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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경제개발 시간벌기 위한 북 발목잡기
1970년 8월15일 광복 제25주년 경축행사가 열리고 있는 중앙청 앞 광장. 3만여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평화통일의 기반조성을 위한 접근방법에 관한 구상을 밝히겠다" 고 운을 뗀 뒤 이렇게 역설했다.
"…긴장상태의 완화 없이는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에의 접근은 불가능한 것이므로 무엇보다 먼저 이를 보장하는 북괴의 명확한 태도표시와 그 실천이 선행돼야 합니다. <중략> 이러한 우리의 요구를 북괴가 수락,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인정할 수 있을 때나는 인도적 견지와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으며 남북간에 가로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도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 시행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는 바 입니다. "
朴대통령은 이날 경축행사 직후 있을 서울 남산 제1호 터널 준공식 참석을 앞두고 가벼운 흥분을 가라앉히며 준비된 연설문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는 다음 대목에서 한껏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와 공산독재중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으며 그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용의는 없는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
박정희의 이같은 경축사는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는 셈이 됐다.
뿐만 아니라 휴전선상의 장벽철폐 용의를 조건부로나마 밝히고 평화적인 선의의 경쟁을 공식제의했다는 점에서 국내외에 엄청난 충격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선의의 체제경쟁 제의 매클로스키 미국무부 대변인은 8월20일자 성명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취해지는 모든 조치를 환영한다" 는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밝혔다. 당시 국내 상황에 비춰볼 때 이같은 획기적인 발표는 실정법상 형사소추의 대상이 되지 않는, 오직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초헌법적인 통치행위였다.
이 무렵 국내에서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등 대공 (對共) 방위를 위한 법적 장치가 시퍼렇게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병사들은 아침 점호때마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을 외치며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朴대통령 자신도 "통일노력의 본격화는 70년대 후반에나가능할 것" 이라는 점을 수차에 걸쳐 역설해왔고 통일은 '승공이나 멸공' 에 의해서만 이룩될수 있다는 생각을 일관되게 견지해왔던 터였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왜 이처럼 자기모순적인 평화통일 구상을 결심하게 됐을까. 그것은 과연 朴대통령의 독자적인 구상이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사전 협의아래 이뤄진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8.15선언은 미국의 의도와 대북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朴대통령의
전략이 맞아 떨어져 추진된 일종의 '시간벌기 전략' 인 셈이었다. 그러나 선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겸 대변인이었던 강상욱 (姜尙郁.70.육사9기.한국물류센터회장) 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70년 1월초 각하께서 나와 비서실장을 불러 갔더니 '분야별로 70년대 전망과 비전을 제시해 올리라' 고 지시하셨습니다. 특히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여는 방안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후 4월께 제가 '올해 광복절 때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 과감한 제안을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라고 제안을 했지요. 그랬더니 '8월이면 너무 빠른 것 아닌가' 하시면서 관계기관과 상의해 만들어보라고 하셨습니다. " 강상욱씨는 우선 초안을 만들기 위해 윤석헌 (尹錫憲) 외무차관과 강인덕 (康仁德.65.극동문제연구소장) 중앙정보부 해외정보국장을 자택으로 불러 朴대통령의 구상을 전달하고 기획안 작성에 착수했다.
며칠후 오전10시 청와대 비서실장실에서 실무자회의가 소집됐다. 그러나 회의는 처음부터 거센 반발에 부닥치고 말았다.
이날 회의 상황을 강인덕씨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가장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것은 법무부 쪽 사람들이었어요. 이호 (李澔.97년 작고) 법무장관, 신직수 (申稙秀.70.전 중앙정보부장) 검찰총장, 한옥신 (韓沃申).이종원 (李鐘元.71.전법무장관) 씨등 쟁쟁한 검사들이 '어떻게 북괴를 대화 상대로 인정할 수 있느냐' 며 반론을 폈습니다. '현행 반공법상 남북대화 제안은 위법인데 대통령께서 대화선언을 하게 되면 당국의 통제력이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는 거였죠.
뜻밖의 상황에 부닥친 강상욱 대변인은 "남북문제를 풀려면 결단이 필요하다. 법이야 결심만 하면 바꿀 수 있는 것 아니냐. 현행법 테두리만 자꾸 고집하면 영원히 대화가 안된다" 며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및 법무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姜대변인의 사상이 의심스러워…" 하며 사뭇 감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는등 분위기가 살벌했다고 姜씨는 당시를 회고했다.
오전 내내 결론이 나지 않자 실무진은 국수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장소를 대통령 집무실로 옮겼다. 朴대통령은 시종일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姜씨의 계속된 증언. "외무부쪽에서는 대통령의 결단이 중요하다고 했고 법무부쪽에서는 여전히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고집했습니다.
중앙정보부쪽에서는 '할수도 있는 시기가 되지 않았는가' 라고 다소 모호한 입장을 표시했어요. " 결국 오후 6시가 넘어도 진전이 없자 이윽고 朴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이번 광복절날 남북관계에 물꼬를 트는 모종의 선언을 꼭 하고 싶다. 현행법상 문제가 있지만 내 결심이 서면 가능하지 않겠나. 대화를 구체화하는 쪽으로 조치를 취해 달라" 고 참석한 장관들에게 당부했다.
"대화 물꼬트고 싶다" 8.15선언은 무엇보다 1, 2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완수에서 얻은 朴대통령의 대북 (對北)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무렵 朴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지속적인 고도성장과 남북간 긴장완화였다. 고도성장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남북간 긴장이 해소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의 대남 적화노선을 어떻게든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김일성을 모종의 미끼로 유인해 일단 시간을 확보해 놓은 다음 경제력을 월등하게키워 놓으면 통일은 싸우지 않고도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이 朴대통령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박정희를 가장 괴롭힌 것은 북한의 빈번한 무력도발과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측군사력의 상대적인 열세였다.
▶청와대 기습사건 (68년1월21일) 과 그 이틀후 발생한

▶미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사건 (68년11월2일) 등 대규모 무력도발이 68년 한햇동안 집중발생했다.

 바로 이 1968년을 김일성은 '전쟁준비의 해' 로 정했고 박정희는 '대 (大) 국토건설의 해' 로 결정했다. 그만큼 68년을 보는 남북 두 정상의 시각은 달랐고 목표 또한 대조적이었다.
여기에 또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북한이 68년부터 종전의 남한출신 고정간첩 남파라는 고전적인 방법 대신 1.21사태처럼 본격적인 대남침투 유격전술로 바꾼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朴대통령은 8.15선언을 통해 70년대를 '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 로 공언하고 있는 김일성의 발목을 어떤 방법으로든 묶어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8.15선언을 김일성은 과연 어떤 시각으로 받아들였을까. 오랫동안 대남사업에 관계하다 망명한 전 노동당 간부 황일호 (黃日鎬.75.해외거주) 씨는 당시 김일성의 첫마디가 "8.15선언은 우리의 발목을 잡아두자는 속셈이야" 라며 그 의도를 꿰뚫어 보았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김일성은 8.15선언이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미국과 박정희의 시간벌기 술책이라고 봤으며 '선의의 경쟁 제의' 에 대해서도 닉슨의 평화주의 노선에 편승, 평화의 너울을 쓰고 민족을 영구 분열시키려는 책동으로 규정했다" 고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했다. 黃씨는 망명전 북한에서 차관급까지 지낸 김일성의 측근으로 지금까지 망명한 사람들중 황장엽 (黃長燁) 다음 가는 최고위급 인사다.
北, 주한미군 철수 고집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듯이 그 당시까지 김일성은 통일을 위해서는 주한미군 철수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언급되지 않은 8.15선언에 대해 처음부터 이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만큼 북한측이 이를 거부하고 나온 것은 예견된 결과였다. 8.15선언 1주일 후인 8월22일 북한은 당기관지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남조선에 인민정권이 수립되거나 혁신세력이 집권하지 않는한 여하한 대화도 불가능하다" 며 거부의사를 공식으로 밝혔다.
아무튼 8.15선언은 남북 분단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획기적인 전환점이 됐으며 2년후있을 이후락 (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의 역사적인 평양방문과 7.4남북공동성명등 남북간 대화 국면으로의 일대 전환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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