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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새로운 언어 
원주, 고대 건축을 이해하는 열쇠
  원주는 고대 건축의 특징을 이루는 요소였다. 벽에 덧붙인 평평한 벽기둥도 원주의 한 평태고 간주할 수 있다. 벽기둥은 복잡하고 세련된 가공을 통해 만들어진 걸작품이다. 긴 원통의 중간부가 가늘게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가운데 부분을 불룩하게 만든 벽기둥은 조각상처럼 몰딩이 된 토대가 있는 받침대 위로 올려졌다. 그리고 벽기둥은, 초기의  목재건축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두 위에 얹혀진  엔태블러처(아키트레이브, 프리즈, 그리고 돌출된 코니스 등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를 떠받치고 있었다. 이것은 의무사항이었다.
  콜로세움에서 볼 수 있듯  고대의 건축은 아치와 원주를  연결시켜 놓았지만, 르네상스의 벽기중은 아치와 원주 사이의 연결부가 없이 독립적으로 병렬되어 있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즉, 아치는 지주 위에 엊히게 되었고 원주는 이러한 지주들 앞에 세워져 아치와  접하고 있는 엔태블러처를 지지했다. 중세에는 고대와 달리 원주라는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는 원주의 불룩한 윤곽니아 비례라는 개념이 없는 원통형 지지대라는 보다 단순한 표현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엔태블러처는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성당 중앙 회랑석의 원형 기둥, 트리포리움(교회건축의 측랑 상부에 있는 통로)이나 수도원의 자은 기둥들은 아케이드의 세로열만을 지지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원주로 회귀하다
  르네상스 건축의 아버지인 브루넬레스키가 취한 첫 번째 행동은 고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브루넬레스키는 1421년부터 피렌체의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첸티에 원주가 달린 입구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중세의 방법에 따라  원주가 아치를 떠받치도록 했다. 이러한 작업과 더불어 그는 입구를 세로골이 있는 거대한 벽기둥으로 감싸는 작업을 병행하여, 이 벽기둥들로 연속적인 엔태블러처가 지지되도록 했다.
  이러한 것들이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 그의 방식은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산 로렌초와 파치 예배당의 제의실 안쪽에 있는 벽기둥위에 엔태블러처를  만들었다. 그리고 산 로렐초와 산초 스피리토의 중앙홀의  경우, 고대의 원칙과 중세의  방법을 결합해 엔태블러처의 한 부분을 주아케이드와 중앙홀의 우너주 사이에 놓았다. 그러나 산 로렌초의 측랑에서,  그는 예배당의 아케이드와 맞닿으며 지나는 연속적인 엔텁르래처를 벽기둥으로 지지하게 함으로써 고대의 원칙을 정확히 따르고 있다.
  이후 고대의 방법이 다시 사용되었다. 그래서 보통 원주위에  아치를 얹을 경우 브루네렐스키가 만든 엔태블러처의 일부는 통상적인 것으로  남았다. 엔터블래처는 르네상스 양식에서 결정적인 부분이다. 이로써 아케이드의 세로면에 고유한 꽃줄장식의 효과는 기하학적 엄밀성과 수평적인 연속성, 그리고 엄격한 규칙으로 대체되었다.
 
오더의 원칙
  브루네렐스키와 그의 계승자들은 원주의  비례가 '장식'(비트루비우스의  용어를  수정하기 위해 사용합)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즉 주두와 엔태블러처의 형태가 원주의 비례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가노가할 수  없었다. 유적 연구와 비트루비우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들은 주두와 엔태블러처의 다양한 유형들을 정의하고 그것을 새롭게 완성시킬 이론을 발견하게 되었다.  고대의 전통에서 장식의 형태에  따라  정의된 채로 남아 있던 이러한 유형들은 비례의 체계가 정립됨녀서 고유한 양식으로서 이름을 얻게 되었다.
  비례와 관련된 체계는 가장 기본적인 시각적 환영에 대한  관찰에서 생겨났다. 여러 층을 가진 동일한 높이의 건물에서, 보다 위쪽 층일수록 지상 관찰자의 눈에는 높이가 낮아 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건물은 높은 부분일수록 압축되어 축소되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시각적 환영은, 위층으로 가며  점진적으로 높이를 늘림으로써 수정할 수  있었다.
원주의 양식에 따라 이러한 높이는 적절한 비율로 규정되었다.  원주의 양식에 따라 이러한 높이는 적절한 비율로 규정되었다. 각 양식은 고유한 비례관계를  나타내고 있어 원주의 넓이에 따라 그 장식의 높이가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건물의 각 층마다 한 가지 양식을 할당하여 층을 쌓아 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건물의 높이가 점점 줄어들어 보이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으며, 반대로  위층으로 갈수록 피어오르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콜로세움과 같은 건물은 이러한 이론에 대한 선언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도리스 양식, 이오니아 양식, 코린트 양식 등 세 개의 기본적인 양식을 규정해 놓았다. 로마인들은 여기에 두 가지 양식, 즉 토스카나 양식과 혼합 양식을 첨가했다. 15세기 르네상스 초기의 이탈리아 장인들은 여러  가지 양식에 두루 정통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런 까닭에 비트루비우스의 경우처럼  고대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양식은 이우구스투스 시대의 한 건축가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나,  대부분이 신성로마제국 말기에 지어져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축물들은 규칙을 제대로  준수하고있지 않았던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현실과 낡은 이론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이론이 다듬어지고 있었다.
결국, 1562년 비뇰라가 출간한 '다섯 가지 오더의  원칙'에서 논리성과 명료성을 기반으로 한 결정적인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고전적인 다섯 가지 양식
  웅장한 모습을 보여 주는 도리스 양식은 가장 견고한 오더 양식이었다. 도리스 양식은 장식이 없는 주두와 단순한 몰딩, 그리고 그 위에 얹혀진  엔태블러처의 형태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엔태블러처는 세 개의 홈이 팬 좁은 판들로 구성된 매우 단순한 형태의 아키트레이브, 한 가지 모티즈로 돋을새김이 된 프리즈의 소간벽의  형태에 따라 변화하는 트라이글리프(세줄기 세로무늬)(가로축으로 쌓아올려진 들보는 목조건축의 아키트레이브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단순한 받침대로 지지되는 코니스로 구성된다.
  소간벽과 트라이글리프가 빠져 있는 토스카나 양식은 좀더 작고 검소하게 만든 것으로 도리스 양식의 변형이다.
  한편 굵기가 훨씬 가는 이오니아 양식은 앞면에 두 개의 소용돌이 장식이 있는 주두와 아키트레이브 위에 연속적인 조각장식이 있는  프리즈를 포함한 보다 장식적인  엔태블러처를 특징으로 한다.
  코린트 양식은 높이가 다른 것에 비해 훨씬 높다. 주두는 아칸더스 잎으로 뒤덮인 꽃바구니 장식이, 사석에는 이파리 장식이,  중간부에는 장미 장식이 자리한다.  또한 장식의 열은 엔태블러처에서 증가한다.
  또한 동일한 비례를 가지고 있는 혼합 양식은 코린트 양식의 장식적 변형이다. 혼합 양식의 주두는 코린트식 꽃바구니 장식과 이오니아식 소용돌이 장식을 결합시킨다.
 
양식 사이의 관계
  비뇰라가 세운 규정에 따르면, 다섯 가지 양식은 일정한 비례와 관련을 맺고 있다. 원주의 높이는 원주의 지름에서 설정된 동일한 모듈(일정한 배수 관계로 맞추는 기준 치수)로 산출되기 때문이다. 토스카나 양식은 모듈이 7, 도리스 양식은  모듈이 8, 이오니아 양식은 모듈이 9, 코린트식과 혼합식은 모듈이 10이다. 원칙적으로 토스카나 양식은 간소한 특성 때문에 빌라나 혹은 도시의 관문이나 요새같은  방어용 건축물에 주로 사용되었다.  가장 견고하며 남성적ㅇ니 도리서 양식은 건물을 지지하는 1층까지, 이오니아 양식은 2층, 코린트 양식이나 혼합식은 3층까지 원주와 장식이 닿아있다. 그러나 이것이 규범으로 정착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15세기 중반 알베르티는 이렇나 고대의 양식을  루첼라이궁의 파사드에 재도입했다. 하지만 이것은 의도한 결과가 아니었다. 최초의 진정한 모방은  1470년경 로마의 베네치아궁 안뜰로, 이것은 가장 훌륭한 고대 모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1514년, 브라만테는 바티칸궁에 기본적인 세 가지 양식의 오더를  배열하는 첫 번째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그 이후 오더의 배열 방식이 설정되어 건축설계에 거의 의무적으로 적용되었다. 또한 이것은 로마 파르네세궁의 안뜰, 팔라디오가 지은 베네치아의 카리타 수도원의 회랑, 산마르코 광장의 신행정장관 저택 등 16세기 가장 위엄 있는 건물들에 적용되었다.
 
양식의 선택
  하지만 항상 예외가 뒤따랐고, 새로운 상상력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도리스 양식보다  낮게 쌓아 올릴 경우가 아니라면 1층에 도리스 양식만을  채택할 이유는 없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산미켈리는 베네치아 대운하의 그리마니궁에 1층까지  코린트 양식을 적용하고, 2층부터 또 다른 코린트 양식을 적용했다. 1568년 프리마티치오는  풍텐블로에 있는 새로 지은 2층 측면을 토스카나 양식으로 장식했다.
  교회의 내부처럼 한 건물에 한 양식이 사용될 경우 코린트 양식이 가장 일반적으로 선택되었다. 그 이유는 코린트 양식이 가장 우아한 장식미를  나타내었기 때문으로 이후에 가장 널리 보급되었다.
  16세기 초 브라만테는 새로운 성격을 지닌 파사드 유형을 제시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한 층에만 하나의 양식을 부여하고 1층의 석조는 시골풍의 돌출부로 다루었다. 이 모델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어 전 이탈리아로 확산되었다. 산미켈 리가 지은 베로나, 팔라디오가 지은 비첸차의 타에네궁도 그 중 하나이다.
 
거대한 오더
  한편 원주나 벽기둥에 하나의 양식만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더로  장식된 원주는 그 높이가 2층짜리 건물과 맞먹었다. 거대한 양식이라 부를 수 있는  이 방법은 보다 큰 효과를 창출했다. 브루넬레스키는 아직까지도 완성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구엘페궁에 이 양식을 적용했다.
  이 거대한 양식은 16세기의 몇몇 야심적인 건축물에 채택되었다.  산미켈 리가 지은 베로나의 궁이나 로마의 카리톨리움에 있는  원로원궁에서 1층에 전원풍으로 올려진 이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줄리오 로마노가 만토바에 지은 팔라초 델 테, 미켈란젤로가 카피톨리움 위에 지은 보수당사, 파랄디오의 발마라나궁, 비첸차의 로지아 델 카피타니오 등  대부분의 경우 원주는 직접 지면에 닿아 있었다.
  사원의 파사드가 신전 입구의 박공을 지지하는 거대한 원주들의 주랑은 고대 건축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였다. 15세기 말경 알베르티는 만토바의 산트 안드레아 성당의 파사드 도면에 벽기둥으로 된 주랑을 회복시켜 놓았다. 진정한 주랑은 대부분의  경우 근대 건축의 설계와 조화를 이룰 수 없었다. 만약 팔라디오가 16세기 후반에 주랑을 다시 사용하는 데 성공하지 않았더라면, 주랑은 아마도 망각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팔라디오는 미라의 말콘탠타나 비첸차의 로톤다와  자신의 빌라 파사드에 독특한  장식을 사용했다. 하지만 원주를 늘 생각할 수도 없었으므로, 마세르의 빌라 바르바로, 베네치아 성당의 파사드, 산 피에트로 디 카스텔로, 산 프란체스코 델라 비냐, 레덴토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팔라디오는 벽 위에 원주를 덧붙였다. 팔라디오는 죽기(1580) 전날까지 늘 예배당의 파사드에나 마세르의 신전에 이러한 작읍을 진행하며 프로나오스(신전 입구)에 애착을 가졌다.
 
오더의 확산
  16세기에 오더는 이탈리아 밖으로  확장되었다. 프랑스에서 오더의 사용은  프랑수아 1세 치하때가지도 경험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최초의 정확한 오더  배치는 1545녀경 장 구종이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에쿠앙의 입구(소실됨)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필리베르 들로롬은 아네의 중앙 돌출부(혁명 이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 안뜰까지 이어짐)를 1550년이 약간 못 미친 시점에 건설했다. 장 뷜랑은 '건축의 일반원칙'(1564)에서 최초의 지침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것은 곧 비뇰라의 저서 때문에 빛을 잃게 되었다.
  스페인의 경우 1526년부터 디에고 데 사그레도가 '고대의 비례'라는 제목의 책에서 비트루비우스의 기법에 대해 논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지만,  프랑스보다는 오더의 확산 속도가 느렸다. 1530년경 살라망카 대학의  아일랜드 칼리지에서 사용된 오더를  보면 여전히 경험주의적임을 알 수 있다. 모양은 나아지고 있었지만 비레는 1560년대 만들어진 세비야의 파사드에 사용된 것보다도 후퇴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레스코리알을 오더의 정확한  용례를 만들었다. 윌리히의 파스칼리니 같은 이탈리아인이나 이탈리아 양식을 받아들인 프레데릭 수스트리스 같은 플랑드르인이 란트슈트나 뮌헨으로 와서야 독일에도 비로소 전파되었다. 리비우스는 1547년에 다섯 가지의 오더에 대한 지침서를 출간했다.  그러나 1560년경 건설된 하이델베르크의  오통 앙리 건물의 측면에도 오더가 잘목 적용되었다. 16세기에 신성로마제국에서 정확히 세 가지 양식을 배열한 건물은 없었다.
  이탈리아를 제외하고 거대한 오더를 실제로 사용한 나라는 프랑스뿐인 것으로 보인다. 과도한 장식을 선호했던 뷜랑은 샹티이의 작은 성과 에쿠앙의 안뜰에 자리한 페르 앙 타르드누아에 거대한 오더를 작용했다. 그 때문에 뷜랑은, 거대한 건축물에 주안점을 두었던  후기 발루아 왕조 시대에 가장 앞서가는 건축가가 되었다. 앙드루에  뒤 세르소가 설계한 당시의 거대한 건물(샤를발, 베르뇌유, 생 모르)이나 앙리 4세 치하에 지어진 루브르 대회랑의 바깥쪽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오텔 드 디안  당굴렘(후에 파리시 역사도서관이 됨)도 이러한 유행을 보여 주는 예이다. 스페인에도 거대한 오더는 그라나다 성당이나 하엔 성당의 내부 같은 종교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임의 선택
  고대 오더에 대한 르네상스의 지나친 숭배가 구속적인 것은  아니었다. 물론 원주나 벽기둥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들은 단지 규칙성, 대칭, 기하학, 비례와 같은 대원칙에 따라 미를 완성하려고 했던 것이앋. 그런 까닭에 르네상스의 훌륭한 건축물 중에도 파사드의 원주나 벽기둥에 오더가 없는 경우가 있었다. 메디치, 피티, 스트로치궁과 더불어 15세기에 모습을 갖추게 된 피렌체의 우피치궁이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이런 경향은 안토니오 다 산갈로를 매개로 이 분야의 걸작품인 파르네세궁으로 시작되는 16세기의  위대한 고대 로마식 궁에 나타난다. 사라고사의 라 론하,  레스코가 설계한 루브르궁 외부, 아샤펜부르크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큐폴라
  오더가 르네상스 건축의 모든 부분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요소들,  예컨대 덮개의 양식, 여러 가지 장식, 몰딩 공정과 같은  것들도 고려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펜덴티브(정방형의 평면 위에 돔을 설치할 때 돔 밑바닥 네귀에 쌓아 올리는 둥근 삼각형의 부분) 우에 올려진 큐폴라와 펜덴티브 속의  원형지붕은 그 특성상 새로운  것들이었다. 로마인이 사용한 큐폴라는 로마네스크 양식에서도 반원뿔 형태의 원형천장이나 사분궁륭이  모퉁이에 놓여 버팀아치로 지탱되었다. 그러나 큐폴라는 고딕 건축에서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르네상스는 펜덴키브, 즉 둥근 삼각형꼴의 버팀아치로 뮤폴라를 지탱함으로써, 큐롤라를  부활시켰다. 펜덴티브는 성당 교차부의 일반적인 사각형 도면을 큐롤라나  드럼의 원형 개구부로 바꾸어 놓았다. 동시에 펜덴티브는 장식을 하기에 적합했다. 따라서 이탈리아에서는  복음서의 저자들을 그린 원형초상화를 펜덴티브에 넣었다.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피렌체 성당의 거대한 큐로라는 종종 르네상스 선축의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피렌체 성당의 설계는  사실 14세기에 시작되었으며,  브루넬레스키의 공적이라면 버팀아치나 발판을 사용하지 않고 큐폴라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건축가의 창조적 작업이라기보다는 기술적인 문제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르네상스 건축의 본질적인 주제가 되는 큐롤라의 확산에 기여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드럼과 돔
  피렌체 성당의 큐폴라를 제외하면(드럼도 예외이다) 초기의 큐폴라들은 펜덴티브 바로 위에 지어졌다. 어떤 것은 수직적인 외벽을 구성하는 드럼  바깥쪽에 펜덴티브를 가리는 경우도 있다. 15세기 말의 롬바르디아형 큐폴라가 얹혀진 모듬 성당에서  볼 수 있듯 산타 마리아 델라 카르체리나 훨씬 뒤에 지어진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라 파시오네가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교차부에 빛을 주기가 부적절했으며, 외부형 큐폴라를  전혀 예견하지도 못했다. 16세기 초가 되어서야  펜덴티브와 큐폴라 사이에, 원통형 드럼을  설치해, 드럼에 달린 창문을 통해  교차부에 빛을 줄 수 있었다.  동시에 고대의 방법을 사용해, 돔의 틀을 덮어 씌우는 방법으로 외부형 큐폴라의 형태를 표현했다.
   이 형태로 브라만테가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에 지은 템피에토, 몬테풀치아노의 마돈나 디 산 비아조, 토디의 산타  마리아 델라 콘솔라치오네의 경우 성당 내부가 더 밝아지고 바깥쪽은 훨씬 웅장한 모습을 띠었다. 이러한 경향은 곧 전체로 확산되었다. 제네바에 있는 알레시의 산타마리아 디 카리냐노, 베로나에  있는 산미켈리의 마돈나 디 캄파냐,  베네치아에 있는 파랄디오의 산 조르조 마지  오레와 레텐토레, 로마에 있는 자코모  델라 포르타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 피렌체 성당처럼, 큐폴라 꼭대기에  개구부를 두고, 그 위에 템피에토 형태의 채광탑을 얹었다. 이는 고대 양식에서 지붕에 사용한  뾰족한 장식과 같다.
 
펜덴티브가 있는 원형천장
  브루넬레스키는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첸티의 정문과 여러 성당의 측랑에 새롱누 덮개  양식으로 펜덴티브가 있는 원형천장의 형태를 도입했다. 이것은 네  개 의 펜덴티브를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간단히 만들 수 있는데 마치 빵모자와 같은 형태를 갖게 된다.
  궁륭의 교차선이나 전통적인 첨두  아치를 지니지 않는 이러한  건축 형태는, 원형천장의 규칙적인 곡선이 반원형 아치까지 연장되는 매끈한 원형천장을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지붕 형태는 피렌체 건축의 고유한 특성이기도 하지만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하엔 성당이 있는 스페인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장 식
  고대의 장식 역시 부활되었다. 고딕 건축은 나뭇가지 무늬를  돌속에 깊이 새기거나 주름잡힌 양배추 무늬를 뾰족탑 상단에 놓는 등 단순한 크로켓(경사진 면을 따라 장식하는 꽃모양의 돋을 새김)만을 알고 있었다. 르네상스는 이러한 장식을 제거하고, 고대의 장식을 재건했다. 그리스 시대처럼 순수하게 기하학적인 모티브를 따르는 기둥, 진주 모양의 장식이  이루는 열, 달걀 모양의 장식, 파이프, 혹은  자연주의적인 모티브이지만 기하학적인 규칙성을 따르는 엮음무늬나 기둥의 덩굴무늬, 혹은 주두에 수직으로 올려진  촛대 모티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변천과정은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16세기까지 돌고래 같은 자연주의적인 모티브가 조각된 주두 장식, 혹은 벽기둥의 프리즈와 촛대 등에 자연스럽게 흩어진 새나 곤충의 장식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장식들이 롬바르디와 베네치아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베르가모의 콜레오니나 베네치아의 산타마리아 데 미라콜리 성당의 장식으로 대표되는 이 양식은  프랑스에서 16세기 초반까지, 스페인에서는 16세기 전반기 동안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엔 이탈리아에서처럼 고대적인 장식에 자리를 내주었다. 틀을  만들어 층을 구별하도록 고안된 가장 단순한 장식인 몰딩 역시 고대의 모델에 따라 개선되었다. 중세의 몰딩은 평면이나 움푹 들어간 벽에 새겨졌지만, 르네상스는 돋을새김된 몰딩을 원칙으로 삼았다.  엔태블러처나 틀장식은 액자의 테처럼 돋을 새김을 통해 구분되었고 빛을 받아 생기는 그림자 선을 통해 건축물의 가치를 발하게 했다.
 
돋을 새김
  석조물 역시 개선되었다. 중세에는 군사건축에만 국한되어  있던 돋을새김이 이제 민간건축에도 도입되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견고한 저택이었던  피렌체식 궁을 통해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렇나 돋을새김은 급속히 확산되어 조형적이고 생동감 있는 효과를 냈다. 돋을새김은 보통 궁의 1층이나 모퉁이, 기둥  사이에 장식으로 쓰였다. 동시에 돋을새김은 다양한 형태로 변형이 가능했다. 피렌체 전통의 영향으로 거의 다듬어지지 않은 채 투박한 모양을 하고 있는 벽돌은 울퉁불퉁하거나 구멍이 많이 뚫린 석재, 평판(베네치아에 있는
산 미켈레의 파사드), 혹은 다이아몬드처럼 뾰한 끝을 가진  석재(페라라의 다이아몬드궁)로 변화했다. 적극적으로 돋을새김을 받아들인 프랑스는 여러 가지 형태의 돋을새김을 만들어 냈는데, 도관의 규칙적인 사각평면의 세로 새김이나, 루브르 등 16세기 말에 빈번히 사용된, 벌레 먹은 자국 같은 무늬의 돋을새김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파 격
  정확한 규칙을 따른 새로운 건축양식은 최초의 거장들이 예견하지 못했던 결과를  가져왔다. 즉 초기 양식에 대한  변형과 변칙이 놀랍고도 충격적이기까지 한  효과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중세에 허용된 표현의 자유는 실제로는 불가능했고 법칙만이  예외의 근거를 줄 수 있었다. 줄리오 로마노는, 거의 다듬어지지 않은 채 기초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원주의 주간과 홍예머릿돌, 엔태블러처에서 빠져 나와 막 떨어질 듯이  보이는 트라이글리프 등 처음으로 만토바에 있는 팔라초 델 테에 놀랍고도 유쾌한 변칙을 도입했다.
  똫나 자주 건물의 장식과 형태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되풀이해 그렸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에 소재한 산 로렌초 본당 성물실의 높은 창문을 사다리꼴로 그리며 원근법의 효과를 창출했다. 또한 피렌체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현관  내벽면의 원주에서 미켈란젤로는 원급법을 정반대로 사용했다.
  이러한 파격은 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었다.  파격은 반드시 효과를 가져왔다. 역설적으로 독창적인 사람에게는 이미 설정된 법칙이 새로운 창조의 원천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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