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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고대로 회귀하다.
  고딕 양식은 첨두형 둥근 천장을 짓는 기술로 정의 내릴  수 있다. 여기에서 고딕 양식이 독특한 특징과 예술적인 가치가 창출되었다. 
고딕 양식이 만들어 낸 첨두형 둥근 천장은 반원형 둥근 천장보다 더 많은  무게를 지탱할 수 있었다. 도한  버팀벽이나 플라잉 버트레스(두벽 사이에 아치 모양으로 걸치어 버팀벽과 같은 구실을 하는것)를 이용하여, 무게를 몇몇 지점에 나누어 받게 하고, 두벽 사이를 칸막이로 막는 대신 판유리를 끼워 빛을 투과하도록 했던 것이다. 
칸막이를 없애고 천장의 높이를 더욱더 높이는 방식ㅇ느 지속적ㅇ니 높이경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엄청난 사고만이 높이경쟁에 한계를 그어 줄 숭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하더라도 건축양식의 원칙 자체가 문제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건축양식이 의존했던 것은 새로운 미의 규준에 따라 창출되는 취향을 나타내는 건축기술이었다.
 

질서로 회귀
  르네상스는 방향을 역전시켰다. 건축양식은 더 이상 기술적인 가능성에 의존하지 않고 최고의 미학적 원칙과 대칭성이나 비례 같은 추상적인 개념,  자신의 용어와 분법체계를 통해 엄격히 정제된 언어에 근거하게 되었다. 이것은 질서의 체계였다. 이 원칙 우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미의 개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첨두형 아치를 포기하고  보다 순수한 도안으로 생각한 반원형 아치로 회귀함과 동시에, 기둥 사이에 아키트레이브(엔태블러처의 최하부를 구성하는 수평부분)만 채택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르네상스는 중세의 건축유산을 거부했다. 르네상스는 정태적인 건축개념에 근거한 반원형 둥근 천장을 부활시켰는데, 이 경우  석조건물은 분산되지 않은 수직하중만을 받았다.  또한  르네상스는 내부를 수직으로 과도하게 비약시키거나, 칸막이를 없애고 유리를 끼워 빛을 투과시키는 것 등을 금지했다. 따라서  스테인드 글라스 또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르네상스는 역행적이었다.
 

고딕 양식을 비난하다.
   르네상스가 중세의 마지막 양식을 부적절하게 비난한 것으로 보아 고딕 양식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사리의  말에 따르면, 르네상스는 고딕을 '혼동과 부조화라 부를 수 있을 기괴하고 야만적인 건축' '하나하나  쌓아 올린 저주스러운 예배당' '건물의 모든 비례를 무시한 장식의  축적' 정도로만 보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탈리아가 저주스러운 건물들로 뒤덮이게 된 것은 야만스런 게르만족인 고트족 때문이라고 이야기했고, 여기에서 이 양식을 지칭하는 '고딕'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러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건축가들은 고대의 기념비적 건축으로 되돌아가 교훈을 얻어야 했다.
 
로마 예술에 관심을 가지다
  고대 회귀 운동이 고대 유적이 전혀 보존되어 있지 않은 도시 피렌체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술이 주어진 여건  속에서만 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일깨워 주는 예라 하겠다.
   브루넬레스키를 비롯하여 르네상스 건축이념을 옹호한 초기 피렌체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로마의 예술적인 건물들을 학습하며 고대 예술 원리와 형태의  마지막 반향을 인식했다. 파사드가 매우 조화로운 산 미니아토 성당과 더없는 사랑을 받은 세례당  '일 벨 산  조반니'가 그 예이다. 일 벨 산  조바니는 중앙집중식 건축양식,  기하학적인  장식, 그리고 모자이크를 지닌 건물로 이름을 드높이며  18세기까지 고대적인 건물로 인정받았다.
  특히 이것은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첸티(고아 양육원)의  파사드를 프란체스코 델라 루나가 어떻게 변형시켰는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데, 그  건물의  아키트레이브에 직각으로 몰딩(쇠시리)을 박은 에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브루넬레스키는 1401년 피렌체의 세계당 청동문 양각 콩쿠르에서 기베르티에게 패배한 후,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에 가서 고대 건축물을 연구했따. 고대 건축물은 훗날의 건축형태에서 절대적인  성격을 지니게 될 유용한 예들을 제시했다.
 
로마의 고대 미술품
  실제로 로마는 새로운 건축양식에 결정적인 모델이 될 수많은 건축물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의 으뜸은 판테온이다. 이교도의 신전 판테온은 카톨릭의 성당  산타 마리아 아드 마르티레스로 변활되었기 때문에 파괴되지 않고 온전히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던 유일한 건물이었다. 삼각박공을 지지하는 거대한 기둥이 있는 주랑,  이상적인 중앙집중식 건축양식, 둥근 천장이 씌워진 원형건물 등 판테온은 고대 신전의 완벽한 본보기이다.
 콜로세운, 셉티초니움(팔라티누스 언덕에 인접해서 세워진 7층 건물로 16세기 말에 파괴되었다.) 그리고 크지 않은 건축물 중 마르첼루스 극장이  민간 건축에 오더(원주와 그  상부 엔태블러처의 조합)를 쌓는 작업의 모델을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모델은 포룸의 유적에서 발견되기도  했다.하지만 오더 아래가 땅에 묻혀 있었으므로, 오더의 비례보다도 주두와  엔태블러처의 세부를 더 많이 알 수 있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티투스의 개선문은 도시의 모든 입구와 정문을 마드는 데 영감을 줄 수 있었다. 또한 16세기에  점진적으로 발굴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카라칼라의 목욕탕과 포룸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로마 시대 때 법정, 공회당 따위로 사용된 장방형 건물로 카톨릭 교회 건축사에서 초기 모델을 제공해 주었다.)는 장려한 대칭과 육중한 원형천장으로 덮인 거대한 기둥들 속에서 다양한 형태들을 결합시킨 매우 세련된 평면을 보여 주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는 16세기에 파괴된 고대의 성 베드로 바실리카에서 시작되었다. 이 건물은 바실리카 유형이 지닌 귀족적인 측면과 함께 중앙과 안뜰에 자리한 긴 회랑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었다. 로마의 전원과  아피아 도로면에는 중앙집중식 건축양식의 모델이 될 만한 수많은 표본들이 넘쳐났다.
 15세기에 브루넬레스키, 프란체스코 달 보르고, 줄리아노 다 산갈로 등 르네상스로 방향을 전환한 토스카나인들이 탄생한 이후,  로마는 차츰 외국 건축가(에레라, 필리베르 들로름)는 물론 자국  건축가(브라만테에서 팔라디오에 이르는)에게 새로운 순례지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문화재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가 복구한 나폴리 전원의 별장과 무덤을 제외하고, 남부 이탈리아의 다른 풍부한 유적은 이상하게도 연구되지 않았다.  카푸아의 원형경기장과 파에스툼과 시칠리아의 신전 역시 18세기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반면, 이탈리아 북부의 건축물은 그 지역 학계에 영향을 주었다. 밀라노의 산 로렌초는 거대한 안뜰과 원형천장을 갖춘 훌륭한 중앙집중식 건축양식의 모델이었다. 
  베네치아의 건축가들은 원형경기장과 아치를 그리기 위해  베로나로, 세르기의 아치와 원형경기장을 그리기 위해 이스트리아의 폴라로 떠났다.
  베네치아인은 르네상스 초기의 피렌체인처럼 언제나 고딕 이전의 비잔틴 양식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모로 코두시는 '5점형'(중앙의 원형 천장에 그리스형 십자가가  있고, 주변으로 네 개의  작은 원형천장이 배치된 형태) 교회 설계를 이어받아 간략한 데생으로 성 요한 크리스스토모스 설계도를 만들었다.
 
이탈리아 밖에 있는 고대 로마풍의 건축
  고대 유적의 보고인 이탈리아 이외에 프랑스에도 주목받는 고대 유적이 있었다. 플방스의 라 메종 카레와 아를의 님 투기장, 그리고 오랑주 극장의 아치는 이탈리아인이 데생을 하기 위해 찾던 곳이다. 1495년경 줄리아노 다 산갈로가, 그후 산갈로의 뒤를 이어 팔라디오가 이곳을 찾았다. 이들은 그 지역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이 사실은 생 샤마다리의 아치가 라 투르 데귀성의 정문 건축에 영향을 준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보르도의 '감시 기둥'(17세기 말에  파괴된 신전의 열주), 오탱의  정문은  건축가들의 경탄을 불러일으켰지만, 이탈리아의 건물처럼 연구되지는 않았다. 확실히, 고대를 연구할 필요를 느껴던 16세기의 알프스 북쪽 건축가들은 로마 여행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가장 유명한 유적들을 지니고 있던 로마는 그들에게 훌륭한 예들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완전하지 않은 교훈
  르네상스 건축가들의 집중 연구대상이  된 건축물 가운데 판테온과  밀라노의 산 로렌초, 카톨릭 바실리카만이 내부 공간이 있는 완전한 건물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다른 건물들은 아치나 기둥 따위의 수직적 요소나  건물의 토대 같은 수평적 요소만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조화롭지 않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가야 하는 것은 르네상스 예술가의 몫이다. 어쨌든 관건은 로마의 건축이었다.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그리스 시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고대 유적이 남겨 준 교훈은 아테네의 세련됨(시각적 아름다운, 조각장식)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건축물이 주는 정교한 구성과 거대하고 기념비적인 효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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