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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자민당 실력자 오노의 망언
63년 12월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의 취임사절로 참석했던 일본 정계의 거물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자민당부총재는 희대의 망언 (妄言) 을 했다.
귀국 기자회견에서 그는 朴대통령의 취임 연설을 '세기의 연설' 이라고 높이 평가한 뒤 "아들의 성공을 보는 아버지의 흐뭇함을 느꼈다" 고 속마음을 내비쳤다.
이 발언은 국민들의 가슴에 반일 (反日) 의 불씨를 되살려 놓았다.
당시 朴대통령과의 친밀도에서 으뜸가던 오노는 원래는 반한 (反韓) 분위기를 주도한 자민당 당료파의 수장이었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추진되던 60년대초 일본의 집권 자민당은 크게 관료파와 당료파로 나눠져 있었다.
5.16직후 한.일관계 정상화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갔던 최영택(崔榮澤.69.육사 8기) 참사관은 오노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았다.
"일본에 가기 전에는 기시등 관료파들과 잘 얘기하면 끝날 걸로 생각했는데 당료파의 협력없이는 아무 것도 안되더군요. " 崔참사관이 당료파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처음 찾은 사람은 고다마 요시오 (兒玉譽士夫) 라는 인물이었다.
기시 뒤에 야스이가 있듯 오노의 막후에는 고다마가 있었다.막후의 인물이 흔히 그렇듯 고다마 역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극우 보수주의자인 그는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벌이던 1930년대부터 대륙에서 '고다마 특무부대' 를 이끌면서 밀정을 이용한 정보 수집과 마약 밀매를 통한 군자금 마련 역할을 했다.
그는 이 와중에 사모은 금괴를 가지고 패전후 일본으로 돌아가 정치자금을 뿌리며 막후의 인물로 자리잡았다.
식민지 한국에서 태어나 선린상업까지 나온 그는 한국을 잘 알고 있었고, 한국인 야쿠자의 대표격인 마치이 (74.한국명 鄭建永) 는 그의 '꼬붕 (子分.부하)' 으로 알려져 있었다.
62년 3월13일 고다마의 저택을 찾은 崔참사관은 입구에서부터 입이 벌어졌다. 폭포가 쏟아지는 인공 산, 비단잉어가 헤엄치는 연못, 별채 건물에서는 유도와 검도를 하는 젊은 청년들의 우렁찬 기합소리가 퍼져 나왔다.
현관에 도착하자 미모의 젊은 부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 맞이했다.응접실에서 기다리자 슬리퍼를 끌고 고다마가 나타났다.까까머리에 땅딸막한 체구.


최영택참사관,협조 요청
"한.일회담을 반드시 성사시키라는 특명을 받고 왔습니다.선생께서 힘을 빌려주십시오. "
"협력하겠습니다.나도 한국에서 학교를 나왔습니다.다시 한국에 가보고 싶습니다." 긴 얘기가 필요치 않았다.
정상배 고다마의 머릿속에는 한.일 국교정상화와 이어질 경제협력, 이에 따른 각종 이권개입의 그림이 이미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일본은 이미 인도네시아와의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기에 한.일관계의 앞날도 내다보고 있었다.
고다마를 통해 오노와 처음 만난 곳은 아카사카의 요정 지요신 (千代新).묘하게도 이곳은 오노의 반한 감정의 뿌리가 살아 숨쉬는 곳이었다.
식민지 한국에서 사업을 하던 오노는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패전 직후 일본 나고야의 한 술집에서 재일교포 청년들에게 테러당한 적이 있다.
당시 같이 있던 게이샤 (藝者.기생)가 "나를 대신 죽여라" 며 넘어진 그를 감싸 안았다. 그때 오노는 이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었고, 그를 감싸 안았던 그 기생이 지요신의 주인이었다. 이런 악연 탓인지 오노는 "내가 뭐 외교를 아는가" 라며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오노를 설득하는데 보이지 않는 힘이 된 인물은 엉뚱하게도 일본 언론계의 거물인 와타나베 쓰네오 (渡邊恒雄.71) 요미우리신문 사장겸 주필이었다.
당시 요미우리신문 정치부장이었던 와타나베는 오노와 고다마가 만나는 비공식적인 자리에는 거의 매번 참석, 오노의 정치참모역을 했다.
보수적 성향의 언론인 와타나베는 고다마와 함께 한.일 협력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오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마음을 돌린 오노는 화끈한 성격처럼 한.일관계 정상화에 총대를 메고 나선다. 오노를 친한파로 돌려놓는등 사전 정지작업이 일단락될 무렵 JP (김종필 중앙정보부장.현 자민련총재)가 등장한다.
한.일간의 공식적인 외교협상도 상당히 진전돼 협상의 핵 (核) 인 청구권 자금액수를 결정하기 위한 실력자의 마지막 결심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62년초 실무협상이 시작될 당시 청구권 자금에 대한 우리측 안은 8억달러,일본측 안은 8천만달러. 10배에 달하는 엄청난 간극은 협상이 진행되면서 우리측 3억5천만달러, 일본측 2억5천만달러로 좁혀져 있었다.
박정희는 62년 10월 방미 (訪美) 길에 나서는 JP에게 "金부장이 직접 청구권문제를 매듭지으라" 는 특명을 내리고 이케다 (池田) 총리에게 보내는 친서 (협상의 전권을 JP에게 위임한다는 내용) 까지 써줬다.JP는 이케다에게 친서를 전달한 뒤 일본측 전권을 쥐고 있는 오히라 마사요시 (大平正芳) 외무장관과 독대했다.
당시 회담기록에 따르면 이날 밀실회담에서 JP는 실리를, 오히라는 명분을 강조했다. 오히라는 3억달러를 양보안으로 내놓는 대신 사죄의 의미가 포함된 '청구권'이란 말 대신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협력' 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청구권이란 일본이 사죄하는 의미에서 조건없이 주는 돈을 의미한다. 朴의장으로부터 '최소 6억달러' 란 마지노선을 하명받고 온 JP는 명칭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없이 '정부차관을 포함해 6억달러는 돼야한다' 고 주장했다.
정부차관이란 엄밀히 말해 청구권과는 달리 이자를 지급하고 빌리는 돈이다. 다시 말해 JP는 '청구권' 이라는 명분, 돈의 성격은 차치하고 총액 6억달러를 강조한 셈이다. 독대였기에 회담이 끝난 후 양국 실무자들이 회담내용을 전해들은 뒤 서로 대조.확인하는 과정이 따랐다.
이때 일본측은 JP가 '청구권' 대신 '독립축하금' '경제협력' 명목으로 하자는 오히라의 제안에 동의했다고 주장해 혼선이 빚어졌다.
'굴욕외교' 라며 국내 반대여론이 들끓고 있던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장 미국에 있던 JP에게 朴의장의 긴급 전문이 날아들었다.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청구권에 대한 변제 내지 보상으로 지불된 것이라는 점을 납득시킬 수 있는 표현이 돼야 할 것' . JP는 11월12일 다시 일본으로 날아가 오히라와 단 둘이 만났다. 그리고 이날 만들어진 것이 바로 '金- 오히라 메모' 다.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α' . 청구권형식으로 조건없이 받는 돈은 당초 오히라가 제안한 3억달러이고, 6억달러를 채우기 위해 정부.민간차관 3억달러를 덧붙였다.
대신 메모에는 '청구권' 이나 '독립축하금' 등의 이름은 명시하지 않았다. 양국의 여론상 어느 한쪽이 주장하는 이름을 명시하기 힘들자 JP가 아이디어를 내 '각자 편리한 명칭을 쓰자'고 했기 때문이다. 6억달러라는 마지노선은 지켜졌지만 명칭은 한국에선 '청구권' , 일본에서는 '경제협력' 으로 달리 부르는 편법으로 해결된 셈이다.
한.일회담 타결을 서두른 '혁명주체' 들은 군인답게 고지를 점령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청구권의 명확한 성격문제, 어업권이나 독도문제, 재일 한국인 지위문제등에 대해서는 명확히하지 않아 이후 '굴욕외교' 란 비난이 끊이지 않게 된다.

이케다 추인 미뤄 진통도
한.일회담 타결을 서두른 '혁명주체' 들은 군인답게 고지를 점령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청구권의 명확한 성격문제, 어업권이나 독도문제, 재일 한국인 지위문제등에 대해서는 명확히 하지 않아 이후 '굴욕외교' 란 비난이 끊이지 않게 된다.
어쨌든 이날 밤 JP는 일본 정계로부터 최고대우를 받았다. 오노가 지요신으로 자민당 8개 파벌의 보스를 모두 모은 뒤 JP를 초대한 것이다.국가원수들도 받기 힘든 대접이다.
그러나 유럽순방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이케다총리는 귀국후 자금 지불 방법과 재원 문제등에 이견을 내놓으면서 추인하지 않았다. 다시 오노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JP는 그를 한국으로 초청했다.오노가 망설이자 고다마와 와타나베가 나섰다. "오야지 (親父.
아버지란 뜻이나 가까운 윗사람을 부르는 존칭) , 저희가 같이 가겠습니다." 金 - 오히라 메모가 만들어진지 한달 뒤인 12월10일 오노는 자민당 각 파벌의 대표격인 간부급 의원 10명과 외무성 관료.취재기자.작가등 대규모 방한단을 이끌고 김포공항에 내렸다.
오노를 맞는 朴의장 역시 파격의 예우를 다했다. 당초 11일 오전 20분간으로 예정된 이날 예방은 2시간 동안 점심을 같이 한 오찬회동이 됐고, 오노가 떠나기 전날 밤 비밀요정에서 회동한 두 주호 (酒豪) 는 아예 거창한 술판을 벌였다. 오노는 朴의장에게 "회담의 결론을 내겠다.내가 책임진다" 고 호언했다.
실제로 그가 일본으로 돌아간 5일후인 62년 12월18일 이케다는 金 - 오히라 메모를 추인했다. 이날은 제3공화국 헌법이 국민투표에 부쳐져 투표율 85%, 찬성률 80%의 압도적 지지로 통과된 날이기도 하다.
다 풀릴듯 했던 한.일 국교정상화는 해가 바뀌고 제3공화국 출범의 진통이 시작되면서 국내정치에 휘말려 표류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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