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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일성 박정희 속셈 읽고 선수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권좌에서 밀려나 주일 (駐日) 대사로 나가있던 이후락 (李厚洛) 을 70년 12월21일 중앙정보부장으로 불러들여 두가지 과제를 맡겼다.
첫째는 국내 정치체제의 대변혁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과 대화를 열 수 있는가를 타진하라는 것이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북한의 무력도발도 다소 주춤해진 것으로 보아 북한 내부에도 무엇인가 변화가 있는 것같다. 대화가 가능할 것인지 연구해 보라" 는 대통령 지시는 결연했다.
이후락은 "중앙정보부는 국가안보의 보루다. 국가안보는 대통령의 안보다. 대통령을 보위하는 것은 바로 국가를 보위하는 것이다. 우리는 朴대통령을 보위하는 전위대다" 고 선언했다.
취임인사라기보다 3선개헌의 와중에서 일시 밀렸던 이후락의 대통령 '그림자 자리' 복귀선언이었다.
김형욱 (金炯旭) 정보부장 실각후 김계원 (金桂元) 부장 아래서 침체해 있던 남산 (정보부)이 새로운 실력자를 맞아 힘의 회복을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다음날 확대간부회의에서 이후락은 좀더 구체적인 북한 연구과제를 제시했다.
"지금 북한부서의 활동이 느슨하다. 朴대통령의 8.15선언이 넉달이나 지났음에도 아직 북한의 대응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북한의 사정은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이 없다. 북한을 이기기 위해서는 북한을 알아야 한다. 한부서에 예산지원을 늘리겠다. 예산은 걱정마라.
앞으로 간부회의 때는 북한동향 보고를 반드시 하도록 하라. 북한부서만 아니고 정보부 모든 간부는 북한전문가가 돼야 한다. "
그는 북한부서를 따로 불러 "대북 (對北) 협상을 제안하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연구.제시하라" 는 극비지시를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이었던 정홍진 (鄭洪鎭.63.현 송원장학회 이사장) 씨의 증언.
"이후락부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중정 북한국을 중심으로 특수임무팀이 구성됐어요. 김달술(金達述) 부국장.정운학 (鄭雲鶴) 과장등이 핵심 실무자였지요. 보안유지를 위해 서울 이문동 인근의 호텔을 잡아 놓고 극비리에 연구작업을 진행했습니다. "
특수임무팀은 체육.문화.경제교류등 남북한간의 갖가지 교류방안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격론 끝에 당시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남북 이산가족찾기사업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또 남북적십자회담이란 대화방식을 채택키로했다.
정홍진씨는 "적십자회담이 인도주의적 회담이기 때문에 서로 체면이 설 수 있고 국제관례도 있다는 점이 감안됐다" 고 설명했다.
이산가족문제라면 우리측에 불리할게 없고 국민으로부터 폭넓은 호응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도 나왔다.
특수임무팀이 이산가족찾기를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할 것을 건의하자 이후락부장은 곧바로 구체적인 계획과 준비를 지시했다.
7월초 최종안이 마련됐고 李부장은 이를 朴대통령에게 브리핑했다.
朴대통령은 정치적 파장을 우려해 "극비리에 신중하게 추진하라" 고 지시했다.
최두선 (崔斗善)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제안연설문 초안 준비를 마친 것은 7월 하순. 제의의 D데이는 71년 8월15일 광복절. 그러나 뜻밖의 일이 생겼다.
우리의 준비가 막바지에 달했을 무렵 북한이 먼저 선수를 치고 나왔던 것이다.
8월6일 김일성 (金日成.북한수상) 은 캄보디아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를 환영하는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남조선의 모든 정당.사회단체및 개별인사들과 아무때나 접촉할 용의가 있다" 고 선언했다.
집권여당을 대화 상대로 포함시켜 "대화를 하자" 는 메시지였다.
북한의 이같은 기습제의는 어떻게 나왔을까. 우연일까 아니면 남쪽의 준비를 간파한 것일까. 당시 남북관계에 관여했다가 해외로 망명한 황일호 (黃日鎬.75.해외거주) 씨는 그 비밀을 26년만에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71년 미국 중앙정보국 (CIA) 과 선이 닿아있는 한국인 재미학자 여러명이 북한을 방문했어요. 그들이 북의 생각을 떠보면서 남쪽이 적십자회담 제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알려주었지
요. 7월 하순에는 재일조총련으로부터 적십자회담 제의가 8월15일로 잡혔다는 정보가 평양에 날아들었어요. "
북한당국이 8월15일 서울측의 적십자회담제의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먼저 대화제의에 나섰다는 증언이다.
그런데 김일성은 68년 청와대 기습사건을 정점으로 한 강경 무력도발에서 왜 갑자기 남북대화로 선회했을까. 남측의 적십자회담 제의에 관한 정보를 사전 입수하고 선수를 쳤다는 증언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김일성의 의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 부분을 88년 귀순한 김정민 (金正敏.50.전노동당조직지도부 직속 대양무역상사장) 씨의 증언을 통해 실마리를 찾아보자.
"69년 1월6일부터 14일까지 열린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회의에서 대남무력도발의 책임을 지고 민족보위상 김창봉 (金昌奉.대장).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 (許鳳學.대장) 등 군핵심인사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습니다.
이에 앞서 68년 8월 남쪽에서 '통일혁명당사건' 이 터져 북한이 남조선혁명의 주력으로 상정해 심혈을 기울여 조직한 지하당이 붕괴됐어요. 통일이 멀지 않았다고 판단되던 시기에 북한의 군최고위층에 구멍이 뚫리고, 남쪽의 '혁명역량' 이 붕괴된 겁니다. 당연히 내부를 정비할 시간이 필요하게 된 겁니다. "
당시 북한정세를 이해하는데는 69년 1월 인민군 당위원회 회의를 비중있게 분석할 필요가있다.
북한은 70년대를 적화통일의 연대로 설정하고 60년대부터 4대 군사노선을 앞세워 군비증강에 대대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기습공격을 위한 특수게릴라부대를 양성하고 사회혼란과 거점확보를 위해 남한에 빈번히 침투시켰다.
통일을 대비해 남쪽에서 활동할 10만여명의 당원교육도 끝마친 상태였다.
북한은 미군이 베트남전쟁에 깊숙이 빠져들어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더라도 개입하지 못할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한.일협정 반대운동, 6.8부정선거 반대투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68년의 1.21사태나 울진.삼척 무장공비사건은 이런 분위기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패한 청와대기습은 노동당에 충격을 주었던 것같다.
황일호씨의 증언. "1.21사태가 알려지자 허봉학은 자기 부서는 관계없다며 '특수정찰국쪽에서 한 것같다' 고 김일성에게 보고했어요. 즉각 김창봉에게 사건 내막을 조사, 보고하라는지시가 떨어졌지요. 그는 1월23일 푸에블로호사건이 터져 긴장이 고조되자 보고를 차일피일 미뤘어요. 한달쯤 뒤 그는 '1명 체포, 3명 복귀, 나머지는 다 희생당했다' 고 보고했어요.
김일성은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다' 고 질책하며 '다시는 이같은 사태가 없도록 하라' 고 지시했어요. "
그런 일이 있고 몇달 뒤 김일성은 김창봉등이 김영주 (金英柱) 당조직부장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김영주에게 군검열을 지시했다.
당 핵심간부 2백여명으로 구성된 군 검열단의 두달에 걸친 검열결과 김창봉등 군강경파들이 김영주를 밀어내고 2인자 자리를 차지하려 했음이 드러났다.
그 마스터 플랜은 '남조선 해방과 통일전략계획' 과 연관돼 있었다.
이 계획에는 '제2의 6.25계획' 으로 불릴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남한의 사회혼란과 통치기구 마비를 틈타 대중폭동을 일으켜 '임시혁명정부' 를 선포하고 이를 기반으로 총선거를 실시, 적화통일을 완성한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어요. 1.21사태나 울진.삼척사건등은 바로 남쪽의 통치기구를 마비시키려는 것이었죠. 그들은 결정적인 공을 세운뒤 김영주를 몰아내고 김일성 다음의 2인자, 즉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어요. "
당시 북한 군검열단에서 활동했던 黃씨의 증언이다.
이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자 김일성은 인민군 당위원회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회의 첫날 보고자로 나선 오진우 (吳振宇.대장) 총정치국장은 자신의 상관인 김창봉.허봉학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吳는 이들이 군내부의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방해했고 당의 4대 군사노선을 지연시켰으며 군내기강을 문란케 했다고 공격했다.
김창봉은 이런 비판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공작선이 붙들리거나 격파당하기도 했지만 이웃집 드나들듯이 성공한 공작사례가 더 많았다. 무장소조활동에서도 체포된 것 못지않게 무사귀환한 예가 더 많다.
우리는 남조선의 내부허점을 이용하려고 했다. 이 계획은 옳다" 고 항변했다.
회의 마지막날 김일성은 '군에 대한 당통제 강화' 란 연설을 했다. 매우 화가 난 목소리였다
고 한다.
그는 "김창봉.허봉학등은 군대 내에서 당의 정책과 당의 노선.사상을 다 뒤집어 놓았다" 며 "당을 무기력하게 만든 놈들은 이유불문하고 모가지를 떼야 한다" 고 열을 냈다.
김일성은 아직 적기 (適期)가 아닌데 무장게릴라를 대거 남쪽에 내려보내 특수부대의 상당부분을 희생시켰던 사실에 화가 났던 것이다.
김일성은 김창봉등 군강경파들을 대거 숙청하고 내부정비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대화와 전쟁준비를 병행하는 화전 (和戰) 양면전략으로 선회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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