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새로운 원칙
규칙성을 기본으로 한 설계건물을 배치하는 데 가장 손쉬우면서도 기본적인 방법은 자와 직각자, 도는 때때로 컴퍼스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규칙성을 지닌 직각평태는 엄격한 유형으로 된 교회건물에는 유지될 수 있었지만 지리적 조건에 제약을 받는 일반 건축물에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도래하자 직선적인 파사드와 직각결합이 지배하는 엄격한 설계가 되살아나고, 불규칙적인 평면, 그리고 둔각이나 예각은 금지되었다.
고대의 이러한 설계양식이 중세에도 비교적 잘 지켜졌던 이탈리아에서는 그리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민감한 문제가 되었다. 1500녀경 앙부아즈, 블루아, 혹은 가용에 세워진 건축물의 경우 직각으로 똑바로 선 건물과, 불규칙적으로 배치되고 결합되는 이전 방식으로 설계된 건물이 뒤섞여 있었다. 이러한 부조화는 새로운 원칙과 과거의 경험주의를 따른 건축형태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규칙을 따른 설계가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의 2/4분기에 와서도 생제르맹 앙 레아, 혹은 샹티이와 같이 중세적인 배치로 재건된 성에서 충격적이진 않더라도 상궤를 벗어난 불규칙성을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이델비르크성이나 란트슈트에 있는 트라우스니츠성, 그리고 뮌헨과 드레스덴의 주택에서 불규칙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16세기 건물 중에 비장방형의 배치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카프라롤라의 원형마당이나 그라나다의 카를로스 1세 궁의 원형마당, 건물의 토대 역할을 했던 요새의 모양 때문에 오각형의 배치를 갖게 된 카르랄롤라의 외부 평면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기하학적인 선을 이용했고, 또한 컴퍼스에 의존했다는 사실은 과거의 경험주의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건물에서 사선으로 배치된 벽은 과거 양식의 재적용이자 흔적이라고 하겠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균일한 배치
르네상스 건축에서 건물에 나 있는 창의 모양이 일정하고, 규칙적으로 배열되어야 한다는 것 역시 의무사항이 되었다. 이러한 원칙은 고딕식 성당을 제외하고는 대개의 교회 건물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던 요소였다.
하지만 일반 건축물의 경우 이러한 원칙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교회 건물이 아닌 보통 건축물에서 파사드에 창을 낸 것은 외관에 대한 고려 때문이 아니라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창은 다양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창 사이의 기둥도 그 크기가 서로 달랐다. 규칙적인 창 배치가 이루어진 좋은 예를 이탈리아에서 찾을 수 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미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첸티에서, 미켈로초는 메디치궁이서, 그리고 알베르티는 루첼라이궁에서 동일한 크기의 창문을 규칙적으로 배열했다. 이렇게 창문의 크기와 창문 사이에 있는 기둥끼리의 거리를 균일하게 하는 원칙은 15세기 후반에는 거의 모든 곳에 적용되었다. 1483년에 화재가 난 이후 재건된 베네치아 공작 궁 파사드에 나타나는 불규칙성은 예외적인 것으로, 과거의 습관에 젖어 있던 석공의 탓으로 돌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원칙은 프랑스 건축을 지배한 새로운 원칙 중 첫째 원칙이었으며, 무엇보다 경험주의를 극복하는 데 필요하면서도 효과적인 것이었다. 앙부아즈에 있는 샤를 8세의 저택은 이미 이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이 프랑스에 엄격하게 적용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처음 이러한 원칙이 명백히 드러나는 곳은 블루아에 있는 프랑수아 1세 궁이나 루이 12세 궁의 외부 측변정도였고, 퐁텐블로나 에쿠앙에 있는 건물의 타원형 현관에서는 불완전한 형태로만 나타났다.
이 원칙은 16세기 중반에 들어와서는 일반화되었지만 17세기까지만 해도, 기둥과 기둥 사이의 균일한 배치 원칙과 양립할 수 없는 반 십자형 창문이 널리 허용되고 적용되었다.
이것은 1545년에 지어진 고전주의적인 성인 부르나첼의 북쪽 측면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독일에서도 역시 규칙적인 창문 배치를 거스르려는 기운이 있었지만, 16세기 중반부터는 하이델베르크의 오통 앙리 건물의 측면이나, 란트슈트의 저택 같은 거대한 건물에서 균일한 배치의 원칙이 준수되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 창문의 균일성
기둥 사이에 난 창문이 규칙성을 띤다는 것은 같은 높이로 정렬된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이 원칙 역시 경험주의 시대를 거침녀서 사라져 정비하고 적용해야 했다. 프랑스의 쇼몽, 프랑수아 1세 궁의 측면, 1535년경 지어진 토르가우의 하르테펠스성에는 전통적인 형태의 커다란 나선형 계단이 있는데, 계단은 기둥에 나 있는 창문의 경사면을 따라 비스듬하게 되어 있다. 이것을 대체한 이탈리아식 직선형 계단은 두 계단 사이에 층계참을 두었는데, 이 경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층의 중간부에만 빛이 들어올 수 있었다.
프랑스 성의 경우, 계단의 기둥에 나 있는 공간이나 창문이 일직선상에 놓은 경우가 거의 드물었고, 첫눈에 보아도 계단의 위치를 알 수 있을 만큼 비스듬하게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은 형태는 아제 르 리도, 레스코가 설계한 루브르의 뒷면, 아시에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이탈리아식 계단(보메닐, 슈베르니)이 도입되는 17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빛이 거주층에만 들어오는 이탈리아식 계단의 문제점은 나선형 계단을 도입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다.
한편 이탈리아식 계단의 문제점은 정작 이탈리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비노와 로마의 파르네세궁에서 볼 수 있듯 이탈리아에서 직선형 계단은 건물의 정면이 아닌 모서리에 놓여, 측면으로 빛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대칭
규칙성에 대한 고려는 자연스럽게 대칭, 즉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나누어진 건물의 두 부분 간의 유사성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건물의 대칭의 이루어지려면 우선 설계도면에서 대칭이 이루어져야 했다.
따라서 대칭은 합리적인 건축설계를 필요로 했다. 대칭은 전통적으로 사각형의 안뜰로 하나의블록을 이루었던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궁에 쉽게 적용되었고, 라틴식 십자형 교회 건물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건물의 모든 축에 대칭을 설정하려는 생각은 중앙집중식 건축양식에서 나온 것이다. 대칭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피어나 건축사상 가장 매혹적인 장을 이룬 그리스형 십자가를 주제로 한 모든 다양한 형태들의 원형에서 시작된 것이다.
종교적인 건축물에서 새로운 양식을 거의 만들지 못한 프랑스의 경우, 대칭이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성에 대한 구상에서였다. 이 구상은 중간급 건물(아제 르 리도, 빌사뱅, 플뢰리 앙 비에르, 발레리)에 보급된 수직배치의 형태인 'T자형'을 차츰 제거하고, 두 날개를 가진 '파이자형'으로 대체해 정사각형(슈농소, 샹보르, 샬로, 라 뮈에트 드 생 제르맹, 에쿠앙, 앙시 르 프랑)이나 장방형(볼로뉴 숲의 마드리드, 튈르리) 설계가 선호되었다.
1540년부터 퐁텐블로에 은거한 세를리오는 그의 여섯 번째 책에서 기초적인 기하학적 도면을 이용하긴 했지만 모든 민간건축 모델의 주요 원칙을 제시했다. 앙드루에 뒤 세르소는 세를리오의 책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구상을 설계로 옮겼던 것 같다. 그의 설계도면은 1559년에 첫권이, 1582년에 마지막권이 출간되었다.
중심축에 위치한 입구
대칭을 중심축이라는 개념을 함축했다. 기둥 사이의 간격을 균일하게 함으로써 고대 건축의 규칙적인 연속성의 원리에 충실했던 이탈리아인은 중심축을 중시하지 않아 일반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중심축을 두면 기둥수가 홀수가 되는 것이다.
베네치아의 도서관, 조폐국, 행정장관 저택, 피렌체의 우피치궁, 로마의 카피톨리움 측면에 있는 성과 같은 대형 공공건물이나 숨낳은 실레를 보여 주는 개인 소유의 성(브라만테와 라파엘로가 로마에 지은 성, 산미켈 리가 베로나에 지은 성)은 중앙에 특별한 강조를 하지 않은 연속성을 띤 파사드를 보여 준다.
다른 나라에서는, 중심축을 강조해 건물입구를 웅장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성당문의 전통에 기인한 듯하다. 프랑스 성도 마찬가지이다. 블루아에 있는 루이 12세 궁의 정문은 중심축을 두지 않았지만, 프랑수아 1세 시대에 중간축의 가치는 커졌으며 1540년부터 현대의 개선문처럼 기둥에 돌출부를 넣는 것이 보급되었다. 에쿠앙, 아네, 루브르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강화된 중심축은 파사드의 닫집으로 변화될 정도였으며, 특별한 장식(오더, 홈, 조각)과 화려한 지붕으로 꾸며졌는데, 이것은 17세기까지 통용되었다.
이탈리아의 궁에서 직접적ㅇ니 영감을 받은 스페인은 그라나다의 카를로스 1세기 궁과 대법원 건물, 그리고 톨레도의 궁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중앙 입구를 기둥으로 장식했다. 독일에서는 반대로 특별한 장식으로 입구를 강조하고, 돌출부나 닫집을 만들지는 않았다.
비례, 계산된 조화
부분과 부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일컫는 비례는 르네상스 시대의건축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대상이었다. 중세의 비례 개념은 종교적인 건축물에 국한된 단순한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기껏해야 사각형이나 삼각형 등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에 기초해 중앙홀의 높이와 넓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수의 가치와 정확한 척도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르네상스는 계산을 통해 조화의 원칙을 회복하려 했다.
15세기 초부터 이미 브루넬레스키가 이것을 건축에 적용했다. 과거의 비례 개념에 근거한 산 로렌초의 경우, 커다란 아케이드와 중앙홀 높이의 비례는 7대 11이었지만, 브루넬레스키가 전체적인 설계를 맡은 산토 스피리토의 경우는 6대 12였다. 이것은 그가 물론 의도한 결과였다. 그러나 고대에 정립된 조화로운 비레 이론을 종합한 사람은 진정한 인문주의자라 할 수 있는 알베르티였다.
고대의 수학가 피타고라스는 음악에서 협화음이 길이와 관계 있음을 밝혀 냈다. 이를테면 파이프 오르간이나 현악기와 경우 1대 2(8도), 2대 3(5도), 3대4(4도)의 비례가 사용되었다. 또한 세계의 내재적인 조화를 도출한 프라톤의 저서 '티마이오스' 역시 음악의 협화음이 2배수(1-2-4-8), 3배수(1-3-6-9)등을 단위로 보여 주었다. 알베르티는 이러한 고대의 비례 관계에서 이상적인 비례를 설정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로써 건축은 음악과 같은 자연스런 조화를 나타내게 되었다. 건축과 음악이 지닌 근본적인 유사성은 '조화'라는 개념 속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원칙은 베네치아의 인문주의자인 프란체스코 조르지가 산 프란체스코 델라 비냐(1535) 성당에 적용했다. 모든 차원은 3배수에 기초하며, 각 부분은 5배수나 8배수에 기초해 있었다. 또한 모든 길이는 8배수와 5배수에서 변형된 간격을 따랐다.
베네치아에서 수련생활을 거치 팔라디오는 여러 차원들 사이에 산술비례(예컨대 6-9-12), 기하비례(4-6-9-, 4/6는 6/9와 같다). 조화비례 (6-9-12, (6/8)/12은 (12/8)/6과 같다)를 설정했다. 이러한 현학적인 연구에 대해 사람들은 그렇게 미세한 비례관계를 과연 사람의 눈으로 감지해 낼 수 있을까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례 연구는 르네상스 건축이 그리스 예술의 주요 원칙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즉, 통분성(이것은 그들이 모든 의미를 부여했던 '대칭'이다)의 원리에 따라 건축의 모든 부분은 기초부분과 일정한 배수 관계를 가짐으로써 전체적인 조화에 이른다. 처음에는 극소수의 건축가만이 파랄디오와 같은 복잡한 계산을 할 수 있었지만, 점차 이러한 방식이 일반적인 것이 되어 마침내 경험주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건축가는 의식하든 못하든 부분적으로 비례이론의 도움으로 새로운 방식이 오더체계를 만들었다.