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최형섭소장의 회고록들에서 발췌했습니다.
KIST라는 것은 그냥 건물과 사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전의 생명연구소도 박정희때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과학기술개발에 대한 박정희대통령의 선견지명이 참 대단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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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섭소장
KIST 탄생 배경
『계집애들 머리카락 팔아 번 돈이 뭐가 그리 자랑스럽습니까?』 1965년 4월 정부 산하 연구소장들을 불러 모은 리셉션에서 朴正熙 (박정희) 대통령은 기분이 몹시 상했다. 당시 스웨터 수출이 연간 2 천만 달러에 달한다며 연구소장들에게 은근히 정부의 실적을 자랑 하던 朴대통령에게 崔亨燮(최형섭) 원자력연구소장이 갑자기 찬 물 을 끼얹는 말을 던졌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의 대우와 신분을 안정시켜 국가주도의 근대화를 맡긴 박정희는 월남파병에 대한 선물로 존슨 대통령이 설립을 도와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발족에 강력한 후견인 역할을 했다. 이 연구소는 한미양국이 1000만 달러씩 2000만 달러를 출연하여 만든 것이었다. KIST가 경제발전을 뒷받침할 과학기술의 사령탑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966년 2월3일 초대 소장으로 임명된 최형섭 박사가 처음부터 "어떻게 하면 산업체와 연계를 갖도록 할 것인가"하고 고민한 덕분이다.
최소장은 후진국의 연구소들이 거의 실패하는 이유는 연구소에서 먼저 연구를 한 다음에 사용자를 찾아나선 때문이라고 보았다. 기업체로서는 아무도 쓰지 않는 기술을 이용했다가 자기만 손해보지 않을까 겁을 내니 그런 기술을 사용할 리 없었다. 연구단계에서부터 기업이 돈을 댄다면 다소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개발된 기술을 사용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산업체와 연구소가 처음부터 계약연구를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두번째 고민은 '유능한 사람을 모으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대학교의 교수들을 빼오면 교육에 지장을 줄 것이다. 최소장은 해외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들을 유치하기로 했다. 문제는 조건이었다. 최소장은 박대통령의 엄호 아래 해외 과학자들이 안정된 환경에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정착시켰다. 집을 마련해주고 당시 국내에는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 회사와 계약하여 들게 해주었다. 자녀들 교육대책도 세워주고 봉급은 중류 정도를 보장해주기로 했다. 주로 미국에서 모셔온 과학자들이 많았는데 미국에서 받고 있던 봉급의 약 4분의 1을 주기로 했다. 연구자는 돈이 너무 많으면 공부를 안한다는 것이 최소장의 지론이기도 했다.
그래도 KIST 연구원들이 받는 봉급은 국립대학 교수의 세 배나 되었다. 서울공대 교수들이 반발했다. 최소장은 "우리 봉급을 깎아내리려고 하지 말고 당신네들 봉급을 우리 수준으로 올려달라고 문교부에 건의하는 게 상식이 아니오"라고 했다. 박대통령도 KIST 연구원들 봉급에 대한 진정과 불평을 듣고 있었다. 그는 최형섭을 불렀다. 봉급표를 갖고 들어오라고 했다. 박대통령은 표를 훑어보더니 "과연 나보다도 돈을 더 많이 받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군"라고 했다.
"만일 각하께서 부당하다고 생각하시면 제 봉급만 깎으십시오. 다른 사람은 안됩니다."
박정희는 한참 봉급표를 들여다 보다가 "여기 있는 대로 하시오"라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신이 강한 최형섭은 KIST 육성법안을 만들 때도 '연구소는 회계감사도 받지 않고 사업계획 승인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조문을 넣었다. 연구하는 데 공무원들이 관료적으로 이것저것 간섭해선 일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정부쪽에서 반대가 심했다. 정부 돈이 들어가는데 어떻게 감사를 안받느냐는 논리는 오히려 타당성이 있는 것 같았다.
이 경우에도 박대통령은 과학자편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막상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당초 법안이 수정되어 연구계획의 승인과 회계감사를 받도록 되었다. 최소장은 박대통령에게 직소하여 1967년 3월 임시국회에 법률개정안을 냈다. 국회의원들도 많은 문제제기를 했다. 나중에 최소장은 "나를 믿고 법안을 통과시켜 주시오"라고 호소했고 국회의원들도 "우리가 과학기술을 모르니 일단 소장을 믿고 맡겨보자"고 했다. 연구소는 공인회계사를 고용하여 회계감사를 시킨 뒤 보고서를 정부에 보내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최소장은 "일반 행정에서 쓰는 잣대로 연구업무를 재려 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감사원이 연구소를 감사하게 되면 연구원들은 잡무에 시달려 본업을 소홀히 하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돈을 흥청망청 쓰자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질서를 찾자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서울 홍릉(원래 명성황후의 무덤이었으나 고종이 죽은 후 남양주군 금곡으로 이장되었다)에 있던 임업시험장을 연구소 부지로 검토하도록 최형섭에게 지시했다. 최소장이 농림부와 협의를 해보니 말이 먹혀들지 않았다. 대전, 천안 등지까지 조사하여 30여 군데의 장소를 물색했다. 최종적으로 서울 근교 동구릉을 지목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서울시장과 농림부 장관을 불러 홍릉으로 갔다. 현장에서 박대통령은 "임업시험장도 중요하지만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더 중요하다. 38만 평을 전부 연구소에 주라"고 지시했다. 최형섭 소장은 농림부장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 그 가운데 15만 평을 넘겨받아 1966년 10월에 기공식을 올렸다.
박대통령은 최소장을 임명할 때 두 가지 부탁 겸 약속을 했다. 인사청탁을 받지 말 것, 예산을 얻는다고 경제기획원을 들락거리지 말 것. 1966년 가을 연구소는 1967년도 예산으로 10억 원을 신청했다. 김학렬 경제기획원 차관이 양해를 구해왔다. 2억원만 깎자는 것이었다. 국회로 예산안을 넘기기 전에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가 열렸다. 마무리 단계가 들어갔을 때 느닷없이 박대통령이 말했다.
"김학렬 차관, KIST 예산이 얼마라고 했지?" "8억원입니다." "원래 신청한 액수는 얼마인데?" "10억원이지만 소장과 의논해서 8억원으로 했습니다." "다시 10억원으로 해!"
박대통령은 KIST 설립 후 3년 동안 한달에 한 두 번씩은 꼭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을 격려했다. 최형섭은 "국가원수의 그런 방문에는 돈도 드는 것이 아니지만 연구소의 위상이 올라가 지원하는 정부부서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었다"고 했다.
지난 2004년 6월 29일 숙환으로 별세한 최형섭 박사는 최장수 과기처장관으로서 한국 과학기술사에서, 또한 한국 과학기술의 기반을 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그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묘비에 기록된 글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과학기술자들의 기억에 남아 살아 있는 교훈으로 전해지고 있다.
묘비에는 ‘연구자의 덕목’이란 제목으로 “학문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는 다섯 가지 항목의 지침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이 특히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은 지난 1월 줄기세포 조작 파문으로 나라가 큰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모 언론을 통해 최 박사의 비문 내용이 소개되면서 국민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었고, 국민들로 하여금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연구윤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해준 계기가 되었다.
▲ 최형섭 과학기술처장관이 IAEA 사무총장과 함께 김종필 국무총리를 예방하고 있다(1971.11.24) ⓒ |
그러나 연구에 전념해야 할 연구원들에게 있어서는 대통령의 방문이 무척 힘들었다. 연구원들의 불만의 소리가 소장실에 전해지면서 최 박사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 대통령에게 “잦은 방문이 일에 지장을 주고 있다”고 어려운 충고를 하게 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방문은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건설현장을 찾아 막걸리만을 풀어놓고 연구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최형섭 박사와 박 대통령과의 일화들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특히 1971년 6월 최형섭 박사가 제 2대 과기처장관에 선임되면서 두 사람의 돈독한 관계도 계속 이어져 연구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행정 분야에서도 미래 과학기술의 초석을 놓는 계기로 작용하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일생을 연구원 철학을 갖고 살아온 최형섭 장관이 행정을 수행해야 하는 장관직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고록에서 최 장관은 자신이 “본디 행정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과기처 장관 발령을 받았을 때 그다지 반갑지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장관 발령을 받은 직후 최 박사는 대통령을 만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하며 말을 꺼냈다고 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알았으니 앉으라”고 하면서 최 박사의 얘기를 듣기도 전에 “우리들은 어렵지만 당신네들은 얼마 동안 행정을 하다가 연구실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 아니오. 그러니 2~3년 동안 일하다가 다시 KIST로 돌아가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 최형섭 장관이 건설 중인 고리 원자력발전소를 둘러보고 있다(1973.5) ⓒ |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신임 최 장관의 지론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매년 과학기술처장관이 바뀌고, 새로운 계획을 늘어놓으면 효율적인 연구개발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연구인으로서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견해였다.
때문에 최 장관은 1971년 취임하자마자 과학기술 관계 법령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한다. “여러 기관을 만드는 일, 연구학원도시를 건설하는 일 등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것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보고 과학기술 관련법의 제정과 개정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1967년 제정된 과학기술진흥법의 내용을 보강해 대폭 개정한 데 이어 특전략산업 및 공업기술 분야별 전문연구소 설립 근거가 되는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을 새로 제정한다. 국내 최초의 기술인력개발법인 국가기술자격법을 제정해 우수한 기술자 및 기능자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시설과 자격제도를 운영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한다.
1972년 제정된 기술개발촉진법은 민간 기업으로 하여금 기술개발에 눈을 돌리게 만든 중요한 법이었다. 민간기업 기술개발을 위해 기술개발준비금 적립제도를 새로 만들고, 적립금을 기술에 투자할 경우 금융 및 세제 혜택을 주도록 하는 등의 신기술 촉진법으로 이 법을 통해 국내 산업기술 개발이 정부 주도에서 기업 주도로 변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률 제정을 전후해 논란도 끊이질 않았다. 특히 국내 업체들 간에 심각한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대기업인 삼성과 선경 간의 충돌이 대표적인 사례다. 1970년 당시 삼성과 선경은 비디오테이프를 생산하기 위해 외국에서 중간재인 폴리에스테르 필름을 만드는 기술을 들여오려고 신경전을 하고 있었다.
▲ 선경에서 KIST의 협조를 얻어 개발한 폴리에스터 필름 ⓒ |
그런데 사고가 여기서 발생했다. 도시바의 자매회사였던 도레이에서 이 사실을 알고 그동안 기술공여를 거부해오던 삼성에 연락해 자사의 기술을 로열티 없이 그냥 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값비싼 기술을 그냥 주겠다고 하니 삼성에서 대환영이었다. 삼성은 즉시 정부 측에 기술도입 허가를 신청하는데, 기술개발촉진법에 의하면 국내에서 특정 기술을 개발했을 때는 다른 기술을 도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결국 과학기술처는 삼성의 기술도입을 불허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삼성 측에서 크게 반발하고, 한동안 미묘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러나 최 장관은 회고록에서 “결국 삼성의 기술 도입은 무효로 돌아갔고 우리가 개발한 기술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한국에서 한국인에 의해 개발된 기술에 손을 들어준 첫 번째 사례로 R&D에 전념하고 있는 연구원들의 사기를 크게 높여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