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의 政治經營學]29.핵개발2

by mahru posted Jul 30, 200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9.핵개발2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가 아닌 실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가 있었다. 작가 김진명 (金辰明.39) 씨가 국제적인 핵물리학자 이휘소 (李輝昭.77년 작고) 박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을 소재로 쓴 이 소설은 93년 8월 출간, 1년도 안돼 3백만부가 팔렸으며 영화로까지 제작돼 박정희 (朴正熙) 시대의 원폭 (原爆) 개발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박정희시대의 핵개발을 지휘.감독한 청와대 경제 제2수석실의 김광모 (金光模.64.테크노서비스 사장) 비서관은 이휘소 박사 관련설을 전면 부인했다. 핵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 역시 "이휘소 박사의 전공은 핵개발과 직접 관련이 없는 순수이론물리학" 이라며 "그를 핵개발과 연관시키는 것은 난센스" 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이 소설과 유사한 사건들이 당시 핵개발팀 주변에서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핵개발팀은 어떻게든 미국이라는 감시자를 피해 핵개발 사실을 숨겨야 했고, 미국은 핵개발의 단서를 잡아내려고 정보망의 촉수 (觸手) 를 곤두세웠다. 74년 11월9일 한국의 핵 과학자 3명이 극비리에 프랑스 파리 교외의 오를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하늘은 푸르렀다. 이들은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개선문 옆 쿠버보아가 (街)에 잡아놓은 숙소로 향했다. 이들은 택시 안에서 깜짝 놀라야 했다. 택시기사가 "한국에서 온 핵과학자냐" 고 물었기 때문이다. 순간 이들은 바짝 긴장했다. 심상치않은 느낌이 들어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일절 핵관련 얘기를 주고받지 않았다.
'한국원자력연구소 30년사' 에는 "74년 11월9일부터 12월10일까지 주재양 (朱載陽.64.재미.전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 외 2명, 핵연료 가공및 재처리사업 추진차 프랑스 방문" 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프랑스를 방문한 그들의 구체적 목표는 물론 나머지 2명의 이름조차 언급이 없다.
취재 결과 주재양씨 외에 원자력연구소 화공개발실장.한국핵연료개발공단 건설본부장을 지낸 윤석호 (尹錫昊.68.전 충남대 교수) 박사와 원자력연구소 핵연료연구실장.한국핵연료개 발공단 핵연료 연구부장으로 일한 박원구 (朴元玖.65.인하대 금속공학과 교수) 박사가 바로 그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23년만에 비밀 털어놔
尹박사는 "23년만에 처음 공개한다" 며 그동안 가슴에 묻어 뒀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尹박사 일행이 핵연료 성형가공 시험시설 도입에 관한 가계약을 서커사와 체결한 직후부터 이들주변에서는 심상치않은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尹박사의 증언.
"다음날 아침 재처리기술과 시설 도입에 관한 가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상고방 회사에 갔더니 직원이 '어젯밤 서커사에 화재가 발생했다' 며 '절대 밤에 나돌아다니지 말라' 고 주의를 줍디다. 당시 우리는 이 말을 크게 유념하지 않았더랬어요. "
이때부터 상고방사는 이들에게 안내인겸 경호원을 붙였다. 그러나 가계약을 체결한 날 저녁 尹박사 일행의 기술협상 창구였던 상고방사의 궤세라는 인물이 차안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사인은 심장마비. 그의 부인은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며칠 동안 회사측에 납득할만한 해명을 요구하며 거칠게 항의했다.
尹박사는 "일련의 사건들이 서커사및 상고방사와 가계약을 체결한 날 발생했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이상했다" 며 "귀국 비행기에 올라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회고했다. 더이상 파리에 있을 분위기가 아니라는 판단아래 떠날 채비를 하는데 출발을 재촉하는 사건이 또 터졌다. 숙소 옆 건물의 항공회사 대형유리가 대낮에 굉음을 내며 폭발한것이다.
일대에 수많은 경찰이 배치됐다. 물론 尹박사 일행이 느낀 불안감은 미국에 대한 피해의식의 발로일 수 있다. 파리는 테러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尹박사 일행이 이들 사건을 '미국이 보내는 경고' 로 받아들일 정도로 핵개발을 둘러싼 미국의 방해는 집요했고 완강했다.
미국은 74년 5월 인도가 지하핵실험을 실시하자 세계 각국의 미 대사관과 정보 채널을 총동원해 각국의 핵개발 여부를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또 원자력 수출국들과 함께 '런던클럽' 을 결성, 핵기술 후진국에 대해 핵물질과 장비의 수출은 물론 재처리.농축.중수 (重水) 제조등 소위 민감한 기술의 국제간 이전을 엄격히 제한하는 핵확산 금지 조치를 강화해나갔다.
이와 함께 당시 핵개발을 본격 추진하던 브라질.아르헨티나.파키스탄등과 이들 국가에 핵기술을 제공하려던 프랑스.서독등에 압력을 넣어 핵기술 이전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미국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갖은 정성을 쏟았다.
尹박사는 "프랑스는 우리와의 협력사업을 최우선 국책사업으로 선정했을 정도였다" 며 "우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관련시설들을 샅샅이 보여주었다" 고 말했다.


佛선 경제적 이익에 관심
이들이 둘러본 시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핵개발 연구기지인 마쿨을 비롯해 라하구의 재처리공장, 로망에 있는 핵연료 가공공장, 파리 근교의 원자력연구소등이었다.
심지어 프랑스 상고방사는 일본에 건설한 도카이무라 (東海村) 와 오아라이 (大洗) 센터의 재처리공장, 그리고 린교도게 (人形峠) 의 우라늄 농축시설등을 귀국 후에 시찰할 수 있도록배려했다.
상고방사 직원들은 尹박사 일행에게 "당신들이 프랑스에 오기 쉽도록 73년 10월 서울~파리간 직항로를 개설한 것" 이라며 은근히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우기까지 했다. 당시 주불 (駐佛) 경제담당 공사였던 이희일 (李熺逸.66.전 농수산부 장관) 씨는 "프랑스는 당시 미국이 주도하는 핵확산금지조약 (NPT) 을 지키기보다 재처리 기술과 시설을 판매해 얻는 경제적 이익에 관심을 가졌다" 고 설명했다.
75년 4월 원자력연구소와 상고방사간에 본계약을 체결할 때에도 미국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007작전' 을 펴야 했다. 상고방사에서는 포앙세 사장이 직접 방한, 윤용구 (尹容九.69.동원공전 학장) 원자력연구소장과 서명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尹씨의 계속되는 증언.
"일단 서명 당사자들이 원자력연구소장실에 모였어요. 그런데 소장실에 정체 불명의 불청객들이 계속 드나들었어요. 아무래도 꺼림칙했어요. 그래서 각자 뿔뿔이 흩어져 그 당시 시청옆에 있는 원자력병원 회의실에서 2시간 뒤에 다시 만났지요. 미국이 눈치챌지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재처리연구시설 공급및 기술용역시설 도입 계약 체결'은 이렇게 이루어진 겁니다. "
청와대에서 핵개발을 지휘.감독한 것으로 알려진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경제 제2수석의 가방 도난사건도 수수께끼다. 72년 5월 吳수석은 정부.군 관계자들과 함께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이스라엘로 갔다.

함께 동행한 김광모 비서관의 증언.
"이스라엘 중개업자인 아이젠버그의 주선으로 주요 군수공장을 둘러보고 숙소로 정한 텔아비브 한 호텔에 돌아와보니 吳수석의 가방이 감쪽같이 없어진 거예요. 아이젠버그가 호텔측에 항의해 후하게 배상을 받긴 했어요. 사실 吳수석 가방에는 여행용품 따위만 들어 있었고 스틱스.엑조세 미사일 관계서류들을 비롯해 진짜 중요한 방위산업 관계서류는 내 가방 속에 있었거든요. 吳수석도 미국의 소행이 아닌가 의심합디다."

“美서 눈치챌지도”불안
이스라엘.오스트리아 국적을 가진 아이젠버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여사 (李承晩대통령 부인) 를 통해 6.25 직후부터 한국 정부와 인연을 맺었으며 박정희 시절엔 김성곤(金成坤).장기영 (張基榮).김형욱 (金炯旭) 씨등 실세에 선을 대어 월성 원전3호기 도입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따냈다.
이후락 (李厚洛) 정보부장을 이스라엘에 초청, 첨단무기 도입에도 개입한 인물이다. 핵개발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재처리를 통해 핵폭탄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확보하는 일. 이 작업의 실무 책임자였던 원자력연구소 연구실장 김철 (金哲.59.아주대 대학원장) 박사 만큼 업무차 프랑스를 자주 드나들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의 증언.
"핵관련 기기 (器機) 를 구입하러 프랑스에 갈 때에는 직접 가지 않고 독일에서 기차를 타고갔어요. 우리가 프랑스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미국이 알기 때문에 프랑스 컴퓨터 코드를 사용하면 도입하려는 시설이나 규모를 미국이 알아차릴 것같아 독일 컴퓨터 코드를 사갖고 갔던 겁니다."
金박사는 프랑스에서 본국에 편지나 자료를 보낼 때도 반드시 우리 대사관의 외교 행낭을 이용했다고 한다. 핵개발은 미국과의 숨막히는 숨바꼭질이었다. 박정희는 왜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해야 했을까.


Articles

1 2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