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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가전제품
'가난은 나라도 못구한다' 는 말 대신 '가난은 나라만이 구할 수 있다' 는 것을 신념으로 안고 살아간 박정희 (朴正熙) .그런 그가 끝내 미심쩍어 한 분야가 전자산업이다. 60년대 후반부터 전자산업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어 가기는 했지만 '전자제품 = 사치품' 이란 그의 근본 생각은 말년까지 큰 변화가 없었던 것같다.
61년 수출 실적이 전무 (全無) 했던 전자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 88년부터 분야별 수출 실적 1위를 고수하며 한국을 세계 6대 전자 메이저로 올려놓았다. 지난해만 해도 총수출액의 32%에 해당하는 4백12억달러를 전자산업이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의 손길은 얼른 느껴지지 않는다. '박정희 경제' 를 다룰 때 감초처럼 등장하는 석유화학.중화학.고속도로.포항제철등과 달리 그가 현장을 누비며 남겨 놓은 흥미진진한 스토리도 거의 없다. 절약이 최대의 미덕이었던 시대의 지도자로서 먹고 입는 문제와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전자산업에 대해 그런 편견을 가졌음직 하다.
그런 박정희가 자신도 모르는 새 한국 전자산업의 기초를 닦는 획기적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5.16의 해, 61년 일이다. 58년 10월 문을 연 금성사는 적자를 면치 못해 돈줄인 락희화학으로부터 폐업을 종용받고 있었다.
그런데 군사정부가 사치품 (특정외래품.밀수품) 단속령을 발표하고 외제 라디오 거래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창고속에 묻힌 금성 라디오들이 빛을 보게 됐다. 두달 뒤 (61년 7월) 부터 '혁명홍보' 를 목적으로 대대적으로 벌어진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은 금성사의 회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금성 라디오는 5.16이후 넉달만인 9월 전년대비 50만대 늘어난 89만3천대나 팔려 나갔다.

근혜씨 전자공학과 진학
박정희는 뒤이어 61년 9월 텔레비전방송국 설립을 허락, 또한번 전자산업 발전에 기여한다.
한창 개국 준비중이던 KBS (12월31일 개국) 와는 별개로 새로운 TV방송국 (TBC) 을 세우도록 한 것이다. 전자산업의 발전을 염두에 둔 건 물론 아니었다.
일본 TV방송의 영향권에 들어있던 부산.경남 일대에 일본바람의 차단이 목적이었다. 전자산업에 대한 박정희의 무관심에 첫 충격을 던진 인물은 초대 과학기술처장관 (67년 4월~71년6월) 김기형 (金基衡.72) 씨. 세라믹공학 권위자로 미국 뉴욕 에야리덕션 전자요업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있다가 한국 정부의 해외 두뇌 유치 케이스로 66년 8월 하순 귀국한 金박사는 곧 朴대통령을 만났다.
金박사는 1시간 가량의 대화시간을 주로 전자공업 (전자산업은 최근의 용어) 과 세라믹공업의 육성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할애했다. "노동집약적인 산업이어서 유휴노동력이 많은 한국에 유리하다" 는 요지였다.
대화가 끝날 무렵 金박사가 "선물로 가져왔다" 며 손수 만든 인조 다이아몬드 목걸이등 액세서리와 저항체 소자 (素子) 한 세트를 불쑥 내밀었다.
"그게 뭡니까?"
"제가 개발한 겁니다. 여기 (플라스틱)에 붙은 이게 저항체 소자라는 건데 하나에 1달러짜리 입니다. 주로 전자제품을 만들 때 쓰이지요. "
"아니, 그 손톱만한 걸 1달러나 받아요?"
박정희는 그때까지 전자라는 용어조차 몰랐다.
그는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한 전자업계에 대해 "사치품이나 만들면서…" 라고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상당수의 언론인.정치인.식자층까지 TV 국산화를 "사치풍조를 조장한다" 고 반대하던 시절이었다. 66년 당시 19인치 국산TV 가격은 8만7천원. 대통령 월급 (7만8천원) 보다 많았다.

在美 김완희박사 영입
그 시대의 전자공업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하나. 한국 전자산업 산파역중 한사람인 이만희 (李晩熙.71) 씨는 상공부 사무관 시절이던 62년 3월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개최된 국제무역박람회 한국관 관리책임자로 파견됐다.
1개월 뒤 귀국, 정부관리로는 최초로 전자공업 육성을 건의하는 리포트를 제출했다. "뚱딴지 같은 소리 한다고 핀잔만 들었지요. 명색이 상공부에서…. " 李씨의 수난은 66년 2월 전기공업과장 때도 계속된다.
"몇군데 업체에서 TV 국산화를 위해 샘플로 TV를 수입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상역과(商易課)에 가서 얘기를 꺼내는데 한 사무관 (李씨는 그때 서기관) 이 대뜸 '이 자식 정신 나갔어? 업자의 앞잡이냐' 고 소리를 치더니 '국산화 좋아하네' 하면서 벌떡 일어나 오른 뺨을 올려붙이더라고요. 우리 국장 (공업2국장)에게 얘기했더니 위로는커녕 '당신 같은 사람은 국가에 보탬이 안되니 한강물에나 빠져 죽으시오' 하면서 어떻게나 기합을 주던지…. "
李씨는 그러나 당시 오원철 (吳源哲) 공업1국장의 주선으로 박충훈 (朴忠勳) 상공장관으로 부터 직접 OK 사인을 받아냈다. 김향수 (金向洙.85) 아남그룹 명예회장의 회고는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68년 반도체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입니다. 간신히 김정렴 (金正濂) 상공장관에게 대부 추천을 받고 은행문이 닳도록 뛰어다니는데 (반도체의) 부피가 작다고 사업으로 쳐주질 않아.
어렵게 대부받아 기자재를 수입해 오니까 이번에는 세관이 골치야. 반도체 칩과 리드 프레임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금줄이 있는데 금을 밀수하는 줄 알고 통과시켜 주질 않는 거야. "
아무튼 김기형 박사로부터 '손톱만한 돈보따리' 를 선물받은 박정희는 그것을 봉투에 담아친필로 '요검토 (要檢討)' 라고 써서 박충훈 장관에게 내려 보낸다. 이것이 박정희의 전자산업 관련 최초의 지시였다.
그해 12월 朴장관은 전자산업을 수출전략산업으로 발표하고 朴대통령은 이듬해 연두교서에서 전자산업 중점 육성을 선언하게 된다. 박정희의 인식 변화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은 훗날 '한국 전자산업의 대부' 로 불리게 된 김완희 (金玩熙.70.미국 거주) 박사. 그는 박정희의 초청으로 67년 9월4일 귀국, 국내업계 현황을 둘러본 뒤 9월16일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건의서' 라는 제목의 브리핑 차트를 들고 청와대로 갔다.
막 들어서는 그를 향해 박정희가 말했다.
"金박사, 우리도 이런 걸 만들어 팔아야 되지 않겠소. (주력상품인) 섬유는 창고 가득해 봐야 10만달러도 받기 어려운데 이런 건 손가방 하나 만큼이 30만달러, 50만달러 하니 말이야. "
당시 박정희가 보여준 것은 그해 3월 한국에 진출한 미국 모토로라사가 샘플로 제출한 트랜지스터 회로세트였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전자.컴퓨터공학과 주임교수이던 金박사는 "곁에서 도와달라" 는 朴대통령의 요청을 가족들의 반대 때문에 고사했지만 방학 때마다 귀국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박정희와 1백여통의 편지를 주고 받는 '전자산업 개인교수' 역할을 했다.
박정희는 金박사를 '상공.체신.과기처장관 특별고문' 이란 기묘한 직함을 주어 활용했다. 70년 1월 조선호텔에 머무르던 金박사는 육영수 (陸英修) 여사의 전화를 받았다.
陸여사는 "박사님 때문에 우리애 (맏딸 槿惠.46.정수장학회 이사장) 를 전자공학과에 보내게 됐어요. 저는 가사과에 보내려고 했는데…" 라면서 전자공학과 장래성에 대해 물어봤다. 박정희의 고향 구미에 들어선 전자수출공단과 함께 전자산업에 대한 그의 인식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컬러TV는 끝내 不許
그러나 박정희는 70년대 중반 컬러TV방송 허용 논란이 일자 '절대불허' 방침을 내린다. 허용론자였던 김완희 박사가 전하는 박정희의 불허 논리.
"내가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잘 사는 놈만 더 잘 살게 된다' 는 거요. 컬러도 흑백 가진 놈들이나 살 것 아니오. 청계천 밑이나 농촌에 가보시오. 흑백도 없는데 어떤 ×은 컬러를 본다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소. "
컬러TV는 74년 한국나쇼날이 국내 최초로 조립 생산한데 이어 77년 삼성과 금성사가 잇따라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본격 궤도에 오른다. 그러나 박정희의 불허 방침 때문에 국내수요없이 전량 수출하는 기형적 현상을 이어가다 78년부터 미국등 선진국으로부터 덤핑 판정을 받고 수입 규제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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