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으로 이동

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7,47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32.10.26 총성에 떨어진 무궁화꽃
미국은 76년 1월 박정희 (朴正熙) 의 핵개발을 중지시키기 위해 국무부 관리들을 보냈다.
마이런 크러처 해양.국제환경.과학담당 차관보서리를 단장으로 한 교섭단 일행은 1월22~23일 주한 미대사관에서 최형섭 (崔亨燮.77.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 과기처장관을 대표로 한 우리측 관계자들과 협상을 벌였다.
미국측은 크러처.대니얼 오다너휴 국무부 한국담당과장.폴 클리블랜드 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등이, 한국측에서는 최형섭 장관.윤용구 (尹容九.69. 동원공전 학장) 원자력연구소장. 이병휘 (李炳暉.67. 신형爐연구센터 소장) 과기처 원자력국장등이 참석했다. 말이 협상이지 미국측은 우리를 범죄자 다루 듯했다.
"미국측은 재처리의 '재' 자도 꺼내지 못하게 강압적으로 나왔어요. 말을 안들을 경우 고리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핵연료 공급을 중단하고, 심지어 핵우산도 철거하겠다고 거의 협박조로 나왔지요. 尹소장과 李국장이 '너희는 양반 노릇만 하고 우리는 밤낮 너희 밑에서 짐꾼역할만 하라는 거냐' 고 미국측에 따졌어요.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공부한 터라 미국 관리들을 별로 어려워하지 않았습니다. " (최형섭)


그러나 미국측의 태도는 완강했다. 크러처 일행은 회담에 앞서 朴대통령을 만나 '강행시 군사원조 중단' 방침을 통고한 상태였다. 朴대통령은 崔장관을 불렀다.
"崔박사, 이제 고집 꺾고 재처리 그만둡시다. 미국이 다 책임지겠대요. "
미국의 위협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시설 도입을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핵개발을 감시하기 위해 주한 미대사관에 과학관을 파견키로 했다. 캐나다에서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려는 계획도 취소됐다. 그러나 박정희는 핵개발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군사원조 중단 통고
76년 1월말 미국의 엄중한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재처리사업은 '화학처리 대체사업' (일명핵연료 국산화사업)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연구용 원자로는 자체 개발키로 결정됐다. 대체사업 전담기구도 76년12월 핵연료개발공단으로 탈바꿈했다. 공단의 초대 소장엔 특수사업담당부서 책임자 주재양 (朱載陽.64.재미) 박사가 임명됐다. 원자력연구소에서 특수사업담당부서만 따로 떼어내 핵연료개발공단을 만든
셈이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대덕 (대전시)에 개발공단을 세우려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체사업은 우라늄 정련 (精鍊).전환시설, 핵연료가공시설, 조사 (照射) 후 시험시설, 방사성 폐기물 처리시설등을 들여와 재처리의 핵심시설을 갖추려는 것이었다. 일종의 짜깁기식으로 재처리시설을 확보하자는 계획이었다.
당시 핵연료개발공단 개발제2연구부장으로 실무책임을 맡았던 김철 (金哲.59.아주대 대학원장) 박사의 증언.
"무엇을 어떻게 사야 할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요. 각 시설에 필요한 품목들을 겨우 알아내 기기 (器機) 들을 따로 구입, 조립해보니 서로 규격이 맞지 않아 난처했던 경우가많았습니다. 미국은 특히 재처리의 핵심 부분과 비슷한 조사후 시험시설과 방사성 폐기물
처리시설 도입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일일이 간섭했어요. "


 

美관리 수시로 공단방문
미국의 감시는 집요했다. 공단 관계자들이 국내에 매장된 우라늄을 캐내 핵연료로 가공하는 것이 대체사업이라고 둘러댔지만 미국측은 믿지 않았다. 주한 미대사관에 파견된 로버트 스텔러라는 과학관은 대체사업의 내용을 알아내려고 불시에 개발공단을 찾아오곤 했다.


金박사의 계속되는 증언.
"이 친구는 미중앙정보국 (CIA) 요원으로서 원자력 관계 훈련을 받고 한국에 파견됐어요. 사전에 전화도 없이 불시에 달려오곤 했어요. 승용차에 성조기를 펄럭이며 나타날 때는 정말 위세등등했습니다. 소장 방에 들러 인사하는 법도 없었어요. 아무 방이나 '문 열라' 고 하고 시설 측정도 제멋대로 했어요. 화가 나 여자 화장실 문을 열어 조사하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위상인가 싶어 서글픈 생각도 들고, 자존심이 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
각종 시설들을 제공하는 프랑스측에도 핵개발 사실을 숨겨야 했다. 그러자니 핵심 기기들에 대한 설계를 요청할 때마다 프랑스측과 자주 승강이를 벌여야 했다.
대체사업의 핵심시설인 조사후 시험시설의 도입 책임을 맡았던 박원구 (朴元玖.65.인하대 금속공학과 교수) 공단 핵연료개발부장의 증언.
"조사후 시험시설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핫셀 (방사능 차폐시설) 이에요. 강도가 센 콘크리트로 핫셀의 두께를 1m로 하면 고준위 방사능을 차폐시킬 수 있어 재처리시설로 쓸 수 있었어요. 프랑스 회사 상고방이 눈치채고 핫셀의 두께를 80㎝ 이하로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
하더군요. 그래서 보통 콘크리트 1m로 설계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실제로 건설할 때는 강도가 센 콘크리트를 쓸 작정이었지요. "


한편 연구용 원자로 (NRX) 개발사업은 김동훈 (金東勳.66.전 다목적연구로사업단장) 박사가 이끄는 원자력연구소 장치개발부가 맡았다. 이 사업 역시 미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사업명칭을 처음엔 'TFTF (열중성자 시험시설)' 사업으로 위장했다가 나중엔 '기기장치 개발사업' 으로 바꿨다.

 

그의 증언.
"약 30명이 이 사업에 참여했어요. 지원이 필요할 때는 원자력연구소 각 부서에 부문별로 프로젝트를 맡겨 해결하곤 했습니다. 설계.기술자료등은 73년부터 캐나다와 연구용 원자로 도입 교섭을 벌일 때 이미 상당수 확보한 상태였지요. 또 대만 (臺灣)에서 많은 자료들을 얻어오기도 했지요. "
이번에 취재팀이 단독 입수한 '원자력이용개발 제4차 5개년계획' (과기처.78년2월) 과 한국 핵연료개발공단의 '사업계획서 (77~80년)' 등 관련자료들에 따르면 대체사업은 당초 81년까지 완료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방해와 프랑스로부터의 시설 도입이 늦어지면서 83년으로 목표가 수정됐다.


또 윤용구 원자력연구소장이 77년2월 원자력위원회에 제출한 '원자력연구개발 기본방안' 에 따르면 '기기장치 개발사업' 은 78년까지 설계를 끝내고 79~81년엔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하는 것으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 김동훈 박사는 "朴대통령이 사망한 79년 10월엔 설계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 며 "연구로 개발사업은 계획보다 약간 늦어지긴 했지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고 말했다.
78년 10월 핵연료가공시설이 준공됐다. 이날 핵연료개발공단에 이르는 비포장도로에 뽀얀먼지를 일으키며 검은 세단 20여대가 갑자기 나타났다. 朴대통령 일행이었다.

윤석호 (尹錫昊.68.전 충남대 교수) 개발공단 건설본부장은 "朴대통령이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며 "과학자들의 손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격려했다" 고 말했다. 79년 5월에는 우라늄 정련.전환공장 기공식이 거행됐다.


대체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되자 미국측은 긴장했다. 윤용구박사는 "이 무렵 미국측은 우리가 대체사업을 통해 핵개발을 계속해온 것을 알아차린 것같다" 고 말했다. 박정희가 살아 있었다면 85년께엔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었다는게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그해 10월 박정희는 핵심 측근 김재규 (金載圭.사형.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제거됐다.
박정희의 죽음 뒤에 미국이 있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돈 것은 핵개발을 둘러싼 미국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10·26 美 관련說 꼬리물어
79년 12.12 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全斗煥.66) 정권은 핵개발을 포기했다. 신군부는 81년 1월 핵연료개발공단을 원자력연구소와 통합,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핵개발에 관한 연구는 물론 원자력이란 용어조차 사용치 못하게 했다.
과학자들은 폐기물처리시설 부지 선정등 '허드렛일' 로 내몰렸고 핵심 관계자들은 쫓겨났다.


미국으로부터 쿠데타의 정당성을 추인받기 위한 조치였다. 91년 11월 노태우 (盧泰愚.65) 대통령은 "핵연료 재처리시설과 핵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 는 '한반도 비핵화선언' 을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핵주권마저 포기했다.


일본이 67년 핵의 제조.보유.반입 금지라는 '비핵 3원칙' 을 선언하는 대가로 농축과 재처리 시설, 대량의 플루토늄까지 소유할 수 있게 된 반면 아무 대가도 없는 우리의 핵주권 포기는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핵무기 보유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을 수 있다.
박정희는 핵개발 사실을 미국측에 흘림으로써 주한미군의 완전철수를 막는등 유용한 대미 (對美) 협상카드로 활용한 것만은 틀림없다. 아무튼 박정희의 죽음으로 핵무기 보유는 미완의 사업으로 역사 속에 묻혔다.


  1. No Image notice

    회원 삭제 대상자

    회원정보 정리작업(삭제) 안내 공지에 따라 아래 ID회원은 2012.12.31 삭제됩니다. 1차 회원 삭제 대상자 ID (333명) a0708 ella2009 krosa77 sewook2100 a0de39052407 elninotw ksjhp17 sgc2001 a0qqpdxadd5422 fever372 kth719 shee1225 a1953apo2702 ffchc1...
    Date2012.12.26 Bymahru Views16,791
    read more
  2. No Image notice

    회원정보 정리작업(삭제) 안내 공지

    회원 가입후 지속적으로 사용을 안하고 있는 회원정보의 정리작업이 있습니다. 1차적으로 1년 이상 로그인 기록이 없는 회원의 정보를 불가피하게 임의로 2012.12.01부터 2012.12.31까지 삭제할 예정입니다. 불필요한 데이터보관을 방지 및 운영, 유지 관리를 ...
    Date2012.11.02 Bymahru Views13,095
    read more
  3.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8.집념과

    38.집념과 박정희 (朴正熙) 전대통령 추종자들은 그를 세종대왕이나 충무공 이순신 (李舜臣.1545~98) 장군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기도 한다. 그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뚜렷한 공과 (功過) 를 남긴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를 영웅화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역...
    Date2008.07.30 Bymahru Views8,135
    Read More
  4.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7.연인...아내...그리고

    37.연인...아내...그리고 청와대 안주인의 역할과 이미지는 대통령의 국정수행능력에 버금가는 국민들의 관심사다. 이번 대선에서도 많은 유권자들, 특히 여성 유권자의 90%가 후보 부인을 보고 누구에게 표를 찍을 것인지 결정하겠다는 여론조사가 있었다. 육...
    Date2008.07.30 Bymahru Views7,596
    Read More
  5.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5.5.16 혁명

    35.5.16 혁명 박정희 (朴正熙) 는 언제, 어떻게 좌익세력과 연계됐을까.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김종신 (金鐘信.67.전 부산문화방송 사장) 씨는 69년초 군시절 상관이자 朴대통령의 육사 동기인 정강(鄭剛.육군 준장 예편.작고) 장군을 만난 적이 있다. 鄭씨는 ...
    Date2008.07.30 Bymahru Views7,761
    Read More
  6.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4.좌경을 딛고

    34.좌경을 딛고 1961년 11월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찾은 박정희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공항에서부터 시위대에 시달려야 했다. 수만명이 공항 입구에서 '살인마 박정희를 타도하자' '군대깡패 두목 물러가라' 를 외치고있었다. 혁신계 신문 민족일...
    Date2008.07.30 Bymahru Views7,270
    Read More
  7.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3.착수 6년만에 쏘아올린 유도탄

    33.착수 6년만에 쏘아올린 유도탄 미사일 (유도탄) 은 비행하는 종합과학이다. 총기나 대포류와 달리 유도조정.구조해석.풍동(風洞) 시험.추진제등 각 분야의 고도기술이 농축된 무기체계의 정화다. 첨단기술 불모의 시대였던 70년대말 미사일 국산화 성공은 ...
    Date2008.07.30 Bymahru Views7,546
    Read More
  8.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2.10.26 총성에 떨어진 무궁화꽃

    32.10.26 총성에 떨어진 무궁화꽃 미국은 76년 1월 박정희 (朴正熙) 의 핵개발을 중지시키기 위해 국무부 관리들을 보냈다. 마이런 크러처 해양.국제환경.과학담당 차관보서리를 단장으로 한 교섭단 일행은 1월22~23일 주한 미대사관에서 최형섭 (崔亨燮.77.포...
    Date2008.07.30 Bymahru Views7,472
    Read More
  9.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1.핵개발 보류

    31.핵개발 보류 73년 3월 주재양 (朱載陽.64.재미) 박사가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에 취임, 새로 생겨난 특수사업 담당 부서의 책임을 맡으면서 핵개발은 본격화된다. 이 부서가 바로 핵개발 전담부서였다. 朱박사는 서울대 화공과 재학중 미국으로 건너가 텍...
    Date2008.07.30 Bymahru Views7,231
    Read More
  10.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30.미국의 일방적인 철수에 '핵보유' 결심

    30.미국의 일방적인 철수에 '핵보유' 결심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이 핵개발을 시작한 동기는 예기치 않은 미국의 주한미군 철군 통보였다. 북한에 비해 군사력에서 절대 열세였던 시절이었기에 국민들은 위기감에 사로잡혔고 박정희는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
    Date2008.07.30 Bymahru Views7,368
    Read More
  11.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9.핵개발2

    29.핵개발2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가 아닌 실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가 있었다. 작가 김진명 (金辰明.39) 씨가 국제적인 핵물리학자 이휘소 (李輝昭.77년 작고) 박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을 소재로 쓴 이 소설은 93년 8월 출간, 1년도 안돼 3...
    Date2008.07.30 Bymahru Views7,583
    Read More
  12.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8.핵개발

    28.핵개발 풍운아 박정희 (朴正熙) 는 어느날 홀연히 국민앞에 나타났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의 극적인 삶과 죽음을 두고 일본의 한 정치인은 '하늘은 영웅을 냈다가 시대의 소임을 다하면 갑자기 거둬간다' 고 애도했다. 물론 그의 업적에 대해...
    Date2008.07.30 Bymahru Views7,366
    Read More
  13.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7.한일의 관계

    27.한일의 관계 한.일회담은 밀실회담이었기에 권력 변화에 민감했다. 일본은 박정희 (朴正熙) 라는 새 권력자를 협상의 최고 파트너로 판단, 군정(軍政) 기간중 회담을 타결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케다 하야토 (池田勇人) 총리가 '金 (JP) - 오히라 메모' 를 ...
    Date2008.07.30 Bymahru Views7,140
    Read More
  14.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6.자민당 실력자 오노의 망언

    26.자민당 실력자 오노의 망언 63년 12월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의 취임사절로 참석했던 일본 정계의 거물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자민당부총재는 희대의 망언 (妄言) 을 했다. 귀국 기자회견에서 그는 朴대통령의 취임 연설을 '세기의 연설' 이라고 높이 평...
    Date2008.07.30 Bymahru Views7,382
    Read More
  15.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5.지한파

    25.지한파 한.일관계는 61년 6월초 박정희 (朴正熙) 의 문경보통학교 제자 전세호 (錢世鎬.당시 재일 한국학생동맹위원장) 란 인물의 등장으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그는 "혁명과업을 돕기 위해 일본서 왔으니 朴장군을 만나게 해달라" 고 요구하다 경찰...
    Date2008.07.30 Bymahru Views7,114
    Read More
  16.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4.밉지만 배울건 배우자

    24.밉지만 배울건 배우자 5.16 직후의 일본은 지금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될 정도로 우리에겐 깊은 심연의 '가깝고도먼 나라' 였다. 짙게 깔린 반일감정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가로막고 있었으나 5.16 주체들로선 권력 유지와 '혁명공약' 인 경제개발을 위해...
    Date2008.07.30 Bymahru Views7,538
    Read More
  17.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3.나 고속도로에 미쳤어 정치적 반대 묵살

    23.나 고속도로에 미쳤어 정치적 반대 묵살 고속도로는 이제 우리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레 자리잡고 있다. 지금 와서는 정부 최고결정권자의 식견이 국가발전에 미치는 영향력의 지대함을 거론할 때 대표적인 사례로 등장하는 박정희 (朴正熙) 의 고속도...
    Date2008.07.30 Bymahru Views7,363
    Read More
  18.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2.경제적 극일 집착 '경공업으로 승부수'

    22.경제적 극일 집착 '경공업으로 승부수' 박정희 (朴正熙)가 경제발전의 모델로 일본을 선택하고 일본으로부터 배우려 했던 궁극적 목적은 일본을 따라잡고 넘어서겠다는 '극일 (克日)' 의 야망 때문이었다. 그 야망의 첫 단추가 끼워진 것이 허허벌판인 울산...
    Date2008.07.30 Bymahru Views7,774
    Read More
  19.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1.산림녹화

    21.산림녹화 미국의 한 하원의원이 지난 초여름 특별기로 북한을 방문한 후 바로 공해를 거쳐 한국땅에 진입하면서 "지옥에서 천당으로 들어왔군" 이라는 탄성을 발했다고 한다. 그가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쪽에서 상대적으로 훨씬 풍요로운 한국 영토로 들어왔...
    Date2008.07.30 Bymahru Views7,034
    Read More
  20.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20.한뼘 땅도 열외 불허 '그린벨트'

    20.한뼘 땅도 열외 불허 '그린벨트' 외국에선 "20세기 각국의 국토계획중 대표적 성공사례로 환경보전정책의 백미 (白眉)" 라는 극찬을 받고, 국내에선 "대도시 주민들의 숨쉴 공간을 마련했다" 는 얘기와 함께 '박정희 (朴正熙) 의 최대 걸작' 이란 평가를 받...
    Date2008.07.30 Bymahru Views7,303
    Read More
  21.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19.가전제품

    19.가전제품 '가난은 나라도 못구한다' 는 말 대신 '가난은 나라만이 구할 수 있다' 는 것을 신념으로 안고 살아간 박정희 (朴正熙) .그런 그가 끝내 미심쩍어 한 분야가 전자산업이다. 60년대 후반부터 전자산업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어 가기는 했지만 '...
    Date2008.07.30 Bymahru Views7,389
    Read More
  22. No Image

    [朴正熙의 政治經營學]18.중앙정보부

    18.중앙정보부 절대기아 (饑餓) 로부터의 해방은 5.16직후부터 박정희 (朴正熙)에게 주어진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먹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무렵 그가 집착했던 대목은 한국땅에서 나는 석유였다. 바람이 간절하면 때론 꿈으로도 나타난다던가. 과묵.신...
    Date2008.07.30 Bymahru Views7,389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