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이후락 북에서 놀림당하고 온것 같아
이후락 (李厚洛.중앙정보부장) 은 김일성 (金日成.북한 수상) 의 '겁주기 전략' 에 당한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에게 기어이 한 건 올리겠다는 개인적 정치야망이 표출된것인가. 72년 5월4일 0시15분 한밤중에 갑작스레 이뤄진 이후락과 김일성의 첫 만남은 아직도 이같은 의혹을 씻지 못하고 있다. 당일 李가 金이 제시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3대원칙을 서울과 상의없이 덜컥 받은 것은 너무 많은 후유증을 남겼기 때문이다.
후일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회담에서 金은 李를 데리고 논 흔적이 있다. 김일성은 이후락을 '영웅이오' '최고의 애국자요' 하며 치켜세웠다가 "당신들, 미국과 일본의 앞잡이가 아닌가" 라고 몰아붙이는등 노련한 술수를 구사했다. 이에 대해 李는 "우리끼리 자주적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 朴대통령의 뜻" 이라며 "결코 미국과 일본의 앞잡이가 아니다" 는등 방어적 자세를 취했던 것같다.
이런 과정에서 金은 "외세배격하고 싸움하지 말며 민족이 단결하고 그밖에 공산주의.자본주의, 이런 것은 다 덮어두자" 고 불쑥 제안했고, 李는 깊은 생각없이 "세가지가 가장 기본"이라고 맞장구쳤다는 것이 정설이다. 李가 金과 전격 회동하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중앙정보부 간부들이 李의 신변안전문제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朴대통령도 李의 신변안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朴대통령 입장에서 李의 방북 (訪北) 은 신중한 판단과 용단 (勇斷) 이 필요했다. 반공법 (反共法) 등 법적 문제는 대통령의 통치권 차원에서 해명될 수 있다고 해도 국가의 정보책임자를 극비리에 북한에 보냈다가 억류되면 자칫 정권자체가 흔들릴 악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야회담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협의조정국장 정홍진 (鄭洪鎭.63.송원장학회이사장) 은 즉시 서울로 상황보고를 했다. 회담이 무사히 끝났다는 전화연락에 서울은 일단 안도했다.
오전9시 보고를 받은 朴대통령은 "수고 많이 한다고 전해라" 는 짤막한 한마디뿐이었다.
북한 역시 전날에 이어 다시 노동당 정치위원회 확대상무위원회가 열렸다. 김일성.최용건(崔庸健).김일 (金一) 등 정치위원과 김중린 (金仲麟.대남 사업담당비서) 등 대남 실무자들이 참석해 金과 李의 회담결과를 토의하는 자리였다. 당시 이 회의에 실무진의 한사람으로 배석한 전 북한 고위관리 (차관급) 황일호 (黃日鎬.75.해외거주) 씨의 증언은 이날 오고간 대화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박정희 알고보니 괜찮군”
김일성 : (미소지으며) 이후락이 나보고 영웅이라고 하고 말이야. 애국심을 따라 배우겠다고 하며 아주 좋아했어. 그를 직접 만나 들어보니 朴대통령이란 사람이 우리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민족적 양심이 있어 보이더만.
김중린 : 朴대통령의 형이 남로당 (南勞黨) 출신인데 46년 대구 '10월봉기' 때 죽었습니다.
수상님 탄생 60주년인 올해안에 통일의 돌파구가 열리고 남북관계가 굉장히 잘 될 것같습니다.
최용건 : 신중하지 못하구만요. 대남 사업부문 간부들이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같아. 어제는 유장식동무가 호들갑 떨더니 오늘은 대남 사업담당비서까지 그러면 어쩝니까.
김일 : 분위기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남쪽이 적극적으로 나오고 아주 우호적이라 하니 대남사업 간부들이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최용건 : 다른 사람들이야 이후락의 말을 듣고 그런다지만 대남 담당자들은 호들갑을 떨어선안돼요.
김일성 : 분위기는 괜찮은 것같아. 통일 3대원칙을 제안해 한방 먹였어. 오후에 다시 만날 때 3대원칙에 기초해 공동성명을 작성하는 문제를 논의하는게 좋겠어.
李.金회담에서 李가 통일 3대원칙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북한 수뇌부가 대단히 고무됐음을 알수있는 대목이다. 李가 돌아와 회담의 자초지종을 들은 서울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어두웠다. 특히 평양과의 연락을 주관하고 있던 중정 북한국 간부들이 합의내용에 반발했다.
당시 중정 협의조정부국장이었던 김달술 (金達述.67.통일원 비상임연구위원) 씨의 증언.
"정홍진씨가 경과보고를 하자 일부 간부들은 '평화야 우리의 안이고 자주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민족대단결까지 받아들인 것은 북한의 전략에 넘어간 것 아닌가' 라고 비판했어요. 정보부장이 합의한 사항이라 공개적으로 반대가 표출되지는 않았지만 우려가 적지 않았어요. "
당시 가장 강력히 반발했던 중정 북한국장 강인덕 (康仁德.65.극동문제연구소장) 씨의 증언.
"미군철수를 의미하는 '자주' 가 3대원칙의 첫머리로 합의됐다길래 대단히 화를 냈어요. 북한 대남전술의 기본이 남한을 미제 (美帝) 의 괴뢰정부로 규정, 주한 (駐韓)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공동문안을 작성할 때는 차선책으로 자주보다 평화를 앞세우자고 얘기했어요. 평화가 보장되면 미군이 나가도 될테니까요. 그러나 그점은 벌써 결정됐다고 하길래 할 수 없구나 생각했어요. "
실제로 중앙정보부의 실무팀이 작성한 이후락 방북대비 준비안에는 평화통일만을 제안하도록 돼 있었다. 朴대통령이 李의 방북을 승인하면서 내린 친필훈령에도 "조국의 통일은 궁극적으로 정치적 회담을 통한 평화적 통일이어야 한다" 는 원칙만이 제시돼 있었다. 당시 朴대통령이 지시한 내용의 핵심은 '단계적 접근을 통한 평화통일론' 이었다.
"우선 남북적십자회담을 촉진시켜 이산가족찾기등 인도적 문제를 빠른 시일안에 해결한다.
다음 단계로 경제.문화등 비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회담을 연다. 최종단계로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남북간 정치회담을 갖는다" 는 것이 朴대통령의 복안이었다.
朴대통령의 친필훈령에는 '제반 (諸般) 문제의 단계적 해결' 이란 부분에 밑줄까지 쳐져 있었다. 그런데 李는 金과의 첫날 회담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자주.민족대단결의 원칙에 합의하고 사후적으로 서울에 연락해 추인받은 것이다.중앙정보부 북한국의 실무간부들이 당황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李와 金은 5월4일 점심식사후 또 한차례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李는 3대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상대방을 중상.비방하지 말고 일방적 대외선전적 통일제안을 하지 않으며, 무력으로 상대방을 괴롭히지 말자고 요구했다.
金은 "서로 비방 안해야지요. 그것 없앱시다" 라고 응수했다.
이날 저녁 '적지 (敵地)' 에서 빠져나와 서울에 도착한 李는 곧바로 청와대로 가 朴대통령에게 두차례 회담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朴대통령은 합의사항에 자주.민족 대단결원칙이 포함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7.4남북공동성명 직후 朴대통령으로부터 당시의 심정을 직접 들은 이동원 (李東元.71.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전외무장관의 증언.
"朴대통령은 '이북이 얘기하는 자주라는 것은 미국 나가라는 소리 아닌가. 아무래도 이후락이 이북에 가서 놀림당하고 온 것같아' 라며 李가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을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어요. 7.4남북공동성명에 朴대통령이 사인하지 않고 李가 사인한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
朴대통령은 5월31일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한 박성철 (朴成哲) 북한부수상을 만난 자리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부터 잘 해 남북간에 쌓인 장벽과 불신감을 해소해야 한다" 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북쪽의 주장을 일단 수용하면서도 신뢰회복이 선행돼야 한다는 단서를 단 것이다. 朴대통령은 경제개발을 하고 평화를 지킬 힘을 기르는데 시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대화를 열길 원했다.
“김일성은 못 믿을 사람”
그때문에 李의 평양밀행 성과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게 분명하다. 박성철의 서울 방문때 김일성에게 줄 선물로 비서진은 전자제품을 선택하려 했으나 朴대통령은 그럴 것 없다면서 흔한 조선자기 하나를 선택했다.
그러면서 朴대통령은 혼자 말하듯 "김일성은 믿을 수 없어" 라고 했다는 것이 당시 경제2수석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씨의 증언이다.
그뿐 아니다. 그후 朴대통령은 남북회담에 관해 李에게 주었던 전권을 거둬들였다. 7.4공동 성명에 의거한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면서 朴대통령은 李의 의견을 묻지 않고 李가 버거워하는 장기영 (張基榮) 전부총리.최규하 (崔圭夏) 대통령특별보좌관을 대표에 임명했다. 李의 평양밀행은 朴대통령이 李에게 맡긴 마지막 비밀과제가 됐다. 이런 곡절속에서도 통일 3대원칙은 7.4남북공동성명으로 발표됐다.
그 배경에 대해 강인덕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부분적으로 흡족하진 않았지만 이 성명이 쓸모있다는 쌍방 모두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통일 3대원칙만 합의한다면 남한안에 광범위한 반미.반정부 통일전선 형성이 용이해질 것이라고 확신했어요. 반면 우리 정부는 북한측의 대남 (對南) 무력도발을 일단 억제할 수 있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어요. "
남북한의 동상이몽 (同床異夢) 으로 시작된 남북대화는 1년도 채 안돼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됐다.
그러나 70년 8.15평화통일선언 이후 4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朴대통령은 일단 대화의 통로를 열어 60년대 후반 최고조에 달했던 북한의 무력도발을 막고 경제성장을 위한 시간을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