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김일성 이후락 불러 박정희 의중 타진
72년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마침내 냉각된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여는 결단을 내렸다.
4월26일 그동안 극비리에 진행된 북한과의 접촉 결과를 보고받고 이후락 (李厚洛) 정보부장에게 특수지역 출장에 관한 친필훈령을 내린 것이다.
"남쪽정세가 절대 우위라는 자신으로 대화에 임함으로써 북이 우위라는 환상적 기 (氣) 를 꺾고 평화통일을 위한 여러 의견을 교환해 볼 것. 이번 여행에서는 주로 상대방 요로 (要路)의 사고방식과 북한의 실정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둘 것" 이 그 요지였다.
"김영주가 만나잡니다"
이후락의 북행은 남북적십자회담의 막후 비밀접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측 정홍진 (鄭洪鎭.중정 협의조정국장) , 북측 김덕현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지도원) 은 비밀교섭을 통해 고위급 회담을 위한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양측은 교섭 4개월만인 72년3월20일 이후락과 김영주 (金英柱) 간의 고위급 직접회담에 완전합의했다. 정홍진은 3월28일 고위급 회담의 실현을 위한 실무작업을 위해 먼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했다. 그는 노동당 조직부장 김영주와 두차례 만났다. 김영주는 鄭을 한껏 치켜세우며 朴대통령과 당시 김일성 (金日成) 수상 (72년11월이후 주석으로 승격) 의 정상회담까지 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31일 오후 서울 도착 즉시 정홍진은 이후락과 함께 청와대로 달려갔다. 鄭씨가 전하는 그날의 대화내용. "대통령각하, 북쪽의 반응이 대단히 적극적입니다. 김영주가 이후락부장과 평양 또는 원산에서 만나자고 제안했습니다. 다음달에 김영주의 친서를 가진 사람이 서울에 올 것입니다.
" "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로) 수고했어. 그래 평양을 가본 느낌이 어떤가?" "전반적으로 주민들이 느릿느릿하고 측은해 보였습니다. 사진에서 본 노농적위대의 생기있는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고 저런 사람들이 총을 메고 있으면 별로 무서울 것이 없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회담이든 뭐든 밀어붙이면 자신이 있습니다. "
"鄭군, 공산당을 너무 얕잡아 봐선 안돼. 공산당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신중하게 추진하라구. 고생이 많았어. 오늘은 마음 푹 놓고 술 한잔 하게. "
다음달 19일 예정대로 김덕현은 김영주의 친서를 휴대하고 3일동안 서울을 비밀리에 방문하고 돌아갔다. 이후락과 김영주간의 고위급회담 준비가 막바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로부터 6일이 지난 5월2일 이후락은 판문점을 넘어 평양에 도착했다.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 낸 이후락의 3박4일간 평양밀행중 클라이맥스는 이후락과 김일성의 회담.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밤중 갑작스럽게 이뤄진 두사람의 회담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후락도 입을 열지 않고 있고 김일성은 죽었다. 이 미스터리를 푸는데 망명한 황일호 (黃日鎬.75.해외거주) 씨가 25년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후락이 5월3일 저녁 평양대극장에서 혁명가극을 관람한 후 김영주와의 2차회담을 마치고 모란봉초대소에 돌아온 것은 밤 10시10분. 같은 시각 김일성은 김영주를 참석시킨 가운데 당 정치위원회 확대상무위원회 회의를 열고 있었다.
대남 (對南) 관계를 다시 총체적으로 검토하는 자리였다. 그날 밤 김일성이 왜 예고없이 12시가 넘어서야 이후락을 만났는지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김영주는 이후락과의 두차례 회담결과와 그동안 지켜본 행적에 대해 보고했다.
회의참가자는 김일성.김일 (金一).최용건 (崔庸健).최현 (崔賢) 등 정치위원과 김영주.김중린 (金仲麟).유장식 (柳章植) 등 대남 실무책임자들이었고, 황일호씨도 실무자로 배석했다.
黃씨의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본다.
김일성 : 회담 진행상황은 어떤가.
김영주 : 이후락이 미국의 사주를 받은 것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곳을 관람하는 태도를 보니 특별히 책잡을 데가 없습니다.
유장식 : 남쪽 대표단의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수상동지를 '최고의 애국자' 라고 말했습니다. 대극장에 가서 혁명가극을 관람할 때는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이번에 뭔가 성과를 내려고 조바심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진지합니다.
김동규 : (화가 난 목소리로) 당신 그 사람 속에 들어갔다 나왔소. 그가 무슨 마음을 품고 왔는지 그 사람 말만 듣고 어떻게 알아. 만경대.농업전람관.가극 관람태도가 좋다고 거기에 넘어가 좋다고 하지 마시오.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인데 우리 동지를 얼마나 죽였는지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독침이나 폭탄을 갖고 오지 않았다고 자네가 보장할 수 있는가.
유장식 : 제가 경솔했습니다.
최용건 : 그래도 오늘 저녁에 만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옛날 빨치산할 때 적과 싸울 때도 담판을 하지 않았습니까.
김일성 :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나타난 태도로 봐선 나무랄 것이 없는 것같군. 이후락이 "남북이 싸우지 말고 통일하자. 조선문제에 3자가 개입해선 안된다" 고 얘기하지 않았는가. 이번에 우리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원칙을 제안하면 저들이 받을 것같다. 이번에 이 원칙을 매기자. 그러기 위해선 두번 정도는 만나야 하니 시간이 별로 없다. 오늘 밤에 만나는 것이 좋겠다.
회의는 1시간30분 정도 걸렸고 이후락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가 집중 토의됐다. 이후락을 어리둥절하게 했던 한밤중의 회담은 이렇게 상무위원회 회의를 열어 전격적으로 결정됐던 것이다. 일단 이후락을 만나기로 결정한 김일성은 유장식을 불러 이후락을 데려오라고 하자면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황일호씨의 증언. "김일성은 유장식을 직접 불러 '네가 직접 가서 데려오라. 이후락이 준비하기 전에 직접 들어가서 데려오라. 그래야 몸에 뭐를 지니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데리고 올 때 모란봉 뒷길로 돌아서 오되 절대로 목적지를 말하지 말고 그의 행동을 주시하라'고 지시했어요. "
김일성의 지시를 받은 유장식은 바로 모란봉초대소로 가 다짜고짜 문을 두들겨 이후락을 깨웠다.
"부장선생,빨리 옷을 입으시오. 갈 데가 있소" 라며 법석을 떨어 정신을 못 차리게 했다.
이후락은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가져간 청산가리가 들어있는 양복을 입고 따라 나섰다.
이후락이 김일성관저에 이르는 대목에서는 증언이 엇갈린다.
"죽이려면 술이나…"
이후락을 수행했던 정홍진씨는 "李부장과 동승했고 차안에서는 말이 없었다" 고 말했다.
그러나 황일호씨의 증언은 다르다.
"관저에 갈 때 유장식과 이후락만 타고 갔어요. 정홍진씨가 항의해 다른 수행원들은 함께 따라갔지요. 이후락은 모란봉 오솔길로 돌아갔기 때문에 오히려 鄭씨 일행이 먼저 관저에 도착해 기다렸지요. " 겁을 주기 위해 평소 가던 대동강변 포장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모란봉 뒤쪽 산길을 이용했던 것이다.
황일호씨는 李.金회담이 끝난 후 유장식으로부터 이후락과 나눈 대화내용에 대해서도 들었다고 전했다.
계속되는 그의 증언. "이후락은 유장식이 갑자기 들이닥쳐 목적지도 말하지 않고 데려 가자 오싹했던 모양입니다.
李가 떨고 있는 기색을 보자 柳는 운전사에게 '기사동무, 부장선생이 추우신 모양이니 난방을 넣어' 라고 지시했어요. 그러자 李가 '비가 와서 그런지 날씨가 쌀쌀하군요' 라고 대답했어요. 조금 가다가 李가 '죽이려면 술이나 한잔 줬으면 좋겠소' 하니, 柳가 '죽을 사람이 무슨 술이오' 라고 겁을 줬어요. 차가 서고 내린 다음에야 '부장선생, 여기가 수상관저입니다' 라고 가르쳐줬어요. "
유장식이 했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이후락이 그날 밤 관저로 가는 동안 상당히 위축됐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