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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새로운 유형 

브루넬레스키의 교훈
  교회 건축은 피렌체 출신의 브루넬레스키가 시작한 개혁으로 커다란 혼란을 겪게 되었다.
  루넬레스키는 산 로렌초와 산토 스피리토에서 라틴 십자형의 전통적인 양식을 취했다. 하짐나 그는 본당을 천장으로 덮고 원주로 가장자리를 두르는 원칙으로 되돌아가 고대 바실리카 양식을 택했다. 또한 교차부에 큐폴라를 씌웠다. 산 로렌초(이 건물은 메치치가의 장례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에는 큐폴라로 덮여 있는 사각형으로  된 설계를 채택했고, 산타 크로체의 파치 예배당은 이것의 변형으로 만들었다. 불행하게도 완성을 보지 못했지만,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에서 브루넬레스키가  보여 주려 했던  것은 방사형 예배당으로  둘러싸인 원형건물이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실질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세례당 이후 사라지게 시작한 중앙집중식 건축양식(동심원에 내접한 수 있는 중심체적으로  건설됨)을 낮은 높이의 건물에 채택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크게 영향을 미쳐, 15세기 건축가들은  브루넬레스키가 커다란 성당에 채택한 바실리카 양식을 모방했다. 줄리아노  다 산갈로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코르토나 성당, 줄리아노 다 마이아노가 지은 파엔차 성당, 비아조 로세티가 지은 페라라의 산 프란체스코와 산타 마리아 인 바도, 모로  코두시가 지은 베네치아의 산 미켈레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브루넬레스키는 만토바 성당을 지은 줄리오 로마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중앙집중식 건축양식
  엄청난 성공을 얻게 된 중앙집중식 건축양식은 특히 이탈리아에서 성모 마리아의  기적을 찬미하는 봉헌성당(이탈리아어로는 산투아리오)의 일반유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줄리아노 다 산갈로는 프라토에 있는 마돈나 델레 카르체리에서  그리스 십자형 설계, 피렌체에 있는 산토 스피리토 제의실에서는 팔각형의 설계를 완벽하게 실현했다. 그리고 15세기 말, 롬바르디아 건축가들은 훌륭한 여러 변형들을 제시한다. 파비아의 산타 마리아 디 카네파노바와 부스토 아르시치오에 큐폴라토로 덮이 사각형  설계, 로디에 있는 인코로나타의 팔각형 설계, 크레마의 동일한 네 팔을 가진 원형 설계,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라  파시오네에서 볼 수 있는 팔각 교차부를 지닌 그리스식 십자형  설계 등이 그 예이다. 베네치아에서 모로 코두시는 산 조반니 그리소스토모에 5점형 비잔틴 도면으로 윤곽을 구성했다. 로마는 피렌체보다 뒤늦은 15세기에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에서 집중형 설계를 고안해 냈다.
  16세기가 배출한 거의 모든 위대한 건축가들이 이 유형을 채택했다. 로마에 있는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동심원형)와 성 베드로 성당의  최초 도면(브라만테가 이 도면의 제작자람녀 충분히 그럴 만하다). 그리고 토디에 소재한 산타 마리아  델라 콘솔라치오네(4열편)를 설계한 브라만테, 피렌체에 있는 산 로렌초의 신 제의실(고대처럼 사각형)과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 적용된 그리스식 십자형 설계의 미켈란젤로, 제노바에 있는 산타 마리아 디 카리냐노(5점형)의 갈레아초 알레시, 베로나에 있는 마돈나 디  캄파냐(동심원 안의 팔각형태)의 산미켈리, 마세르 예배당(원형)의 팔라디오가 바로  이 유형을 채택한 대표적인  건축가들이다.


혼합형
  중앙집중식 건축양식은 많은 군중들이 모이기에는 부적합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성당은 아직도 긴 형태의 건축 설계를 요했다. 그런  가운데 15세기에 본당의 끝에 중앙집중식으로 설계된 성물실을 설치함으로써 두 유형의  혼합형이 나오게 되었다. 피렌체에 있는 아눈치아타의 미켈로초, 리미니에 있는 템피오 말라테스티아노의 알베르티, 베네치아에 있는 산 조베와 산타 마리아 델레 미라콜리의 피에로 롬바르도,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의 브라만테가 혼합형을 따랐다. 파비아 성당에서도 혼합형이 적용되었다.  흑랑을 따라 이어지는 교차부가 큐폴라로 덮여 회중석보다 커졌다. 회중석은 사실상 교차부보다 훌륭한 건축물이었다. 피렌체의 아눈치아타의 템피오 말라테스티아노,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리 그라치에, 그리고 16세기의 그라나다 성당의 경우처럼 혼합형은 제단에서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데에 적합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건물의 형태는 그다지 비슷하지 않았다.  라틴 십자형의 전통적인 양식이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중앙집중식 설계 양식이 덧붙여졌는데, 이는 브루넬레스키가 교차부에 큐폴라만을 씌운 형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이미 알베르티가 설계한 만토바의 산트 안드레아,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가 설계한  코르토나 근방의 마돈나 델 칼치나이오, 브라만테가 설계해 1506년 착공된 성 베드로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16세기에 가장 많이 보급된 유형인데, 가장 완벽한 예는  팔라디오가 설계한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지오레이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신자들 앞에서 종교예식을 치르기에 알맞게 성당을 설게하도록 권고했다. 즉 본당이 넓어야 하며, 측랑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건축가들은 과거의 형태를 단순화하는 작업을 지속하였고, 마침내 그 완벽한 모델을 비뇰라가  로마의 제수 성당에서 선보인 후 널리 퍼졌다. 회중석은 작은 제단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앙집중식 설계의  원칙을 따르는 제단은 큐폴라로 덮인 채 후진까지 연장되었다. 제단은  어느 경우든 후진에 자리했으며, 십자형 성당의 좌우 익부는 측면의 작은 제단으로 축소되어 큐폴라와 이어졌다.  이로써 진정한 의미로 교차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큐폴라는 이제 교회건축물의 미를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어 취향에 따라 지어졌다. 이것이 16세기의 후반을 지배한 일반적인 유형이었다. 여기에도 다양한 변형이 있어 파랄디오는 베네치아의 레덴토레 제단에 클로버형 설계를 했다.


성단의 파사드
  르네상스 시기에 파사드의 유형도 개선되었다. 알베르티가  처음으로 파사드에 오더를 사용하려는 생각을 했다. 말년에 그는 만토바의 산트 안드레아를  거대한 원주가 달린 개선문처럼 다루려고까지 시도했다. 그러나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레에서  그는 오더에 두 개의 층을 설정하여 낮은 부분은 건물의  폭과 같게 하고, 높은 부분은 본당의  폭과 같게 해 왕관처럼 건물 위에 씌웠고 소용돌이 장식으로 측랑과 연결했다.
  이러한 형태는 다른 모든 형태에 영향을 미쳐 보편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대한 변형은 위쪽 층의 넓이, 지지대의 형태와 수(일반적으로 원주와 벽기둥의  혼합 형태). 박공의 형태와 관련되어 이루어졌지만, 애초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유지되었다. 팔라디오만이 다른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는 본당의 앞쪽으로  거대한 입구를 위치시키고 소용돌이  장식을 박공의 모퉁이로 대체함으로써 입구를 단절도니 요소로 간주했다. 파사드는 두 개의 불규칙적인 박공 구조를 가졌다. 박공 하나가 확장되면서 넓고 낮은 다른  박공은 갈라져 나온 듯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수평적인 구획은  사라지고 본당의 수직성은 재확인되었다. 이리하여  건물 내부의 위계성은 또 다른 형태를 통해 외부에 표현되었다.


이탈리아 밖의 성당
  이탈리아 밖에서 이탈리아식 성당 모델은 여건에 따라 수용  정도가 달랐다. 프랑스의 경우 급작스러운 대체과정을 겪기에는 고딕의 전통이 너무 강했다. 세부의 형태가 르네상스의 형태로 점진적으로 변해 가기는 했지만, 프랑스는 파리의 생  외스타슈 성당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고딕의 형태와 양식을 유지했다. 중앙집중식 설계는  성당이나 성 안에 사적인 기금으로 건설되는 예배당처럼 특별한 경우에만 선택되었다. 필리베르 들로름이 지은 생 세르망 앙 레이(입구 앞쪽의 클로버형 평면)와 생  레제 그리고 아네(유일하게 아직까지 남아 있음)에 올린 예배당이 그러한 경우이다.
  독일에서는 플랑브아양(불꽃식) 양식의 발전으로 고딕은 더욱 더 강력해졌다. 큐폴라가 없는 형태이긴 했지만 프레데릭 수스트리스는 뮌헨에 예수회성당 미하엘스를 설계하는 데  비뇰라의 모델을 적용했다. 스페인에서 이탈리아의 모델은 훨씬 쉽게 수용되었다. 시구엔사 성당의 성유골 예배당에 적용된 정사각형 설계, 세비야 성당의 성물실에 적용된 12각형  설계, 에스코리앙 성당의 그리스 십자형 설계 등 그라나다 성당과 우베다 성당에서는 라틴 십자형이 동심원 형태의 웅장한 송골실과 겹합되었다. 세비야의 성혈  병원 성당과 톨레도의 세례자 성요한 병원 성당에서는 라틴형 십자 도면이 교차부에 큐폴라를 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궁
  이탈리아에서 민간건축의 주된 유형은 궁과 도시의 주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알프스 이북에서는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에  있는 성에서 거주했던 반면,  이탈리아의 귀족과 부유한 부르주아들은 도시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궁은 전통적으로 중앙집중식 설계나 사각 형태로 내부의 정원을 감싸며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고 있었다. 외부의 형태는 둔중했으며 외랑이 안뜰을 향해 크게 열려 있었다. 당당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평면에는 규칙성이 뚜렷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오더를 채택함으로써 입면 역시 더욱 감각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피렌체식 궁은 돋을새김을 광법위하게 사용한 결과 외부가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알베르티가  루첼리궁에서 보여 준 파사드와  벽기둥의 모델들이 간결한 형태를 띠는 것은 피엔차의 피콜로미궁의 예를 따르기 때문이었다. 15세기에는 보통
안쪽의 1층 아케이드가 원주로 지지되었다. 우르비노궁  안뜰에서는 2층에 벽기둥이 자리한 것을 볼 수 있지만 메디치와 스트로치궁에서는 마지막 층에 아키트레이브가 있는 외랑을 볼 수있다. 고대의 양식을 정확히 재현한 곳은 로마였다. 파르네세궁이 이상적인 모델로 등장하기 전까지 베네치아궁의 안뜰은 오랜 기간 우니쿰(유일무이한 것)으로 남앙 있었으며, 바티칸궁에 브라만테가 지은 다마수스궁의 안뜰도 마찬가지였다.  벽기둥이 올려진 파사드는 15세기 말에 로마의 대법원 건물에  재등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곧  1층부터 시작되는 하나의 오더를 가진 파사드로 대체되었다. 시골풍의 돋을새김을 가지고 있었던 이 형태는 브라만테가 도입하여 곧 전체로 확산되었다.
  내부의 배치는 이후부터 자연스럽게 장방형 구획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난간벽과 평행한 직선 계단의 새로운 형태는 중세의 규범에서 나온 나선 계단을 대체하게 되었다. 나선계단은 라우라나가 우르비노 공작의 궁에, 브라만테가  바티칸의 벨베데레에 적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중세의 관습에 따라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는 난간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비뇰라는 카프라롤라에서 모퉁이 탑의 위치 때문에 나선 계단을  채택해야 했다. 그러나 브라만테가 메네치아의 카리타 수도원에 타원형 나선 계단을 적용한 이유는 그가 가진 개인적인 취향 때문이었다.


빌 라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들은 전원에서 지내려는 사람들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주택인 빌라를 만들어 냈다. 코지모 데 메디치, 카파졸로, 카레지 등 미켈로초가 설비한 최초의 빌라는 작은 카스텔리, 즉 요새와 같은 외양을 지닌 저택이었다. 그러나 중앙집중식 설계에 매혹된 건축가들은 곧바로 빌라에도 중앙집중식 설계를 적용하려고 했다. 줄리아노 다 산갈로는 로렌초 일 마니피코를 위해  거의 중앙집중식으로 설계한 사각형 빌라 포조 아카이아노를 고안해 냈으며, 줄리아노 다 마이아노는 나폴리의 왕을 위해 네 개의 별채로 둘러싸인 사각형 안뜰을 포조 레알레에 설계해 만들었다. 이 빌라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 샤를 8세와 프랑스의 귀족들은 1495년에  이것을 차지했다. 빌라는 전경을 볼 수 있는 망루와 외랑의 입면에 대한 고려를 하게 되면서  더욱 진전을 보았다. 빌라의 가장 흥미로운 형태는 베네치아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팔코네토가 루빌리아노에 지은 파도바 주교의 빌라와 산소비노가 폰테 카살레에 지은 빌라 가르초니는 고대풍으로 외부를 향해 넓게 개방되는 베네치아식 궁의 전통을 혼합했다. 토스카나와 로마 주변에서 이루어진 빌라의 발전은 주택 건축보다는 정원의 정비로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반대로 귀족들이 내륙 지방에 거주했던 탓으로 다양한 전원주택이 생겨났던 베네치아에서는 팔라디오가 고대적 영감과 전원적 특징을 능숙하게 결합시켰다. 이러한 빌라  중에서도 비첸차의 로톤다는 중앙집중식 설계의 우아함과, 거대한 입구를 가진 네 개의 파사드는 고대의 사원과 같은 모습을 보이낟.  일반적으로 널리 확산된 유형은 보다 간소한 설계를 갖는다.  단순한 형태의 집의 정면에 고대적 분위기의 입구가 자리하며, 더욱 단순한 아케이드로 집  전체를 감싸는 형태를 갖는다. 마세르나 판촐로에서 볼  수 있듯이 'T자형'으로  배치되거나, 프라타 폴레시네의 빌라 바도에르처럼 두 개의 오목한 팔을 만들어 입구의 정원을 감싸는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정 원
  빌라를 건축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건물과 대지의 관게가 새롭게 정립되었고 이것은  직접적으로 정원의 형태에도 영향을 미쳐 뚜렷한 변화 양상을  가져왔다. 정원은 무엇보다 중세 전통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원래 정원이란  것은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병렬되고 배치되어 좁은 문을 통해서만 오갈 수 있는 농지를 의미했다.  정원은 빌라 메디치 데 카스텔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조각과 물줄기가 넘쳐나는 분수를 설치함으로써 더욱 아름답게 꾸며졌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아름다운 전경과 함께 감귤밭과  분수를 가지고 있는 나폴리 왕의 빌라 포조 레알레는 커다란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샤를 8세는 빌라보다도 그곳의 정원에 더욱 매혹되었다. 로마는 고대의 조각상을 전시하고(이것은 곧 규범이 되었다). 언덕에서 자연적인 요소를 끌어들여 전경과 지면의 층, 그리고 물을 이용한 시설을 늘림으로써 정원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티볼리의 빌라 데스테는 이러한 효과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빌라 중 하나이다. 16세기 후반에 빌라 란테 데 바냐이아와 카프라롤라에는 하천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바로크식 정원의 중요한 테마를 예고해 주는 것이다. 세분화된 구조는  규범으로 남아 있었는데, 유일하게 메디치가의 프랑수아 1세의 프라톨리노는 규범에서 벗어났다.
집이나 굴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언덕위에 지어진 프라톨리노의 그림 같은 구성은 17세기의 모든 건축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사각형으로 병렬된 전통적인 이탈리아식  정원은 이탈리아 밖에 있는  저택에서도 모방되었는데, 앙드루에 뒤 세르소가 프랑스에서 출간된 일람표는 이 점을 잘 말해 준다.


스페인의 궁
  이탈리아의 궁은 스페인 같은 지중해 국가에만 영향을 주었다. 스페인은 고전적인 오더를 스페인식 궁의 파티오(포석을 깐 스페인식 안뜰)에 적용함으로써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전통을 결합시켰다. 이것은 부르고스의 미란다궁이나 살라망카의 아일랜드 칼리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베다의 바스케스 데 몰리나궁의 파사드에도 이탈리아의 영향이 있었다. 라  칼라오라 안뜰의 내부 전체는 15세기 말의  특징적인 양식에 따라 제노바에서 만들어져  옮겨졌다. 후에 세워진 엘비소 델 마르케스의 산타 크루스궁은  파르네세 유형에 입각한 고전적인 이탈리아궁을 모방한 것으로, 이주한 베르가마스케 가문 사람이 세운 것이다.


프랑스의 성
  프랑스를 비롯한 북쪽의 여러 나라에서는 지중해 국가와 달리 이탈리아의 모델이 각 지방의 전통이나 기후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도시건축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프랑수아 1세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짓게 한 두 개의  건축물, 즉 레스코가 설게한 루브르와 도미니크 드 코르토네가 설계한 파리  시청은 예외적이다. 불연속적인 형태를  띠는 프랑스의 관저는 뜰 안쪽에 오더로 장식되고 수수한 익랑을 가진 안채가 세워진다.
  이탈리아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성의 경우이다.  빌라에서 보이는 중앙집중식 건축양식은 프랑수아 1세 치하 초기의  샹보르의 1차 설계를 시작으로  프랑스에서 나타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영향을 받아 오미티크 드 코르토네가 구상한 것으로 보이는  샹보르의 설계에 이어, 실행에 옮겨 나타난 확정된 형태에서 보이는 중앙집중식 건축양식은 생제르맹 앙 레이의 라뮈에트나 에탕프 공작부인의 샬로 같은 사각  평면의 작은 섬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앙드루에 뒤 세르소가 남긴 삽화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는 왕실의 거대한 저택에는 적합하지 않아 원칙을 바꾸거나 효과를 감소시키는 방법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예를 거대한 장방형으로 둘러싸인 샹보르와, 중앙에 자리한 두 개의  본체가 홀에서 결합되는 형태로 건설된 불로뉴의 마드리드 목조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직선적 구조가 우세했는데, 사각으로 정원을 둘러싸 닫혀진 형태의 에쿠앙 혹은 앙시 르 프랑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이 확산된 것은 파이자형 평면에 다라  네 번째 면이 열려진 형태였다. 건물의 정면 부분에는 대부분 벽기둥이 자리를 잡았으며, 앙리 2세 때에는 원주까지도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직선 계단이 일반적인 유형으로 자리잡았다.


독일의 성
  독일로 이주해 온 이탈리아의 건축가들이 없었다면, 신성로마제국으로 전해진 르네상스의 새로운 이념의 영향은 더욱 축소되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드라우 강가의 슈피탈성, 볼로냐 출신의 건축가인 파스칼리니가 바바리아의 요새(제2차 세계대전중 파괴됨)  안에 지은 윌리히의 궁, 프레데릭 수스티리스가 지은 란트슈트(주택과 트라우스니츠성)와 뭔헨  주거지역의 주택들이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을 받은 건축이다.
  독일의 많은 성들의 경우 르네상스의 양식은 프랑스를 통해  전달된 것으로 보이며, 하이델베르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구성이나 비례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도 장식에 새로운 양식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공광장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건축가는 건축에서 새로운 분야를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정렬된 공공광장이다.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남아 있었지만 이후에 상당히 발전했다.  최초의 예는 15세기 말에 밀라노 공작의 주택 근처인 비제바노에서  볼 수 있다. 성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긴 장방형의 채색된 이 광장은 단조로운 형태의 현관 주랑에 둘러싸여 있다.
  거대한 광장이 성당이 바로앞까지 뻗어 있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은 단조로운 형태의 긴 파사드를 행정장관 저택 앞까지 건설함으로써 이러한 모델에 점진적으로 다가서게 되었다. 구 행정장관 저택과 달리 연속회랑의 원칙을 취하여  고전적으로 배열된 오더를 채택한 신 행정장관 저택 때문에, 도 나폴레옹이 재건하기 직전까지 산 레미니아노 성당과 한쪽면이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 마르코 광장은 완전한 대칭이 아니었다.
  미켈란젤로가 다시 설계한 로마의 카피톨리움 광장은 타원형의 광장이 사다리꼴의 건물과 분리되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독창적이며, 역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탁월한 건축으로 남아 있다. 사다리꼴의 건물이 세 개의 면에 위치해 광장을 감싸고 있으며 네 번째 면은 개방되어 있어, 결국 측면에 자리한 두 개의 관저만이 대칭을 이루게끔 되어 있다.
  일정한 형태로 정렬된 공공광장은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되어 16세기 말에는 폴란드의 자모스크, 이탈리아의 리보르노,  17세기에 이탈리아의  토리노, 파리(보주광장과  도핀 광장). 1630년에 런던(커번트 가든)이 탄생하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개별 건물을 개선한 후에 도시의 전체적인 얼굴을 조금씩 변화시키려는 생각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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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의 르네상스 제3장 새로운 언어

    제3장 새로운 언어 원주, 고대 건축을 이해하는 열쇠 원주는 고대 건축의 특징을 이루는 요소였다. 벽에 덧붙인 평평한 벽기둥도 원주의 한 평태고 간주할 수 있다. 벽기둥은 복잡하고 세련된 가공을 통해 만들어진 걸작품이다. 긴 원통의 중간부가 가늘게 보...
    Date2008.01.09 Bymahru Views8,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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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의 르네상스 제2장 새로운 원칙

    제2장 새로운 원칙 규칙성을 기본으로 한 설계 건물을 배치하는 데 가장 손쉬우면서도 기본적인 방법은 자와 직각자, 도는 때때로 컴퍼스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규칙성을 지닌 직각평태는 엄격한 유형으로 된 교회건물에는 유지될 수 있었지만 지리적 ...
    Date2008.01.09 Bymahru Views7,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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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의 르네상스 제1장 고대로 회귀하다

    제1장 고대로 회귀하다. 고딕 양식은 첨두형 둥근 천장을 짓는 기술로 정의 내릴 수 있다. 여기에서 고딕 양식이 독특한 특징과 예술적인 가치가 창출되었다. 고딕 양식이 만들어 낸 첨두형 둥근 천장은 반원형 둥근 천장보다 더 많은 무게를 지탱할 수 있었...
    Date2008.01.09 Bymahru Views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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