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북 중화학 우위 선전영화에 자존심 손상
'10월 유신(維新)'이라는 대 정변을 몇 달 앞둔 72년 2월 하순 어느 날 오후 중앙정보부 회의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을 비롯한 내각, 청와대비서관, 공화당 간부 등 정부, 여당 관계자 30여명이 북한 선전용 산업영화 한편을 관람하고 있었다.
북한이 자체 제작해 해외공관에 배포한 필름 가운데 3편을 중앙정보부가 입수, 3시간짜리로 재편집한 것이었다. 영화는 벼농사 장면부터 열리고 있었다.
바둑판 같이 경지정리가 잘 된 논에서 부녀자들이 트랙터로 논을 갈고 자동기계로 모를 이앙하고 있었다. 곡식수확도 모두 기계로 했는데 마치 미국의 농촌인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화면은 북한 최대규모의 김책(金策)제철소로 이어졌다.
자동화된 거대한 기계가 석탄을 채굴해 컨베이어벨트로 운반하고 용광로에서는 쇳물이 쏟아져 나와 곧바로 철강재가 돼 흘러내리고 있었다.
각종 크고 작은 기계들이 제작돼 나오는 장면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자동차, 트랙터, TV, 냉장고, 세탁기 등이 다량 생산되고 있었다.
비료.시멘트공장에는 제품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비닐론. 직물공장에서는 각종 섬유제품들이 쉴새 없이 흘러나왔다. 조선소에서는 거대한 선박이 진수되고 전기기관차와 심지어 5만KW 발전기까지 자체 생산하고 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朴대통령도 줄담배를 피워 상영도중 세차례나 재떨이를 갈아야만 했다.
참석자들 모두 영화에 압도됐다. 3시간의 영화상영이 모두 끝났는데도 장내는 숨소리조차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모두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참에 朴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은 다소 일그러져 보였고 목소리 또한 퉁명스럽게 들렸다.
“崔장관, 어떻게 생각하시오?” 질문을 받은 사람은 당시 과학기술처장관 최형섭(崔亨燮.77.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씨였다. 그는 얼떨결에 우선“예”하고 대답한 다음“대단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영화에서 받은 충격과 실망감을 표현하는 朴대통령 특유의 몸짓이었을까.崔장관의 짧은 답변을 듣고 난 朴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혼자 회의실을 떠나버렸다.
사실 朴대통령은 이날 시사회를 통해 우리 경제가 북한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확인해 보려는 생각을 내심 가지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70년 이후부터는 한국경제가 북한을 완전히 따돌리기 시작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사회에 당정(黨政)주요 인사들을 대거 참석시킨 것도 대통령의 그런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시사회는'경제 대통령 박정희'의 믿음의 탑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말았다. 말하자면 북한의 실상을 통해 우리 경제의 상대적 우위를 확인해 보려고 판을 벌였다가 거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돼버린 것이었다.
이것이 이날의 시사회 풍경이었다. 훗날 최형섭 전 장관은“북한의 산업기술이 이론적 바탕위에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기보다 다분히 기능적 측면을 강화시킨 것이었지만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당시 영화소감을 털어놓았다. 김정렴(金正濂.73)당시 대통령비서실장도 “화면에 비춰진 북한의 군수산업은 확실히 우리보다 앞서 있었다. 자체 생산하는 장거리포. 탱크.AK소총.다발총 등이 무기공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당시 우리의 중화학공업은 기껏해야 포항종합제철과 울산 석유화학공장 등을 짓고있는 정도였는데 북한은 김책제철소를 비롯해 상당한 규모의 중화학공업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여타 공업시설이나 공장 규모도 외관상으로는 대단해 영화를 관람한 대다수 사람들이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는 朴대통령이어서 그 파장이 쉬 가라앉지 않았다. 당시 청와대 경제 제2수석 비서관이던 오원철(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씨의 증언. “다음날 결재를 받으러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다. 朴대통령은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임자, 어제 본 영화 어떻게 생각해'하며 질문을 던졌다.
나는'각하, 영화는 잘 찍었습니다만 내용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우리가 훨씬 앞서 있습니다. 중공업분야가 좀 뒤졌는데 2~3년내에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朴대통령은'그래?'하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무척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설명을 계속하려고 하자'吳수석,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알아야 돼요. 다음 안보대책회의때 임자가 직접 설명하도록 해!'하는 것이었다.”
안보대책회의는 朴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회의로 행정부측에서는 국무총리, 외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이 청와대측에서는 비서실장. 대통령 특별보좌관. 수석비서관등이 참석했다.
갑자기 임무를 부여받은 吳수석은 대통령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김광모(金光模.64.테크노서비스 사장)비서관을 급히 불렀다. 그는 당시 경제제2비서관으로 吳수석을 직접 보좌한 핵심참모였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吳수석이 황급히 나를 찾더니 급히 안보대책회의에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서둘렀다.
吳수석은'어제 각하께서 북한영화를 보고 대단히 실망하신 것같다. 내가 보기에 그 영화는 지나치게 과장됐다. 우리가 두 차례에 걸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우리 산업이 북한에 비해 그렇게 뒤지지 않았는데 이것을 모르는 것같다. 우리가 대통령께 용기를 주자'고 했다.”
두사람은 서둘러 보고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안보회의가 소집되고 북한경제가 의제에 올랐다. 제목은'북한의 자력갱생 및 자급자족 정책'. 브리핑은 吳수석이 맡았다. 그의 브리핑 요지. “북한 경제정책의 기본 이념은 자력갱생이다. 여기에는 자급자족의 의미가 내포돼있다. 북한의 산업기반은 남한에 비해 다소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전력생산이 많았고 석탄. 철광석. 비철금속 등 광산자원도 남한에 비해 풍부하다. 이들 자원을 활용한 중화학공장들이 1930년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해 북한의 동해안 일대는 일제말기엔 거의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의 공업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김일성(金日成)은 이런 기반 위에서 자력갱생 정책을 밀고 나갔다는 결론이 된다.” 이어 吳수석은 북한 경제가 안고 있는 취약점을 지적해 나갔다.
“북한 산업의 기초는 전력. 석탄. 철광석. 기존공장, 그리고 인력등 다섯 가지다. 자력갱생의 원리에 따르면 이들 자원을 가지고 거의 모든 제품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그리 되면 기존자원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부존자원에는 한계가 있고 기초자원이 고돼 공급차질이 생기면 경제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거기다 다섯 가지 원천자원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물건도 허다하고, 만든다 해도 비효율적일 때가 많다. 그 한 예가 석유화학제품이다. ” 브리핑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긴장은 여전했다. 침울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김일성도 수출이 급해진 것 같습니다. 원수로 생각하던 일본으로부터 돈을 꾸어 섬유기계들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으로 진격하고 있는 일본의 게다짝(일본판 나막신)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朴대통령은 파안대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자력갱생은 소련. 중국은 시도할 수 있겠지만 북한에는 맞지 않다. 또 기술이나 경영의 자력갱생은 불가능하다. 억지로 강행한다면 세계 수준과 격차가 벌어질 것이고 세계 수준과 격차가 벌어지면 경쟁력이 없게 된다.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북한도 수입해야 할 물품이 늘어날 것인데 수출이 이뤄지지 않으면 외화는 바닥나고 경제가 파산하게 된다.” 2시간에 걸친 브리핑을 끝내자 朴대통령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吳수석의 증언은 계속됐다.
“내가 브리핑을 마치자 朴대통령은'북한경제도 알고 보면 별것 아니네'하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吳수석, 북한의 수출상태가 어떤가?'라고 물었다. 내가'76년에 약 5억~6억달러가 될 것으로 추측 한다'고 답변하자 朴대통령은'북한인구가 우리의 약 절반이니 우리나라 70년도 수준이 되겠구먼'하고 말했다.
이어 참석자들을 둘러보며'남북한 대결이라는 것은 국력대결입니다. 국력신장만이 북한에 승리하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상태로 5~6년간만 노력한다면 우리나라 경제는 모든 면에서 북한을 완전히 압도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