람이 문경 (聞慶) 골짜기를 휘몰아치던 1940년 2월 중순 어느 날. 문경 보통학교 바로 옆 버스정류장 자리에선 만주 (滿洲) 로 군인 (軍人)가는 한 젊은이를 위한 환송회가 열렸다. 행사의 주인공은 바로 ...
    Date2008.07.12 Bymahru Views7,225
    Read More
  12.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8.동기 불분명한 군인으로의 변신

    8.동기 불분명한 군인으로의 변신 1942년 3월23일. 만주국 수도 신징 (新京) , 지금의 창춘 (長春) 교외 남강대 (南崗臺)에서는 만주군관학교 제2기 예과졸업식이 성대히 열리고 있었다. 만주국 황제 푸이 (溥儀)가 왜소한 체구에 까무잡잡한 얼굴의 졸업생도 ...
    Date2008.07.12 Bymahru Views7,350
    Read More
  13.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7.박정희 황태성 제물삼아 색깔시비 탈출

    7.박정희 황태성 제물삼아 색깔시비 탈출 황태성 (黃泰成) 사건은 한때 간첩사건으로 발표됐던 북 (北) 의 밀사 (密使)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박정희 (朴正熙) 의 좌익경력에 연유한 특이한 사건으로 민정이양 (民政移讓) 을 앞두고 군부와 민간정치세력 사이에...
    Date2008.07.12 Bymahru Views7,251
    Read More
  14.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6.북 5.16나자 "박정희 연구" 긴급회의

    6.북 5.16나자 "박정희 연구" 긴급회의 박정희 (朴正熙) 는 누구인가. 1961년 5월16일 새벽 서울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에서 던진 의문이다. 쿠데타 세력은 좌우 어느쪽인가, 친미 (親美) 적인가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갖...
    Date2008.07.12 Bymahru Views7,345
    Read More
  15.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5.이후락 북에서 놀림당하고 온것 같아

    5.이후락 북에서 놀림당하고 온것 같아 이후락 (李厚洛.중앙정보부장) 은 김일성 (金日成.북한 수상) 의 '겁주기 전략' 에 당한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에게 기어이 한 건 올리겠다는 개인적 정치야망이 표출된것인가. 72년 5월4일 0시15분 한...
    Date2008.07.12 Bymahru Views7,369
    Read More
  16.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4.김일성 이후락 불러 박정희 의중 타진

    4.김일성 이후락 불러 박정희 의중 타진 72년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마침내 냉각된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여는 결단을 내렸다. 4월26일 그동안 극비리에 진행된 북한과의 접촉 결과를 보고받고 이후락 (李厚洛) 정보부장에게 특수지역 출장에 관한 친필훈령...
    Date2008.07.12 Bymahru Views9,086
    Read More
  17.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3.김일성 박정희 속셈 읽고 선수

    3.김일성 박정희 속셈 읽고 선수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권좌에서 밀려나 주일 (駐日) 대사로 나가있던 이후락 (李厚洛) 을 70년 12월21일 중앙정보부장으로 불러들여 두가지 과제를 맡겼다. 첫째는 국내 정치체제의 대변혁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과 대화를 ...
    Date2008.07.12 Bymahru Views8,171
    Read More
  18.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2.경제개발 시간벌기 위한 북 발목잡기

    2.경제개발 시간벌기 위한 북 발목잡기 1970년 8월15일 광복 제25주년 경축행사가 열리고 있는 중앙청 앞 광장. 3만여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평화통일의 기반조성을 위한 접근방법에 관한 구상을 밝히겠다" 고 운을 뗀 뒤 이렇게 역...
    Date2008.07.12 Bymahru Views8,939
    Read More
  19.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 1.북 중화학 우위 선전영화에 자존심 손상

    1.북 중화학 우위 선전영화에 자존심 손상 '10월 유신(維新)'이라는 대 정변을 몇 달 앞둔 72년 2월 하순 어느 날 오후 중앙정보부 회의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을 비롯한 내각, 청와대비서관, 공화당 간부 등 정부, 여당 관계자 30여명이 북한 선전용 산업영...
    Date2008.07.12 Bymahru Views7,716
    Read More
  20. No Image

    건축의 르네상스 제11장 전체 작품과 건물의 모형을 만들 때 하나에 그쳐서는 안된다.

    제11장 전체 작품과 건물의 모형을 만들 때 하나에 그쳐서는 안된다. 반대로 건물의 모든 주요한 부분을 보여 주어 실제 작업에 편의를 줄 수 있는 여러 모형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좋다. 나는 당신이 만들려 하는 전체 건물의 일반모형을 만드는 것이 좋다고...
    Date2008.01.09 Bymahru Views7,803
    Read More
  21. No Image

    건축의 르네상스 제10장 건축가는 자신의 의도를 평면도나 입면도 및 모형을 통해 건물 전체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10장 건축가는 자신의 의도를 평면도나 입면도 및 모형을 통해 건물 전체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나는 왕이나 왕자, 그리고 대제후의 건물뿐 아니라 평민이나 하층민의 건물에서 여러 오류와 과오를 발견했다. 꼼꼼히 계획을 세우지 않고 소홀...
    Date2008.01.09 Bymahru Views8,178
    Read More
  22. No Image

    건축의 르네상스 제9장 중앙집중식 건축양식과 원형의 가치

    제9장 중앙집중식 건축양식과 원형의 가치 사원은 일반적으로 원형이거나 사각형이며 여섯 개에서 여덟 개, 경우에 따라서는 더 많은 각을 가지게 된다. 각은 동심원의 테두리에 자리잡게 된다. 여기에 십자형을 비롯하여 건축가들이 자신의 도면에 적용하고...
    Date2008.01.09 Bymahru Views7,926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